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원 쪽이 마무리됐으니 설화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녀의 전투도 이미 끝이나 있었다.
천수호가 백설화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게 보였다.
질투에 미쳐 주화입마라도 당했는지, 그의 입가에는 피를 토한 흔적이 있었다.
설화는 무난하게 천수호를 제압한 거 같았다.
예상한 결과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씁쓸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사형.....낭군님께 용서를 비시지요….”
“그놈에게 용서를 빌라고? 사매 왜 내 마음을 몰라 주는 거냐….”
내게 용서를 빌라고 설득하는 백설화와 그걸 거절하는 천수호.
백설화는 한때 동문이었던 사형을 차마 단호하게 베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형제 사이었으니.
그녀의 마음도 이해는 했다.
천수호 저놈은 설화의 그런 마음도 모르는 듯 헛소리만 늘어놓고….
장서원을 처리한 내 시선을 느낀 걸까.
설화는 마음을 굳힌 듯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형 정녕….”
“베어라. 내가 박운호 그놈에게 용서를 비는 일은 없을 거다.”
천수호는 개쪽 같은 절개를 보여줬다.
설화는 결국 입술을 깨물고 천수호의 목을 향해 검을 베어갔다.
-텁.
“나...낭군님!?”
천수호를 베어가던 검을 잡은 나를 보고 설화가 놀라 소리쳤다.
그녀가 천수호를 베고 후회할지 안 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겨우 천수호 따위에게 그녀가 후회할지도 모를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놈의 처분은 나중에 하지.”
“나, 낭군님….”
설화의 눈빛이 촉촉한 게 내게 감동한 모습이었다.
역시 천수호의 죽음을 막은 건 잘한 짓인 거 같기도 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천수호는 죽이더라도 내가 몰래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뭐......개똥도 약에 쓴다고 천수호는 나름대로 쓸모가 있을 것도 같았다.
“큭! 네 이놈.....어디까지 날 비참하게 해야….”
-퍽!
발로 천수호의 아구통을 날려 조용히 시켜두고 설화와의 좋은 분위기를 만끽했다.
*
*
*
천수호 놈은 일단 생존자 캠프의 감옥에 가둬놨다.
특별히 능력을 봉인한 것도 아니고 탈출할 수도 있겠지만.
왠지 놈이 탈출할 거 같은 느낌도 들지 않았고, 탈출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탈출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낭군님. 사형을 살려주신 자비로움에 감사드립니다.”
설화는 천수호를 살려준 내게 어지간히 감명받은 모습이었다.
원래는 적당히 대충 정리하고 갈 생각이었는데….
나는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설화와 캠프에 있던 임구성이라는 놈이 나를 붙잡았다.
삼십 대 정도의 나이에 짧은 머리를 한 남자였다.
안면이 있기는 했다.
장서원이 학교 쪽에 왔을 때 봤던 얼굴이었다.
각성자는 아니었지만, 이제는 없는 장서원의 부관짓을 하던 놈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운호 님이 떠난다면 캠프는 커다란 혼돈에 휩싸일 겁니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낭군님이 그냥 떠난다면 죄 없는 사람들이 크나큰 고통에 빠질 겁니다.”
둘의 말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그들을 떠난다면 리더를 잃은 캠프는 새로운 리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각성자들의 각축이 벌어질 거다.
보니까 각성자들의 능력이 고만고만했다.
D등급은 꽤 있었지만, 그 위의 등급은 죽은 장서원이 유일했으니 개판이 날 게 뻔했다.
공짜로 한 집단을 리스크 없이 꿀꺽 먹을 수 있다는 건 괜찮지만.
좀 귀찮은 기분도 들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였지만, 나는 리더의 자질이 없었다.
리더보다는 독재자에 가깝지 않을까.
독재자도 리더라고 할 수가 있나.
내 편한 사냥을 위해서는 괜찮을 거 같으면서도 캠프의 인간들을 관리해야 한다는 게 피곤할 거 같기도 했다.
‘괜한 일을 벌이는 거 같은데….’
고민이 됐다.
“일단 캠프 간부들 소집해봐.”
나는 임구성에게 결국 명령을 할 수밖에 없었다.
*
*
*
기다란 테이블에 어색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주르륵 앉아있는 캠프의 간부들.
나는 그 상석에 느긋하게 턱을 괴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임구성과 설화는 내 옆을 보좌하듯 서 있었다.
결국 설화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리고 이 건에 대해서는 편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다 하다 못 해 먹겠으면 때려치울 생각이었다.
“이 캠프는 이제 내가 관리한다. 반대하는 사람?”
솔직히 너무 많이 반대한다면 포기할 생각이었다.
아니면 반대하는 놈들을 다 쳐 죽이는 피의 숙청을 하거나, 어르고 달래던가 해야 할 텐데 내 성격에 맞지 않았다.
보여준 게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들은 조용히 내 눈치를 볼 뿐이었다.
“떠날 사람은 떠나도 괜찮으니 알아서 떠나도록.”
각성자가 귀한 인재이기는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다지 큰 장점이 없었다.
쓸데없는 분탕 종자가 사라지는 게 더 중요했다.
