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김경숙과 좋은 힐링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재은이가 돌아와 있었다.
의외였던 건 김진아도 함께라는 거였다.
“바람둥이 아저씨 왔어?”
재은이는 내가 여자를 만나고 온 걸 눈치챈 거 같았다.
내가 외출하는 일 대부분이 거의 그쪽이었으니 모르는 게 이상했다.
물론 내가 만나는 여자가 유나의 엄마라는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오셨습니까.”
언제나처럼 단정한 정장을 입고 소파에 앉아 있던 김진아가 정중하게 일어서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할 일이 없으면 칼같이 돌아가는 그녀가 내가 올 때까지 굳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건,
내게 볼일이 있다는 거였다.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예.”
“무슨 일?”
“좋은 조건의 일이 있어 기다렸습니다.”
“조건이 좋은 일?”
“네. 제주도 공략에 대한 일입니다.”
“제주도?”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였다.
제주도는 정부에서 포기한 균열 지대다.
처음 균열과 게이트가 터졌을 때 본토도 힘든데 바다 건너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제주도는 몬스터의 땅이 됐다.
지금은 수복하고 싶어도 장점도 없고.
수복한다고 해도 지원하는 각성자가 없을 테니 방치상태였다.
“염제 곽상현이 제주도 공략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공략에 나설 각성자와 서포터 용병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하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 쪽으로도 협조 요청이 왔습니다.”
염제 곽상현은 플레임 길드 마스터이자 우리나라에 4명밖에 없는 A등급 각성자 중 한 명이다.
네임드 히어로였다.
A급쯤 되면 워낙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다.
그래서 히어로 일을 하지 않아도 헌터보다는 히어로라고 불린다.
플레임 길드가 우리나라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대형길드지만 단독으로 제주도를 정리할 수는 없다.
그러니 용병을 모집하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그래? 정부에서 좋아하겠네. 그게 좋은 조건?”
정부 쪽에서도 실속은 없지만, 국민적 지지는 받을 거다.
“네. 조건이 상당히 좋습니다.”
“얼마나?”
“기본급과 수당 업계 평균 3배, 이번 공략에서 얻는 소득의 면세.”
“면세까지....마음 제대로 먹었군.”
다르게 말하면 그 정도 조건이 아니면 각성자들을 꾀기 힘들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것 때문에 헌터 업계가 난리입니다.”
면세야 정부와 어느 정도 합의는 됐겠지만, 용병을 쓰는 건 오롯이 길드다.
그 운용비용이 장난이 아닐 거다.
“플레임 길드 기둥 뽑히는 거 아냐?”
“그럴 생각으로 하는 거 같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왜? 뭘 먹을 게 있다고?”
정부라고 왜 제주도를 공략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차원 균열 지대를 오래 방치하면 알 수 없는 공간 왜곡 현상이 일어난다.
한마디로 직접 그 안을 들어가서 보기 전까지 밖에서는 들여다볼 수 없다는 거다.
처리하지 않은 차원 균열로 꽉꽉 들어차 어떤 상태인지 알 수도 없는 제주도.
그에 비해 가기 쉽고 넓디넓은 인천 송도 게이트.
당연히 바다 건너 위험한 균열 지대보다,
거기 쏟을 힘이면 환경도 좋고 훨씬 땅도 넓은 게이트 안에 캠프 하나라도 더 세우는 게 이득이었다.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대외적으로는 염제의 고향이 제주도입니다. 그리고 정부에서도 상당 부분 소유권을 인정해 준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어디까지나 염제가 직접 입을 열지 않으면 뜬소문일 뿐 입니다.”
그래도 영 이해가 가지 않는다.
향수병이라도 걸렸나.
뭐.....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흠….”
조건이 좋긴 하지만 끌리진 않았다.
“조건이 상당히 좋으니 일단 말씀드려 보는 겁니다.”
“난, 패스.”
“알겠습니다.”
“아저씨 안 갈 거야? 난 갈 건데….”
재은이 생각지도 못한 소리를 했다.
“간다고?”
“응.”
내 의문에 재은이는 소풍이라도 가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요즘 진아랑 열심히 게이트를 들락날락하는 거 같고.
‘돈이 필요한 곳이라도 있나?’
돈에 관련된 일이라면 도와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이야기는 내가 먼저 꺼내는 건 아니었다.
정말 급하면 그녀가 먼저 내게 이야기할 거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 처지에서나 매리트가 없지, 헌터 입장에서는 한몫 단단히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저도 함께 갈 겁니다.”
김진아와 재은이는 의외로 죽이 잘 맞는지도 모른다.
“위험할 텐데….”
하지만 돈은 많이 벌지 몰라도 농담이 아니라 진짜 위험하다.
바다로 고립된 지역이고,
거의 15년 가까이 차원 균열이 숙성이 된 곳이다.
그 안에 차원 균열이 얼마나 많은 몬스터를 뱉어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일단 들어가면 바깥으로 통신도 잘 안될 거다.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전에 발생한 B등급 차원 균열이 생성돼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염제가 있다고 해도 감당이 안 될 수도 있다.
