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세계는 햇볕이 쨍쨍했다.
한여름이다.
지금 다른 천부문이나 생존자 캠프 사람들은 이 땡볕에서 거주 구역으로 정한 장소를 청소하느라 개고생하고 있을 거다.
일해라 일꾼들아.
이러려고 귀찮을지도 모르는 캠프를 접수한 건데 열심히 해야지.
옥상정원에서 물을 주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아, 운호 님.”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내게 조금 놀란 듯했지만 이내 곧 빼꼼 인사를 했다.
그녀의 이름은 모른다.
전에 약탈자 놈들 아지트에서 구해온 여자다.
천부문에서 적응을 못 하고 다시 여기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당연히 공짜로 먹고 재워줄 수는 없었다.
그녀들은 학교 건물의 청소와 같은 일을 한다.
‘흠....멀쩡해 보이는데….’
여자 대부분이 천부문에서는 일상생활을 하기 힘들 정도였다고 했다.
하긴 이곳에는 나 외에는 남자가 없는 것도 클 거다.
그녀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보인다. 인벤토리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내줬다.
“그래, 더울테니까. 이거 먹고 하라고.”
“아! 예, 예! 감사합니다!”
아이스크림을 받고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는 그녀를 뒤로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휴게실 겸 식당으로 들어가자 시원한 공기가 들이닥쳤다.
에어컨 바람이다.
내가 아이들을 위해 설치했다.
나야 육체가 강화되면서 외부 온도에 영향을 받지 않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꼬맹이들은 시원한 바람을 쐬며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었고 한수지와 30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설화의 엄마 주하란이었다.
설화를 만나러 종종 찾아오던 그녀는 왔다 갔다 하며 아이들과 많이 친해졌는지, 한수지와도 허물없이 대화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여름이 되고 부쩍 이곳에 있는 일이 많아졌다.
그건 당연히 에어컨 때문이었다.
천부문은 에어컨을 쓸 여유까지는 없었다.
주하란은 예전 같았으면 어떻게든 껄떡댔을지도 모를 미모였지만.
나는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을 제어할 수 있게 됐다.
.........솔직히 컨트롤을 할 수 있게 된 건지….
언제든 안을 수 있는 여자들이 많아서인지….
잘 모르겠다.
“어? 아재.”
“어서 와요. 박 서방.”
나를 발견한 한수지와 주하란이 반겨준다.
“다른 애들은?”
“응? 집 보러 나갔는데….”
내가 거주지를 옮기는 걸 계획을 한다고 하자 지아와 채원은 살만한 곳을 살펴보는 거 같았다.
설화는 아마도 좀비 청소작업 중인 현장이 아닐까.
나는 그녀에게 생존자 캠프 관리의 전권을 줬다. 캠프 간부들에게 그녀를 나와 똑같이 생각하라고 했다.
그녀는 내 여자기도 하지만.
강하기도 하니 무시당할 일은 아마도 없을 거다.
백설화에게는 대충해도 된다고 했지만, 성실한 그녀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다.
땡볕에 고생하는 걸 보니 괜히 맡겼나 싶기도 했다.
‘그냥 임구성한테 맡길 걸 그랬나?’
“그나저나 아저씨 들어봐. 내가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어. 설화 걔 컨셉이였어.”
한수지는 왠지 신이나 있었다. 그녀는 괘씸하게 바쁜 설화의 뒷담화를 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게 누군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컨셉?”
별 얘기는 아니었다.
천부문주 할배는 설화가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예뻐했고 텔레비전도 같이 보기도 했단다.
문제는 할아버지가 보던 드라마가 사극이었다는 거.
결국 할배에게 물들어 설화는 사극 드라마 덕후가 됐다.
요상한 말투는 무협 아닌 사극의 영향이라는 거다.
‘설화 녀석 그냥 사극 덕후였던 건가? 어린 시절의 학대가 아니라 다행이라 해야 하나….’
그녀들과 함께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수니가 보고해왔다.
[주인님, 청주 관리자로부터 중급 침식체 보고입니다.]
