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임 길드 쪽에서 계속 연락이 와요. 아니, 플레임 길드라기보다 염제 곽상현 님 쪽이 맞겠죠.”
한나가 회사에 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곽상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전에도 염제 곽상현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후로도 꾸준히 회사 쪽에 나를 만나고 싶다고 압박을 가한 모양이었다.
나 때문에 노골적으로 압박을 주진 못하겠지만, 한나도 A급 각성자인 그를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으니 그의 압박이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것 같았다.
‘귀찮은데….’
“조금 더 두고 보지.”
별일 아니면 잠잠해지겠고 아니라면 어떻게든 반응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좀 더 시간을 끌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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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에 깔끔하게 세팅된 음식.
그 테이블을 둘러싸고 4명의 사내가 앉아있었다.
단 4명뿐이었지만 그 분위기는 범상치 않았다.
박운호가 나타나기 전부터 한국 각성자들의 정점에 있던 A급 히어로 4명의 모임이었다.
세간에서는 우스갯소리로 한국의 사천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국의 A급 각성자 네 명은 사이가 나쁘지 않아 정기적으로 모임을 하고 있었다.
그중 한 사내의 머리카락 색은 특이하게 진한 붉은 색이었다.
한국 화염계 각성자의 정점이라는 염제 곽상현이었다.
“너무 콧대가 높은 거 아닙니까?”
궁신으로 불리는 나주완이 툴툴거렸다.
깔끔한 올백 머리를 한 그는 실제 나이보다 젊은 2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이 모임은 대통령조차 낄 수 없는 회합이다.
박운호에게 그런 모임의 초대장을 보냈지만, 결국 그는 오지 않았다.
나주완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콧대가 높을 만하다. 영상 못 봤나? 나는 그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감도 잡지 못하겠더군.”
“우리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거겠지.”
근육질의 스포츠머리를 한 투신 남권철.
꽁지머리에 하얀 무복을 입은 검왕 지오경.
둘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가 빌런이 아닌 것만으로도 감사해라. 재수 없었으면 우리 모두 다른 나라로 망명해야 할 수도 있었다.”
염제 곽상현이 말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4명은 갑자기 뚝 떨어진 듯 나타난 박운호의 존재에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루아침에 한국이란 나라에서 자신들의 머리 위에 누군가 나타났으니 대중들과는 다르게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그들에게 당연히 대통령이란 존재는 안중에 없었다.
가진바 힘이 너무 커 통제가 되지 않는 S급은 그 자체로 재앙이다.
S급 각성자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들은 그저 히어로라는 허울로 치켜세우며 잘 덮어두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차원 균열이나 괴물이 튀어나오는 세상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처리해야만 하는 계륵 같은 존재다.
가족이 있는 경우는 그나마 낫다.
사람과의 인연이 흐릿한 인간일수록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남미가 S급 각성자 하나에 통째로 넘어갔음에도 각국이 손도 못 대는 건 이유가 있었다.
괜히 손댄답시고 찍혀서 만약에 자기 나라로 넘어와 깽판을 친다면?
그들은 무식한 괴물이 아니라 지능이 있는 존재다.
괜히 각국의 정부가 S급 각성자에 설설 기는 게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박운호가 여자를 밝힌다는 것과 애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몇 있다는 거다.
“제주도는 어때?”
“바로 다시 공략을 재개하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다더군.”
“역시 그런가….”
“그에게 부탁해봤나?”
“만나보지도 못했어.”
“크크. 천하의 염제가 바람맞다니….”
“쩝.”
여기 모여있는 이들이 함께 제주도 공략에 나서준다면야 여론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겠지만 이들은 그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염제도 그걸 알기에 그들에게 부탁하지 않았다.
결국 한가해 보이는 박운호를 설득하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우리에 대한 정부의 대우도 시원찮아지겠군.”
4명에게 꼬리를 흔드는 거보다 한 명에게 흔드는 게 편하고 좋으니 당연히 예상할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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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에게서 연락이 왔다.
유명인이 되고 한나가 연락하는 일이 잦아졌다.
「염제 곽상현 님이 찾아왔어요. 운호 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오실 때까지 기다리신다고 해요. A급 각성자다 보니 마냥 무시하기도 뭐하고….」
한나가 쭈글쭈글 우물거린다.
그녀는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만나봤으면 하는 듯했다.
전에 우리나라 A급 각성자 4명이 만든 모임 같은 곳에서 초대장 같은 게 왔다고 했는데 무시하고 가지 않았다.
결국 내가 안 만나 주니 본인이 직접 등판한 거 같았다.
집으로 찾아오지 않은 건 칭찬해줄 만했다.
내 성향을 어느 정도 조사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동안 집으로 찾아와 쓸데없이 벨을 누르는 몇 놈, 수고를 들여 두들겨 팬 보람이 있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4명 밖 없는 A급 각성자다.