“아저씨, 나 걱정해주는 거야?”
“뭐..그렇지….”
걱정하는 게 당연했다.
그동안 살을 맞댄 횟수만 치더라도 없던 정도 생기겠다.
재은이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게 기쁜지 내 무릎 위에 올라와 볼에 뽀뽀했다.
진아가 보고 있는데도 거침이 없었다.
나도 무의식적으로 평소의 습관대로 재은이의 엉덩이에 손이 올라갔다.
그리고 김진아가 있다는 생각에 아차 했다.
김진아는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는 있지만, 우리가 자기 앞에서 이러고 있으니 민망하긴 할 거다.
“.....말릴 거야?”
재은이의 선택이다. 말려야 할까.
걱정은 된다.
그 때문에 순간 같이 갈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아빠도 아니고 걱정된다고 일일이 따라다닐 수도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지금 재은이가 하는 헌터 활동도 말려야 했다.
“흠....가고 싶다면 가야지.”
“허락해주는 거야?”
“허락하고 말고 할 건 없지만….”
“없지만?”
“제일 마지막으로 최대한 늦게 들어가.”
“마지막?”
“그래. 진행 상황 보고 가야지. 그 안쪽 상황도 모르는데.”
모르긴 몰라도 거대길드 하나가 사활을 걸고 공략하니 어마어마한 인력이 투입될 거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김진아는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던 거 같았으니 다행이었다.
그녀가 붙어있으면 재은이도 무리는 하지 않을 거 같았다.
좀 적게 벌어도 안전한 게 최고였다.
*
*
*
원래 세계에서 적당한 힐링 타임을 좀 가지고 좀비 세계로 다시 진입했다.
청주 쪽에 이미 세이브 포인트를 설치했으니 굳이 피곤한 그쪽으로 진입할 이유가 없었다.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눈앞에 한복을 입고 댕기 머리를 한 미녀가 보였다.
백설화였다.
그녀는 나를 보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군.’
청주 쪽에서 시간을 보내고 복귀해서 그런가?
뭐 옥상에 통행금지를 시켜놓은 것도 아니고, 언젠가 이런 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나, 낭군님!?”
설화는 못 볼 걸 본 듯 놀라 소리쳤다.
내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으니 놀랄 만했다.
그녀의 반듯한 이마에 맺힌 송골송골한 땀과 한 손에 들고 있는 검.
설화는 옥상에서 검을 수련하고 있던 듯했다.
“이, 이건......축지법!! 역시 낭군님은…!”
설화의 말을 들어보면 갑자기 허공에 나타나는 느낌인 건가?
엄밀히 순간이동은 아닌 거 같지만.
아니,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순간이동인 듯 아닌 듯한 느낌이었다.
신기한 장면을 본 걸 이해는 하겠지만.
설화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고 있었다.
*
*
*
“오, 오빠!!”
“운호 아재!”
휴게실로 들어가자 지아가 나를 격하게 끌어안았다.
한수진도 만만치 않게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내가 청주로 떠난 것이 이곳 시간으로만 따지면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이들의 반응이 이상하게 극적이었다.
채원이와 꼬맹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애들은? 벌써 자는 건가?”
시간상으로 보면 그렇게 늦은 저녁은 아닐 거다.
“그, 그게.”
내 말에 그녀들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채원 씨와 아이들은 천부문에 있습니다.”
“거긴 왜 갔는데?”
내 질문에 이어지는 설화의 이야기에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 시간으로 겨우 하루 정도다.
‘그거 잠깐 비웠다고 그 타이밍에 침식체가 나타났다고?’
이곳은 내가 깨끗하게 정리해서 거의 완벽한 청정 구역이다.
이곳에 침식체가 온다는 건 정말 희박한 확률이었다.
외곽까진 그렇다고 치더라도,
말 그대로 이곳은 청정지대의 중심인데 이곳까지 들어왔다고?
거기다 그렇게 찾아도 보이지 않던 중급 침식체까지 튀어나왔다.
‘어처구니없군.’
채원과 아이들을 천부문에 머물게 한 건 혹시라도 도망간 중급 침식체가 다시 나타날지 모를 사태에 대비한 거 같았다.
“너희들은 날 기다린 건가?”
“네. 낭군님.”
도저히 알 수 없군.
뭐지?
그 틈에 이 근처에 이사라도 왔나?
아니면 여기까지 먹이를 찾아왔나.
이것저것 고민을 해봤지만, 당연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뭐…. 오히려 좋지 않나? 잘됐군. 괴물 거미 놈들보다는 개새끼들이 낫지.’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채원과 꼬맹이들이 다시 거점으로 돌아왔다.
내가 있으면 천부문 쪽보다는 이쪽에 있는 게 더 안전했다.
꼬맹이들이 매달려왔지만, 그것조차 귀찮지 않을 정도로 나는 컨디션이 좋았다.
이런 마음도 하루면 사라지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