알약 타령하던 릴리아나는 어디 갔는지....뻔뻔하게 자기 마음에 드는 음식을 챙기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이거."
“운호, 이 음식은 좀 아닌 거 같다. 전체의 퀄리티로 따지면 전에 음식점이 더 낫군."
“전 나쁘지 않은데요?"
처음에는 내 맛집 찾아다니는 행동이 기이하게 여겼던 그녀들도 어느샌가 즐기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분들.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신나게 맛 평가를 하던 우리들의 사이에 낯선 남자 놈의 목소리가 끼어들자 정적이 흘렀다.
시선이 우리를 조용하게 한 인물에게로 자연히 돌아갔다.
그곳에는 제비처럼 생긴 얼굴에 금발을 찰랑이는 남자 놈이 서 있었다.
그는 하얀 이빨을 반짝이며 느끼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양옆으로는 호위인듯한 깔끔한 갑옷을 입은 기사 두 명이 서 있었다.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 아일라나 루나는 조금 불쾌한 기색이었고, 릴리아나는 언제나 같이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하, 식사를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레이디분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더군요.”
놈의 느끼한 말에 지금까지 먹은 음식이 다 올라올 거 같았다.
“자기소개하겠습니다. 저는 라벤타 영주님의 셋째아들! 로버트 라벤타라고 합니다!"
“그래, 알았다. 가봐라.”
릴리아나가 손수건으로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예?”
놈의 웃는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이런 상황이 처음인지 놈은 어리둥절한 듯했다.
“내가 작게 말한 것도 아닌데 못 들었느냐. 가보라고 했다.”
“레, 레이디. 저는 라벤타 영주님의 셋째아들! 입니다.”
릴리아나의 축객령에 녀석은 포기할 줄 모르고 구질구질하게 들러붙기 시작했다.
"꺼지라고 해야 알아들으려나....아니면 귀가 먹은 건가?”
도저히 포기할 거 같지 않은 셋째 놈의 모습에 결국 내가 한 소리 할 수밖에 없었다.
“네 이놈!! 감히!! 내가 누군 줄 아느냐! 바로 라벤타 영주님의 셋째아들!! 이다! 귀족을 향해 무슨 말버릇이냐!"
미친놈이 종로......아니, 릴리아나에게 뺨 맞고 갑자기 나한테 급발진했다.
밥맛이 뚝 떨어졌다.
허공에서 지팡이를 꺼내 폼나게 바닥에 내리찍었다.
-쿵.
“해보겠다는 건가?"
내가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호위로 있던 두 기사가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아공간! 도련님, 최소 6서클 마법사입니다."
호위 기사의 그 말에 셋째 놈이 흠칫한다.
녀석은 기사에게 내가 6서클 마법사라는 소리를 듣고 갑자기 분노조절장애가 치료됐다.
“다, 당신이 고위 마법사라도 이건...그렇습니다. 그녀들과 나와의 문제입니다.”
"이건.....또 뭔 참신한 개소리야."
이놈이 지금 내가 그녀들과 같이 밥 먹는 거 못 봤나?
나는 이 사태에 어이가 없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163화>모욕
“개, 개소리라니! 천박한 말투군요! 저를 모욕하는 겁니까?!"
"말귀를 못 알아먹는 놈이군."
“도대체 당신은 레이디분들과 무슨 관계이길래 끼어드는 겁니까.”
왜 끼어들다니.….
이놈은 뇌가 좀 이상한 게 맞다.
아니면 귀족들은 다 이런가?
“무슨 관계 이기는 셋 다 내 여자다."
"어머?"
“뭐?!”
“운호 녀석, 은근슬쩍 터무니없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구나.”
내 그 말에 영주집 셋째 아들놈은 진심으로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굉장히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당신 얼굴에 이런 미녀가 세 명이나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
퍼억!
"크악!!"
셋째 아들놈의 선 넘는 발언에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갔다.
놈은 주둥이에 내 커다란 주먹을 맞고 날아가 식당 테이블 하나를 박살 내고 자빠졌다.