그 자존심에 저렇게 대책 없이 기다린다고 할 줄은 몰랐다.
‘도대체 왜 저러는지 이유를 모르겠군.’
단순히 내가 S급이라는 이유나 자기가 싼 똥을 치운 거에 대한 고마움만은 아닌 거 같았다.
나야 그가 찾아오든 말든 별로 신경을 쓰진 않았지만.
한나는 다르다.
결국 곽상현의 체면이 아니라 한나 얼굴을 봐서라도 움직여야 할 거 같았다.
시커먼 사내놈 얼굴 봐서 뭐 하나 싶기도 했지만….
지금 만나지 않는다고 해도 직접 찾아온 거로 보면 계속 저 지랄을 할 거 같았다.
「차를 보낼게요.」
직접 차를 몰고 갈 수도 있었지만, 요즘 남이 운전해주는 차의 편안함에 맛을 들였다.
차를 운전할 시간에 다른 즐거움을 찾는 게 더 낫다는 걸 깨달아 버렸다.
폰 게임을 한다던가 못 본 영화를 본다던가….
‘겸사겸사 진아와 드라이브도 좀 하고.’
언제나처럼 진아가 찾아오고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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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의 접객실에 실물로 처음 보는 붉은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사내가 앉아있었다.
염제 곽상현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본 적은 있지만.’
“곽상현이라고 하네.”
“박운호다.”
그저 얼굴 보자고 이렇게 대책 없이 기다리지는 않았을 거다.
“제주도 공략 참가를 부탁하고 싶어서 찾아왔네.”
곽상현은 바로 본론으로 말했다.
무슨 말 할까 싶어 오긴 했지만 그래도 제주도 공략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건가?’
“.......내가 왜?”
“자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네. 제주도의 정리는 우리 길드가 할 테니, 그저 제주항에서 편하게 쉬다 공략이 끝나고 복귀하면 된다네.”
대충 감이 잡혔다….
여론이 좋지 않으니 나를 이용할 셈인 거 같았다.
제주도에 왜 저렇게 집착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도 굳이 그의 알 수 없는 애틋한 사정을 물고 보고 싶진 않았다.
“대가는 확실히 챙겨주겠네.”
나는 내 이름을 빌려주고 놀기만 해도 돈이 굴러들어온다.
나쁘진 않았다.
한편으로는 제주도까지 가야 하는 게 귀찮기도 했다.
“A급 괴물이 더 없다고 장담할 수 있나?”
“........90퍼센트는 정찰을 마쳤네. 조사해 본 바로는 B등급 이상의 괴물은 없었네.”
나야 있던 없던 상관은 없었다.
그냥 가기 싫은 귀찮음에 꼬투리 한번 잡아봤을 뿐이다.
내가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으니….
“참가만 해준다면 이 은혜는 잊지 않겠네.”
곽상현이 고개를 숙인다.
그저 빈말이 아니라 내게 빚을 진다는 걸 의미하는 걸 거다.
나이 든 아저씨가 고개를 숙인다고 해서 내가 큰 감흥이 있을 리는 없었고….
그의 진한 빨간 머리를 보다 보니 괜찮은 생각이 났다.
“요구 조건이 있어.”
“뭔가?”
내게 긍정적인 대답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자 곽상현의 안색이 폈다.
지금은 나도 구하려면 구할 수 있겠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정부에는 아쉬운 소리를 하기가 싫었다. 그들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제주도 공략이라는 상황과 곽상현 정도의 힘이 있다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요구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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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상현의 부탁에 결국 나는 제주도로 향하는 배를 타고 말았다.
“아저씨랑 제주도에 갈 줄은 몰랐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재은이의 표정은 즐거워 보였다.
재은이뿐만 아니라 진아도 함께 제주도로 향하고 있었다.
나도 내가 제주도에 갈 줄은 몰랐다.
내가 제주도 공략에 참여한다고 하자 순식간에 여론이 뒤집혔고 염제 곽상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제주도 공략을 재개할 수 있었다.
앨리스가 굉장히 같이 가고 싶어 했지만 떼어 놓고 왔다.
그녀는 그 터무니없는 음탕함에 힘입어 빠르게 각성했다.
자연계인지 다른 특수능력인지 모르겠지만, 마력의 패턴을 보면 마력 발현계열 쪽인 거 같았다.
하지만 앨리스에게 각성했다고 알려주지는 않았다.
들어보면 꽤 험한 곳이기도 했고, 말해줬으면 자기도 각성자라고 분명히 달라붙어 따라오려고 했을 거다.
멀리 일렁이는 제주항의 풍경이 보였다.
수많은 차원 균열에 의한 공간 왜곡 현상이다.
배가 그 속으로 파고들어 부두 가까이 다가가자 제주항의 제대로 된 풍경이 나타났다.
수많은 컨테이너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많은 사람이 보였다.
돈을 많이 줘서 그런지 사람들의 얼굴은 생각보다 많이 밝고 활기찬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