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아저씨의 로그인 생활-122화 (122/259)

*

*

*

어두운 밀실.

금속으로 만든 깔끔한 원형 테이블.

그 주위를 둘러싼 4개의 의자.

그리고 그 의자 위에는 2남 2녀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온갖 찬사를 받는 사람들이다.

S급 히어로.

전 세계에 5명...아니, 박운호가 나타남으로 6명이 된 S급 각성자 중 4명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자세히 보면 뭔가 어색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짜라기에는 그 인물들의 모습은 유령처럼 흐릿했다.

그들은 진짜가 아닌 홀로그램이었다.

대마법사 멀린.

눈의 여왕 엘라.

오라클.

무신 왕천.

그들은 바쁘다.

하지만 중요한 용건이 있을 때는 이렇게라도 모였다.

『그에 대한 조사는?』

전형적인 영국의 중년 신사로 보이는 멀린이 물었다.

『깨끗해요.』

갈색 피부와 하얀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소녀 오라클이 대답했다.

『허....그놈이 깨끗하다고? 깨끗한 놈이 일 년도 안 돼서 그런 힘을 갖췄다고?』

중국 무협영화에나 나올법한 무복을 입은 젊은 남자.

왕천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요. 우리 중 그 누구보다 인간관계도 좁고 가장 깨끗하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엘라 님 같은 예도 있으니 이레귤러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죠. 』

『........』

긴 백금발의 미녀 엘라는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기만 할 뿐이었다.

『그를 초대하는데 반대하는 사람 있나?』

멀린이 주위를 보며 묻는다.

『...........』

『그러면 찬성하는 거로 알겠다. 초대장을 보내지.』

멀린의 그 소리를 듣고 엘라의 홀로그램이 빠르게 꺼졌다.

『흥! 소국에서 그런 인물이 튀어나오다니 운도 좋군.』

『그 말 그의 앞에서는 하지 않길 바랄게요.』

투덜거리는 왕천에게 오라클이 경고했다.

하나둘씩 홀로그램이 꺼지며 밀실은 어둠 속에 휩싸였다.

*

*

*

김경숙은 결국 운호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의 일상은 전과 변하지 않았다.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그를 추궁하지는 않았다.

변하는 건 없었다.

그냥 그렇게 지낼 뿐이었다.

남편은 언제나처럼 아니 예전보다 더 잘해주고 있었다.

김경숙은 그게 남편의 죄책감에서 나오는 행동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모르는척했다.

솔직히 남편에게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박운호 때문이었다.

죄책감이 사라지자 그에 관한 생각은 끊이지 않았다.

‘이제 와서 연락한다는 게….’

하루에도 수십 번을 고민했다.

그러다 오래간만에 유나가 안부 인사차 놀러 왔다.

김경숙은 박운호가 생각이나 유나의 눈을 제대로 마주칠 수가 없었다.

“자, 잘 지내니?”

“네, 잘 지내요.”

김경숙은 유나에게 더는 들어와서 살라고 말은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딸의 얼굴이 이곳에서 지낼 때보다 밝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제주도 갔다면서….”

“네, 전 헌터도 아니고.....아카데미도 있어서요.”

“심심하진 않니?”

“아니에요. 앨리가 자주 놀러 오기도 하고….”

앨리스는 자주가 아니라 매일 놀러 오고 자고 가는 날도 많았다.

박운호의 방에서 그의 이불을 뒤집어쓰고 냄새를 맡는 앨리스는 유나도 흠칫할 정도였다.

유나와 도란도란 밥을 먹던 김경숙은 갑자기 속이 안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우욱!

“어, 어머니?”

“미, 미안 속이 안 좋아서.”

김경숙은 급히 화장실로 향했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어? 어....괘,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 그냥 속이 안 좋았을 뿐이야.”

하지만 김경숙은 본능적으로 속이 안 좋은 것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다.

콘돔은커녕, 거리낌 없이 질내사정하던 박운호.

그와 관계하는 동안은 당연히 피임약을 먹었다.

‘서, 설마....야, 약은 꾸준히 먹었었는데....새, 생리가….’

요즘 남편의 불륜과 박운호 때문에 정신을 놓고 있는 일이 많아서 신경 쓰지 못했지만, 생리하지 않은 지 꽤 시간이 지났다는 걸 깨달았다.

걱정하는 유나를 달래 보내고 김경숙은 약국에서 임신테스트기를 샀다.

‘두, 두 줄….’

설마설마하던 생각이 현실이 됐다.

김경숙은 멍하니 임신테스트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꿀꺽.

‘이, 임신….’

남편과는 관계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박운호의 아이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아이를 지워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어, 어떻게 해야….’

큰일 났다는 생각보다….

‘아, 아이의 아빠니까....아, 알려줄 필요가….’

김경숙은 무심코 거울을 봤다.

그리고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들뜬 얼굴을 보고 흠칫했다.

‘내, 내가 왜….’

사실은 알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부인할 뿐이었다.