움찔거리며 일어나지 않는 게 기절한 모양이었다.
-톡, 톡...데구르르......
정적 속, 놈의 입안에서 튀어나온 피로 물든 하얀 이빨이 바닥에 뒤늦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공, 공자님!"
자기들의 도련님이 맞아 기절한 걸 보고 뒤늦게 두 기사가 내게 달려들었다.
빠르게 크게 한 발짝 내딛음과 동시에 달려드는 기사 한 놈을 내 커다란 체구를 이용해 어깨로 들이받았다.
쿵!
“컥!"
내 어깨에 들이 받힌 놈이 흉갑이 찌그러진 채 바닥을 굴러 구석에 처박혔다.
그 역시 기절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틈을 노려 나를 갈라오는 또 다른 기사 놈의 소드 오러.
그 소드 오러를 손으로 잡았다.
“소, 소드 오러를 맨손으로?!"
내 손에 잡힌 검을 본 기사가 경악했다.
오러 블레이드 정도는 되어야지, 소드 오러 정도로는 내 손에 흠집도 낼 수 없다.
마력으로 감싼 내 지팡이가 놀라 굳은 기사 놈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지팡이에 맞은 갑옷의 옆구리가 움푹 들어가며 기사 놈의 갈비뼈가 작살났다.
"억!"
"억!" 소리 나는 고통에 내려온 기사의 턱을 무릎으로 올려 쳤다.
오적.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붕 떠 날아가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세 놈이 두들겨 맞고 정신을 잃었다.
아무래도 죽이면 귀찮아질 거 같아 힘을 조절했다.
잠깐 사이에 일어난 뜻밖의 사태에 식당 손님들을 눈을 똥그랗게 뜨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잘~한다. 마법사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주먹으로 두드려 패고.”
릴리아나가 그 광경을 보고 한소리를 했다.
"크흠. 이건....스트랭스 마법을 썼다."
“그 나불거리는 입만은 마법사의 마법 영창 못지않구나.”
“운호! 네가 사고를 치면 어떻게 해! 전에 나한테는 사고 치지 말라고 그렇게 구박하더니!"
릴리아나에 이어 아일라까지 합세해 나를 비난했다.
“아일라. 사내라면 참지 말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저 귀족 놈은 그 선을 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맛집 투어는 이걸로 끝이다. 이대로 떠나야겠어.”
자칭 성주의 셋째 아들이라는 놈을 두들겨 팼다.
당연히 이대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맛집 투어를 다닐 수는 없었다.
숙소에 놓고 다니는 것도 없으니 이대로 라벤타를 떠난다고 해도 문제는 없었다.
"그전에 챙길 건 챙겨야지."
쓰러진 녀석들의 품을 뒤졌다.
골드가 좀 나왔다.
역시 그렇게 영주집 셋째 아들이라고 자랑하던 귀족 놈에게 많이 나왔다.
다 합해서 70골드쯤 됐다.
부수입으로 나쁘진 않았다.
그중 10골드 정도를 선심 쓰듯 주인에게 건넸다.
"여기 수리비다."
주인은 얼떨떨해하면서 두 손으 공손하게 골드를 받았다.
내가 생각해도 이렇게 사람 좋은 모범 시민인데 날파리가 꼬여 성질을 돋운단 말이지….
그 결과 원래 일정도 망가졌다.
그렇게 영주집 셋째 아들놈을 생각하니 다시 화가 치솟아 올랐다.
'뭐? 내 얼굴이 어쩌고 어째?"
잘생기지 않았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모욕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직 기절해 뻗어있는 괘씸한 놈의 다리를 걷어찼다.
-우득.
놈의 다리가 부러져 기괴한 방향으로 꺾였다.
그 광경에 레스토랑 손님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다.
다리가 부러지며 놈이 움찔하긴 했지만, 별 반응은 없었다. 녀석이 기절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음식점을 나섰다.
*
*
*
"마리, 미안하군. 일이 생겼다.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다."