거주 구역 정리 때문에 청주는 아직 본격적인 사냥은 못 하고 있었다.
일단 천수호와 죄수들을 보내 사냥시키고 있었다.
놈들의 관리자가 연락한 모양이었다.
드디어 첫 수확인가?
“죄송합니다. 볼일이 생겨서.”
주하란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깐 갔다 오는데 스킬포인트 하나다.
당연히 가만 있을 수 없었다.
“호호. 박 서방. 잘 다녀와요.”
주하란의 배웅받으며 청주로 향했다.
순식간에 하늘을 날아, 청주에 도착했다.
-쿵.
히어로 랜딩.
왜 이렇게 히어로 놈들이 환장하는지 한번 해봤다.
해보니 알 수 있었다.
이게 왜 정석이 됐는지.
팔과 다리로 적절한 충격을 분산시켜 나름 효율적인 착지였다.
폼도 잡고 효율도 잡고 일거양득.
다른 자세를 생각해봤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체조도 아닌데 뻣뻣하게 서서 착지하는 것도 좀 이상한 거 같고….
그렇다고 착지의 충격을 줄이겠다고 구르는 건 폼에 살고 폼에 죽는 히어로 놈들이 절대 하지 않을 짓이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내 앞에는 긴장으로 뻣뻣하게 서 있는 남자가 있었다.
30대 정도의 멀끔한 인상의 남자였다.
‘누구지?’
[죄수들 관리자로 임명한 도현성이라는 인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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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가 알려주자 기억이 났다.
죄수들은 천수호를 포함해 8명이 한 조로 이곳 청주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종시에서 아침 일찍 차를 타고 청주로 이동한다. 그리고 사냥해서 마석을 채취하고 캠프로 돌아가는 일과였다.
당연히 임금은 없다.
죽지 않을 정도로 밥만 먹이면 된다.
당연히 양심의 가책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악독한 짓을 저지른 놈들이니 막 써도 된다는 훌륭한 명분을 가진 노예 인력이다.
원래 세계도 악질적인 빌런은 전방으로 보내 북한에서 내려오는 몬스터 사냥을 시킨다.
그런 정부 놈들이 하는 짓을 보고 생각한 아이디어.
해보니 왜 하는지 알 거 같았다.
이건 가만히 있어도 마석이 굴러 들어오는 황금알 낳는 거위다.
하지 않는 게 바보였다.
황금알 낳는 거위들 관리자로 임명한 인간은 2명이었다.
도현성은 그중 한 명이었다.
관심이 없는 남자다 보니 순간 기억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는 D급 강화계 각성자로 원래 생존자 캠프에서 괴물 좀비를 사냥하던 간부였다.
D급 각성자이기도 하니 전투 능력은 있겠지만, 죄수들의 사냥에는 웬만하면 손을 대지 말라고 시켰다.
그에게는 그저 죄수들의 관리만 잘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죄수사냥팀은 일단 죄수 관리자 두 명에 대충 한 분대 규모로 유지할 생각이었다.
나머지 간부 한 명은 죄수 놈들을 지키고 있는 거 같았다.
“중급 침식체를 발견했다고?”
“네. 5미터 정도 크기의 거대 거미 괴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도현성이 내 눈치를 보며 보고했다.
“죄수 두, 두 명이 죽었습니다.”
뭔가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가 했더니 별거 아닌 일이었다.
지금 죄수사냥팀은 각성자와 비각성자가 섞여 있다.
각성자는 천수호를 제외하면 겨우 강화계 F급이 하나 포함되어 있을 뿐이었다.
사상자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거미 괴물이 한 마리씩 나오면 모르겠지만 도시 안으로 들어갈수록 많아지는 건 당연했다.
“캠프에 있는 죄수들은 많아. 적당한 놈들로 네가 골라서 보충해. 네 판단에 따라 죄수 놈들 더 보충해도 괜찮고….”
“예. 알겠습니다.”
세종시에 종종 흘러들어오는 인간들은 멀쩡한 생존자뿐이 아니다. 미친놈들도 흘러들어온다. 그런 놈들을 잡아 가두고 있었다.