그와 만날 수 있는 구실이 생겼다는 사실에 마음 깊은 곳 기뻐하는 자신을.

‘여, 연락을….’

하지만 막상 연락하려니 망설여지는 건 여전했다.

연락할까 말까 다시 수십 번을 고민한다.

‘그, 그도 알아야….’

갈등 끝에 결국 손을 덜덜 떨면서 그의 번호를 눌렀다.

*

*

*

「........」

전화에서는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그녀가 우물쭈물한다는 게 여기까지 느껴졌다.

김경숙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헤어지자고 해놓고 먼저 전화했으니 민망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녀 성격으로 전화를 걸 것만으로도 상당한 용기였다.

남자로서 이때는 한 걸음 다가가 줘야 했다.

“알지? 거기서 만나지.”

“네….”

추억? 의 장소다. 그녀가 벌써 잊어버리진 않았을 거다.

본의 아니게 단골이 된 호텔에서도 이제는 그곳은 비워둔다.

나는 제주도에 있으니 당연히 보통이라면 만날 수 없는 거리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마력 소모가 좀 크기는 하겠지만,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니고.

길어야 10분 정도면 충분했다.

나를 원하는 여자를 위해 서라면 제주도에서 서울까지 아니, 지구 반대편이라도 달려가야 하는 게 남자다.

-쿵.

쓸데없는 결의에 찬 발을 구르자 순식간에 몸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 뒤쪽으로 생성되는 검은색 마력의 원.

-펑!

그 헤일로에서 발생한 추진력과 함께 서울을 향해 돌진했다.

처음처럼 요란하지 않게 투명화를 하고 속도는 그때의 절반 정도로 이동했다.

이 세계에는 세이브 포인트를 설치할 수가 없다.

그게 조금 아쉽기는 했다.

한국의 상공을 가로질러 순식간에 서울에 도착했다. 사람이 없는 곳에 조용히 착지한 후 투명화를 풀었다.

그리고 단골 호텔로 향했다.

로비에 들어서자 날 본 호텔직원들이 놀란다.

난 이제 유명인이다.

내가 제주도에 있다는 건 다 알고 있을 거다.

뜬금없이 이곳에 나타났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나는 여자를 숨어서 만나지 않았다.

스캔들이 날법하지만, 당연히 나지 않는다.

이미 정부와 언론사 놈들에게 내 여자관계에 관해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게 하라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었다.

본의 아니게 언론 통제를 하고 있었다.

나야 스캔들이 나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내 여자들은 다르다.

그저 입소문이 나는 것과 인터넷과 뉴스에 오르내리는 건 차원이 다르다.

그녀들이 원한다면 모르겠지만,

원하지 않는다면 언론이나 미디어에 노출할 생각이 없었다.

*

*

*

내 예상과 달리 호텔 방으로 들어온 김경숙의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영 섹스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간만에 회포를 풀 생각에 빳빳하게 섰던 고추가 꼬무룩해진다.

어색한 침묵 후 결국 내가 입을 열었다.

“나.........갈까?”

“흐윽….”

내 그 말에 김경숙이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뜬금없이 울기 시작하니 나도 얼떨떨했다.

그리고 훌쩍이는 그녀의 입에서는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저........임신했어요.”

“.........”

놀랐다.

놀라울 정도로 별 느낌이 들지 않아서........놀랐다.

정말 아무 느낌이 없어서….

내 아이가 생겼다는 기쁜 마음도.

좆됐다는 마음도 없었다.

보통 인간과 사뭇 다른 것 같은 내 감정은 고찰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냥 별일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아니면 보통 텔레비전 같은 대중 매체에서 접한 남자들의 반응은 구라였던 건가?

‘내가 이상한 건가?’

이런 상황은 처음이니 어떤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신기한 기분이 들긴 했다.

하지만 그 핀트가 조금 달랐다.

내 육체는 스킬로 강화하면서 이미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변했다.

열심히 여자들에게 싸지르고 있긴 했지만, 과연 임신이 될까 하는 의문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김경숙이 그걸 해냈다.

별로 신경 쓰진 않았지만, 그녀가 아직 각성하지 않은 것과도 관련이 있나?

아니면 다른 여자들도 임신했지만, 아직 모르는 건가.

그래도 걱정은 되지 않았다.

당연하다.

무각성자 시절이면 모르겠지만 난 이제 능력 있는 남자다.

그녀가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지원은 부족함 없이 해줄 수가 있었다.

“어떻게 하고 싶은데.”

“그, 그건….”

“지우고 싶어?”

“아, 아니에요!!”

의외로 격렬하게 부정했다.

이게 모성 본능인가?

혹시나 지우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물어봤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설사 지우고 싶다고 해도 그녀의 의견을 존중할 생각이었다.

내가 지금 임신에 대한 큰 감흥이 없어서 이런 생각을 쉽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진짜 모르겠군.

그녀가 아이를 낳으면 또 달라지려나?

“그럼 뭐가 걱정이지?”

“예?”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러면서 김경숙을 끌어안았다.

“우, 운호 씨….”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