식당에서 나온 나는 마리에게 이별을 고했다.
영주의 아들을 패는 대형 사고를 쳤는데 그녀를 데리고 다닐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마리의 행동은 내 예상을 벗어났다.
“나리! 저를 받아주십시오!"
마리가 갑자기 내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음?"
“저도 나리를 따라가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나리처럼 저를 잘 대해 주신 분은 없었습니다. "
“나는 여기 영주의 셋째 아들놈을 두들겨 패버렸어. 그래도 따라오겠나?”
“괜찮습니다. 어차피 저는 가족도 없습니다. 저를 받아주신다면 운호 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따르겠습니다.”
그동안 은근슬쩍 나를 훔쳐보던 그녀의 시선은 그동안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나는 성주의 아들을 팼다.
연좌제로 잡혀 죽을지도 모르는데 고향을 버리고 나를 따라온다라….
이건.....그린 라이트였다.
‘흠.....미녀들의 숲도 그렇고 나는 이 세계에서 그래도 여자들에게 먹히는 남자가 아닐까?
고위 마법사에 돈도 많아 보였을 테니.
그녀가 내게 반할 만한 요소는 여러 가지 있었다.
여자 마부는 희귀한 존재다.
마부 상인이나 호텔지배인도 구하기 곤란해하던 인재였다.
그동안 맛집 투어를 하면서도 마리를 제외하고는 여자 마부를 본 적이 없었다.
“좋다. 마리. 네가 나를 따라오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감사합니다! 운호 님! 아니, 주인님!"
“그럼 남쪽 성문으로 최대한 빨리 이동하자. 이 도시를 빠르게 벗어나야 한다.”
“네!”
우리는 마차에 올라타 빠르게 남문을 향해 이동했다.
"주인님! 성문이 닫혀있습니다. 앞에 병사들도 있습니다!"
마리의 말에 마차 밖으로 고개를 빼보니 이미 성문은 막혀있었다.
그리고 그 앞은 병사와 바리케이드로 막혀있었다.
'반응이 빠르군.
나는 마차의 지붕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지팡이에 마력을 왕창 불어넣었다.
검은 마력의 구체가 농구공 정도의 크기까지 부풀어 올랐다.
나의 과도한 마력 주입에 지팡이가 그만 마력을 넣으라는 듯 덜덜 떨린다.
마력을 더 불어넣으면 지팡이가 부서질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익스플로전은 보통은 야구공 크기 정도로 사용했다.
지금은 농구공 크기.
'위력이 얼마나 되려나….’
성문을 뚫을 수 있을까.
뭐 안되면 몸으로 때우면 된다.
성문은 몰라도 이 정도 크기의 익스플로전이라면 성문 앞에 있는 병사들도 몰살될 거로 예상됐다.
윗대가리를 잘못 만나면 밑에 놈들이 죽어 나가는 전형적인 예였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어휴... 무식한 녀석."
그때 한숨을 쉬며 마부석으로 나온 릴리아나가 양산을 펼치자 그 표면에 신비한 문양이 은은한 빛을 냈다.
그리고 그녀의 그 고운 손이 허공을 한번 휘젓는다.
“오와왁!! 뭐, 뭐야 몸이!!"
"마, 마법이다!"
그녀의 마법에 성문 앞을 막고 있던 병사들이 그대로 빗자루 쏠리듯 쏠려 깔끔하게 옆으로 날아가 치워졌다.
의외로 마음이 약하군...병사들이 죽을까 봐 치운 건가..
"간다. 풀파워 익스플로전."
나는 근엄하게 마법 지팡이 끝에 응축된 풀파워 익스플로전을 성문을 향해 날렸다.
검은 구체가 빠르게 날아가 성문에 부딪히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꽈앙!!
성문이 시원하게 박살 나며 길이 열렸다.
풀파워 익스플로전의 그 시원하고 화려한 파괴력은 만족스러웠다.
하지만.....이게 한계라는 거지.
"마리, 길이 열렸다. 목표는 슬러버다.”
“........네? 네! 알겠습니다! 주인님!"