전에 장서원이 실험하려고 잡아놓은 놈들도 꽤 있었고.
아직 굴릴 죄수 놈들이 부족하진 않았다.
“놈들은?”
“죄, 죄수 말입니까?”
“그래.”
“후퇴한 뒤에 쉬고 있습니다.”
“..........”
“뭐, 뭐라도 시킬까요?”
내 얼굴에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 드러났는지, 도현성이 내 눈치를 보며 묻는다.
아직 한낮이다.
몇 마리 더 잡을 수도 있었겠지만.....그래도 공을 세웠으니 봐주기로 했다.
“됐어. 괴물은 어딨지?”
“아, 안내하겠습니다.”
“진입할수록 괴물들이 이상할 정도로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거 같습니다. 일단 말씀하신 대로 큰 놈을 발견 후 바로 후퇴했습니다.”
거미 괴물들의 영역 외곽에 앉아 쉬고 있는 죄수들과 그들을 감시하고 있는 죄수 관리자가 보였다.
죄수들을 지키고 있던 관리 간부가 나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대, 대장님 오신다. 이, 일어나!”
‘오랜만에 천수호 놈 낯짝이나 볼까.’
두꺼운 금속 목걸이를 차고 있는 죄수들이 간부의 윽박에 주춤주춤 일어서더니 일렬로 쭉 섰다.
그들을 대충 훑어봤다.
나와 눈을 마주치기 무섭게 시선을 돌리는 죄수 놈들.
그들과는 다르게 맨 끝에 서서 반항적인 시선을 보내는 거위.......아니 천수호가 보였다.
천수호는 꼬질꼬질한 모습이었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었다.
마석을 열심히 캐야 하는 그가 다치면 죄수사냥팀에 치명적이다.
설화를 봐서 살려둔 게 요즘은 굴러들어오는 마석 맛 좀 보다가 보니 조금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안 봐도 뻔하다.
죄수사냥팀이라고 만들긴 했지만, 천수호 혼자 거의 다 잡고 있을 거다.
그는 내게 매일 마석을 제공해주는 소중한 황금알 낳는 거위 그 자체다.
“박운호 이런 짓을 하고도….”
“무슨 이야기지?”
“인간을 무슨 소모품처럼 사용하다니...이게 용서받을 짓인가?”
“........”
이놈......설마 인권 타령하려는 건가?
이놈은 이 범죄자 놈들에게 감정이입이라도 하는 건가. 저놈들이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고 있나?
아니면 같이 사냥하고 있으니 동료애라도 싹튼 건가.
강간 살인은 밥 먹듯이 하던 놈들이다.
난 당연히 저런 놈들의 인권을 챙겨줄 생각이 없다.
“그럼 네가 더 열심히 하던가.”
솔직히 놈들이 이 정도로 많이 살아남은 이유도 천수호 덕이 클 거다.
천수호 놈이 인권이든 동료애든 품고 있는 게 부려 먹는 게 더 편할 거 같긴 했다.
천수호의 쓸데없는 개소리는 무시하고 관리자 간부에게 말했다.
“안내해.”
“예, 알겠습니다.”
관리 간부와 죄수들을 이끌고 그동안 사냥을 한 듯한 도시 안으로 진입했다.
종종 녹색 체액을 흘리며 죽은 거미 괴물들의 사체가 보였다.
죄수사냥팀이 잡은 놈들인 거 같았다.
예나 지금이나 역겨운 모습이었다.
“이, 이쯤입니다….”
전투의 흔적과 붉은 핏자국이 보였다.
하지만 죽었다던 죄수들의 모습은 없었다.
거미 괴물들이 가져간 건가….
안 보이면 부르면 된다.
“건드려봐.”
가까이 있던 죄수 한 놈에게 명령했다.
“예?”
어리둥절해하는 죄수 놈의 표정.
“말 못 알아들어? 던져줄까?”
“아, 아닙니다!”
긴장한 놈이 들고 있던 창으로 거미줄을 툭툭 건든다.
불쾌한 소리가 들렸다.
-달그락. 달그락.
-끼엑!!