지금이야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에 어리바리 잘 모르겠지만, 난 캠프 인간들의 여론이 돌아서는 데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
풍부한 전기와 식량 공급만 해 줘도 캠프 인간들의 지지를 얻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물론 내가 하염없이 제공해줄 수는 없고.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다.
전기야 캠프 놈들 굴려서 마련하면 되고.
결국 문제는 식량이다.
전기 따위보다 이게 더 피곤했다.
학교에 있을 때 몇 명을 먹여 살리는 것과 몇백 명을 먹여 살리는 건 비교가 안 된다.
식량은 결국 자급자족을 할 수 있게. 농사 같은 거라도 해야 할 거다.
내가 피곤하지 않으려면 필요한 일이다.
“조인광이라고 합니다. 집현대학교 생명공학과 교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인상에 무테안경을 쓴 중년의 남자가 말했다.
“.........?”
뜬금없는 학벌 자랑에 시선이 갔다.
“여, 연구지원을 해주신다면 캠프에 전력 증강이 될만한 물건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연구지원?”
“장서원이 사용한 주사기에 든 액체를 기억하시는지요.”
“그걸 네가 만든 건가?”
“네!! 제가 만들었습니다. 장서원은 부작용 때문에 그렇게 됐지만 좀 더 지원해주신다면 일반인도 초능력자로 만들 수 있는 신약을 만드는 것이 가능합니다.”
내가 관심을 보이자 자신의 성과를 인정받으려는 듯 자랑스럽게 말하는 조인광이었다.
일반인을 초능력자로 만든다는 그 말에 캠프 간부들이 술렁였다.
확실히 놀라운 일이다.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만 나는 별로 감흥이 없기도 했다.
그건 나도 가능한데.....라고 말할 수는 없었고.
물론 내 능력은 여자 한정이었다.
남자는.....갑자기 속이 안 좋아지면서 쌍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는 것은 확실히 놀랄만한 성과였다.
원래 세계에서도 아직 불가능한 일을 저 대학교수였다는 인간이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단다.
“그래, 지원이라고 하면?”
“푸른 돌과.....그….”
푸른 돌이라면 마석을 말하는 걸 거다.
그리고 이어지는 뒷말을 조인광이 내 눈치를 보면 말하기를 주저했다.
옆에 있던 설화가 뭔가를 눈치챈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이, 이놈!!! 설마 인체 실험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설화가 크게 화를 냈다.
“아, 아이고...무, 물론 무고한 사람을 실험하진 않았습니다. 범죄자만을 지원해주셔도 충분….”
“어허! 이놈! 그런 실험을 하면서 반성하는 기색조차 없구나! 낭군님! 당장 저놈을 징치해야 합니다!!”
설화야 격분했지만 나야 그가 인간실험을 했든 뭘 했든 별생각은 없었다.
원래 세계에서도 있었던 일이고,
지금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세계는 위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 멸종할지 모를 위험한 상태입니다! 이 연구가 성공한다면, 인류는 생존은 물론 한 단계 진화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조인광이 열변을 토했다.
그의 말이 마냥 틀린 말도 아니다.
거미 괴물의 도시나 거대 멧돼지나 흑랑 놈을 봐도 인간이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라는 건 나도 절절하게 느끼고 있다.
저놈이 하는 짓이 이 좀비 세계 인류의 생존에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진정한 리더라면.
그리고 냉정하게 인류를 위해서라면.
조인광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대의를 위해서 그의 연구지원을 하는 것이 바른 선택이다.
“나, 낭군님. 이, 이건....인륜을 저버린 일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설화는 내가 조인광의 말에 넘어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거 같았다.
그녀는 설마 하는 불안한 표정으로 내게 하소연했다.
“제게 지원해주신다면 기필코 인류를 위한 신약 아니 희망을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내게 자신의 설득이 통한다고 생각한 건지 조인광의 얼굴이 밝아졌다.
-퍼억!
놈의 머리에 마력창이 꽂혔다.
-허헙!!
그걸 본 캠프 간부들이 숨을 들이켰다.
그가 높은 지식을 가진 인재라는 건 알겠다.
죽은 조인광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인간을 만났다면 더 중히 쓰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거창한 대의나 인류애를 가진 리더가 아니었다.
그리고....아직 이곳 세상이 변한 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인체 실험이란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저놈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내버려 뒀다가는 한참 선을 넘고도 남을 놈이었다.
결정적으로 무엇보다 설화의 호감도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난 인류보다 설화를 선택했다.
그리고 나는 원래 세계를 오고 갈 수 있다.
굳이 저런 매드 사이언티스트같은 놈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조인광이 만들 수 있다고 한 평범한 사람을 초능력자로 만드는 약은 원래 세계로 가져간다면 돈 좀 벌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원래 세계의 나는 이미 그런 장사를 할 만큼 아쉬운 상황도 아니었다.
‘뭐....본의 아니게 일반인들이 각성자가 될 수도 있는 희망의 사다리를 걷어찬 격이 된 거 같기도 한데….’
그래도 놈이 한 연구자료를 원래 세계로 가져간다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아니면 수니한테 보여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