나의 대마법에 놀라 입을 벌리고 얼이 빠져있던 마리.
내 명령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마차를 몰았다.
릴리아나 덕에 살아난 얼이 빠진 병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우리는 라벤타를 벗어났다.
*
*
*
마이클은 부하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라벤타 영주의 셋째 아들을 두들겨 패고 단 한 번의 마법으로 남쪽 성문을 부수고 떠났다라.....마리는?”
“그의 마부로 함께 떠났습니다.”
운호라는 사내는 터무니 없이 강력한 익스플로전 마법으로 성문을 박살 내고 떠났다.
“7서클 마법사가 익스플로전을 쓴다고 해도 그렇게 쉽게 성문을 부수지 못한다.”
“그, 그러면?"
“초월자가 맞는 거 같군.”
마이클은 그가 여자들과 한량처럼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다닌다는 소리를 듣고 반신반의했지만, 이제는 확신했다.
라벤타 자작은?"
“익스플로전 마법 일격에 성문이 박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추적을 포기하는 듯싶습니다.”
정상적인 영주라면 당연한 선택이다.
아들이 죽은 것도 아니다.
겨우 두들겨 맞았다고 고위 마법사를 적으로 돌리기에는 수지가 맞지 않았다.
쫓는다고 잡을 가능성도 희박했고.
“분수를 모르고 추적한다고 했으면, 얼굴을 봤어야 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사리 분별은 하는군.”
마이클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수도에 연락해라. 그리고 우리는 마리의 뒤를 쫓는다.”
“예, 알겠습니다.”
<164화>강화
*
*
*
이미 사고는 쳤고….
추적해올까.
그 추적이 무서운 건 아니다.
추적하다 쏠려나갈 병력이 안타까운 거지.
슬러버에서는 어떨까.
'역시 수배가 들어가려나?"
라벤타의 경우를 보면 소식이 그렇게 빠르진 않은 모양인 거 같긴 했지만... 에르푸에서와는 또 상황이 달랐다.
에르푸에서는 그래도 나름대로 정체를 숨긴 습격이었고 이번엔 대놓고 저질렀다.
고민이 깊어지......진 않았고, 뭐하면 슬러버가 들어가기 껄끄러운 상태가 된다면 나 혼자 잠깐 들어갔다 나와도 된다.
<퀘스트: 어비스 침식 미궁에 진입하세요.>
<진입 보상: 「스킬」 「영웅소환 확정권 1장」 「스킬포인트 10>
일단 첫 퀘스트는 미궁 진입으로 완료된다.
입구만이라도 들어가 보면 내가 가고자 하는 목표인지 쉽게 판별이 될 터였다.
'수니가 휴가 갔으니 투명화는 못 하고....릴리아나에 해달라면 되려나.’
“이제 와서 사고를 친 게 걱정이 되는 거야?"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있던 나를 보고 아일라가 물었다.
“이미 저질러진 일이다.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나는 다시 그 귀족 놈의 주둥이에 주먹을 날릴 거다.”
“그러면 뭐 때문에 그러는데.”
“나는 이번 일로 내 마법의 한계를 느꼈다.”
“뭐?"
마차 안, 여자들의 나를 향한 시선이 먼 개소리나는 표정이었다.
“네 한계가 아니라 지팡이의 한계겠지."
릴리아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크흠, 어찌 됐든 나는 내 마법이 한계를 넘기를 바란다.”
“어떻게 넘게?"
릴리아나가 나를 가소롭게 보면서 묻는다.
그 모습이 괘씸하긴 했지만, 지금은 참아야 할 때였다.
“그래서 생각했다. 지팡이에 더 많은 마력을 담을 수 있다면 내 익스플로전 마법도 더 강력해지지 않을까 하고, 릴리아나 네가 내 마법 지팡이를 강화해줬으면 한다.”
내 말에 릴리아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넌.....참으로.....뻔뻔하구나....언제까지 그 마법 지팡이에 의존할 셈이냐. 그런 장비에 의존해서는 진정한 마법사라고 할 수 없다.”