얼마 안 가 거대한 거미 괴물이 나타났다. 혐오스러운 모습도 배가 돼 있었다.
“흡!”
그 괴물을 본 죄수와 관리 간부들이 숨을 삼켰다. 그들이 긴장으로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다행히 한 마리였다.
천수호랑 죄수들이 잡몹은 처리한 건가?
생각보다 쓸모가 있었다.
시간을 끌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인벤토리에서 보통 사람은 다룰 엄두가 나지 않을 법한 기다랗고 굵은 쇠 창을 꺼냈다.
그리고 그 창에 마력을 씌웠다.
검은 마력으로 감싸인 창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쭉쭉 자라났다.
거미 괴물에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내 의지였다.
-쿵!
내가 진각을 밟음과 동시에 놈의 머리를 향해 창이 쏘아졌다.
-뿌드득!
놈이 피할 새도 없이 거대하고 긴 검은 창이 머리를 관통했다.
거대 거미 괴물의 커다란 머리에 박혀있던 수많은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중급 침식체를 처리했습니다.>
<스킬포인트 1을 획득했습니다.>
기분이 좋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꿀꺽.
상당히 위협적으로 보이던 거대 거미 괴물이 너무 쉽게 죽자 죄수 놈들이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수호 놈은 뭔가 분한 표정이었다.
“마석이랑 이빨이나 다리 같은 단단한 부위는 죄수 놈들 시켜서 잘 챙겨놔.”
“예, 예!! 알겠습니다!”
몬스터 부산물은 쓸모가 있다.
천부문주 할배도 그랬고 캠프의 부관 임구성도 그렇게 말했다.
내가 챙겨야 했다면 당연히 그냥 버렸겠지만.
‘확실히 내가 하기 싫은 일도 부려 먹을 놈들이 있으니 편하군.’
죄수들이 관리 간부의 명령에 거대 거미 괴물에 달라붙어 부산물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천수호가 조금 반항적입니다….”
도현성이 내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그는 장서원이 캠프를 지배하던 시절부터 천수호를 알고 있었을 거다. 그리고 천수호의 능력도 상당하니 반항적이어도 함부로 하기 힘든 거 같았다.
“흠....놈이 말을 안 들으면 죄수 놈들 머리 터뜨려 버린다고 해. 본보기로 한두 놈 터뜨려도 좋고. 인권 타령하는 놈이니 그러면 말 좀 듣겠지.”
“네….”
도현성이 조금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
어찌 됐든 편하게 번 포인트의 맛은 달콤했다.
“수고했다.”
기분이 좋아 죄수 관리 간부 둘에게 시원한 맥주와 따뜻한 치킨을 선물해 줬다.
“이, 이건….”
구걸해본 그들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에게는 별거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도저히 맛볼 수 없는 물건.
특히 치킨의 향기는 치명적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봉투를 손에 꼭 쥐고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거대 거미에 달라붙어 있던 범죄자 놈들이 그걸 보고 침을 꼴깍꼴깍 삼킨다.
당연히 죄수 놈들에겐 사치다.
‘인원을 더 투입하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천부문과 생존자 캠프는 지금 거주지역정리로 바쁘다.
그곳이 정리돼야 본격적으로 투입할 수 있을 거다.
‘이제 6포인트 남았군.’
이 죄수 놈들이 매일 중급 침식체를 찾지는 못할 테니 최소 보름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더 빠르게 올리고 싶으면 주변을 둘러보는 수밖에 없다.
대전에 있던 멧돼지 놈을 찾아볼까.
하지만 고민이 됐다.
놈을 잡을 자신이 없는 건 아니다.
당연히 원래 세계의 그 멍청한 검은 용과같이 쉽게 가지는 않을 거라는 건 당연히 예상할 수 있다.
흑랑 놈을 보더라도 그놈보다 못할 거라는 생각도 안 들었다.
건드리면 반드시 잡아야 한다.
놓치는 것은 안 된다.
만약에 흑랑만큼의 지능을 가지고 있고 놓치기라도 한다면 그땐 골치 아프다.
그래도 일단 정찰 정도면....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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