언제까지기는....
앞으로도 별일 없으면 계속 쓸 생각이었다.
그리고 몸에 고급 마법 물품을 둘둘 두르고 있는 릴리아나가 그런 이야기를 해 봐야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마법사는 쉬운 길로만 가서는 최고가 될 수 없다. 지금이라도 내 제자가 되거라. 그러면 진정한 마도를 알려주마."
당연히 싫었다.
마법이 어려워 보이는 건 둘째치고 배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았다.
그리고 굳이 마법을 배울 필요 있나...이렇게 좋은 아이템이 있는데….
어려운 길과 쉬운 길이 있다면 당연히 쉬운 길로 가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강화해줄 수 있나?"
릴리아나는 내게 그녀의 말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대가를 받는다면 못 해줄 것도 없지."
"마석?"
"냉장고."
......그건 곤란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지금 냉장고는 대체재가 없다. 그리고 시원한 음료라는 건 귀하다.
“흠....그거말고 다른 걸 주지."
“다른 거?"
그녀는 전자제품을 원하는 거 같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생각보다 몇 개 되지 않았다.
냉장고를 제외한 내가 가지고 있는 전자제품이라고 해봐야 노트북...휴대용 게임기... 겨우 그 정도였다.
‘노트북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안 되고…. 이럴 줄 알았으면 여분을 더 챙길 걸 그랬군.'
그래도 휴대용 게임기는 2대를 가져왔다.
산텐도와 스톰덱.
그중 하나가 나을 거 같았다.
릴리아나에게 스톰덱을 건네주기로 했다.
스톰덱의 게임들은 어차피 게임기를 하나 더 사서 다운만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이 세계 온다고 게임도 빵빵하게 채워왔으니 그녀도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충전시켜주지 않으면 얼마 안 가서 먹통이 될 게 뻔하지만.….'
충전하려면 전기가 있어야 하고 전기는 마력 발전기가 필요했다.
충전할 수 있는 마력 발전기는 2대 가져왔다.
발전기 한 대는 이미 영웅의 안식처에 놔두었고, 나머지 한대는 인벤토리에 있었다.
게임기 배터리가 떨어져 먹통이 된다면, 그때 가서 릴리아나에게 또 뽑아 먹을 수 있을 거 같다는 사악한 생각이 피어올랐다.
"이게 무어냐?"
"휴대용 게임기다."
"휴대용 게임기?"
"간단하게 말하면 오락기구다. 여기 화면에 있는 그림 하나하나가 다 오락거리다.”
릴리아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냉장고가 더 나아 보인다만….”
"어허, 섣불리 판단하긴 이르지.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때 가서 말해도 늦지 않아."
간단하게 언어를 몰라도 할 수 있는 가벼운 게임을 하나 실행시켜 줬다.
“자 이 스틱과 버튼으로 화면 안의 캐릭터를 움직이는 거다. 스틱이 움직이는 거고 이 버튼이 점프다. 화면 끝까지 가면 클리어지."
"이, 이건.... 이리 줘봐라."
그녀는 내가 준 게임기를 뺏어 들고는 눈을 반짝이며 게임기를 가지고 놀았다.
“화, 확실히 신기한 물건임이 틀림없구나....어떻게 이런 물건이 있는 거지?”
"어때, 그건 냉장고보다 더 고도의 기술...아니, 마법이 인첸트 된 거다.”
"이, 이게 마법이라고?"
한동안 정신없이 가지고 놀게 한 후에 그녀에게서 휴대용 게임기를 뺏었다.
“뭐 하는 짓이냐! 한참 중요한 순간에!!"
“이건 아직 너의 것이 아니다."
“이, 쪼잔한..….”
“어허....다른 마법사를 찾아봐야 하나….”
“아, 알겠다. 지팡이를 강화해주마. 어서 그 게임기를 내놔라!”
하지만 나는 게임기를 인벤토리에 넣어버렸다.
“뭐?!”
"강화가 먼저다."
"이익!! 아, 알았다. 어서 네 지팡이를 내놓거라. 약속은 지켜야 한다. 문호."
"걱정하지 마라. 약속은 지킨다."
내가 나중에 주려는 이유는 게임에 빠져 지팡이 강화에 소홀할까 봐서였다.
그녀는 게임을 처음 접한다.
상당히 빠져들 가능성이 컸다.
*
*
*
“지금 상태의 지팡이에서 익스플로전 마법을 더 강하게 하는 건 불가능하다.”
“뭐?"
릴리아나의 그 말은 내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지팡이의 몇 가지 기능을 지운다면 가능하다.”
"뭘 지우는 거지?"
“그건 네가 골라라. 기능이 단순해질수록 네가 익스플로전에 불어넣을 수 있는 마력은 커진다.”
“뭐가 있었더라...앱솔루트 실드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거 지우자."
“맵솔루트 실드? 괜찮겠나? 8서클 마법이다. 이 지팡이의 원래 주인도 상당한 공을 들여 인첸트 했을 거다.”
"괜찮다."
내 가장 큰 장점이 방어력이다.
앱솔루트 실드보다 내 물질화한 마력이 약하다고 볼 수 없었다.
"지금까지 지켜봤지만.....네 녀석의 익스플로전은 다르다. 라벤타의 성문을 부수는 걸 보고 확신했다.”
“뭐가 다르지?”
“마법에는 각자 맞는 적성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네 익스플로전은 기이할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어. 도시의 성문은 마법에 쉽게 부서지지 않게 설계되어있다. 그걸 너는 익스플로전 마법 일격에 부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었나?"
“익스플로전이 강력하다고 해도 도시의 성문을 일격에 부술 정도가 되려면 중위라면 여러 명의 마법사가 준비해야 하고 7서클도 힘들다. 8서클은 돼야 가능한 일이다."
릴리아나의 교수모드에 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내 마법 지팡이를 위해서라면 참고 견뎌야 했다.
하암.......그래서 나는 마법 천재였다는 건가?"
무슨 해괴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 릴리아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놈이!! 라이트 마법 하나도 할 줄 모르는 녀석이 무슨 마법 천재냐! 마력이 특이하다는 거다! 기이할 정도로 익스플로전 마법에 잘 맞는다는 이야기다. 운호, 그대가 마력을 활용하는 방법을 보면 어째서인지 대충 감이 잡힌다만…."
“흠 흠, 그래서?"
“오로지 익스플로전만을 위한 지팡이로 만들어주지. 어떤가?"
"괜찮은 아이디어군.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군.”
진작에 그렇게 말하면 되지.
쓸데없이 서두가 길었다.
물론, 지금 내 마법 지팡이를 볼모로 잡은 릴리아나에게 그런 불만을 표할 수는 없었다.
*
*
*
마차로 야영할 거 하면서 여유 있게 이동했음에도 바렌타에서의 추적은 없었다.
'포기한 건가?'
몇 군데 부러뜨리긴 했지만, 신경을 써서 죽이진 않았으니 불구대천의 원수까진 아니다.
그래서 포기한 것일 수도 있다.
릴리아나가 내 마법사로서의 한계를 돌파시키기 위해 지팡이를 개조하는 데는 3일이 걸렸다.
“운호, 그대의 마력에 맞춘 오로지 익스플로전만을 위한 지팡이다. 다른 마법사들이 안다면 무식하다고 놀릴 지팡이이기도 하지."
릴리아나가 내게 지팡이를 건네주며 말했다.
지팡이 머리 부분의 파랬던 구슬이 검게 변한 거 빼고는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릴리아나가 지팡이를 개조하며 지팡이에 마력을 불어넣으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 후로 검게 변했다.
“8서클 마법사조차 최대의 성능을 끌어내기 힘들 거다. 하지만 너는 무식한 마력량을 가지고 있으니 온전히 지팡이의 성능을 끌어낼 수 있겠지."
릴리아나의 그 말을 들으니 마법 지팡이를 사용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