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고민했지만,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입는 거지?’
어떤 이음새도 보이질 않았다.
그러자 슈트가 살아있는 것처럼 녹듯이 내 손으로 옮겨붙기 시작했다.
“어!?”
순식간에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팔을 넘어 전신을 덮어왔다.
어찌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전신을 뒤덮었다.
어느샌가 거울에는 전신이 시커먼 얼굴 없는 민머리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당황하긴 했지만, 착용감 자체는 상당히 편했다.
과장해서 입은 줄도 모를 정도로 편했다.
머리 부분이 완전히 시꺼멓게 덮여있음에도 시야에 방해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덮인 밋밋한 머리의 모습은 괴이한 느낌을 줬다.
그리고 신기했다.
‘눈하고 입만 그리면 완전 베눔인데?’
게이트 난리가 나기 전 히어로 영화들이 유행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 히어로 영화 중 베눔 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달라붙은 슈트 위로 근육의 볼륨감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내 몸이라는 게 아직 실감이 나질 않는 잘 발달한 갈라진 그 근육의 모습은 내가 봐도 멋졌다.
단련으로 이 정도 근육을 키우려면 얼마나 많을 공을 들여야 하는지 알기에 각성만으로 이런 몸이 만들어진다는 게 신기했다.
그 신기함에 거울 속의 슈트를 이리저리 살펴보다 문득 수니 생각이 나 혹시나 하고 불러봤다.
“수니?”
수니는 전에 있던 전투슈트의 음성인식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다.
[네. 주인님.]
머릿속에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수니의 목소리에 이 슈트가 내 전투슈트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있겠어?”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전투슈트가 변한 건 알고 있어?”
[네. 인식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고?”
[네.]
“예전의 기억은 있는 거야?”
[과거의 저장 데이터라면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그 검은 마석에 대한 기억은?”
[접촉 당시의 데이터는 있지만 그 이후의 변화에 대한 데이터는 없습니다.]
나는 수니가 무언가 변했다고 느꼈다.
수니와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애초에 슈트에 있는 음성인식 인공지능이라는 게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니다.
단순히 전투슈트에 있는 소프트웨어를 내 말에 따라 실행시켜주는 프로그램일 뿐이다.
대화를 한다고 해도 일방적인 내 말에 대한 정해진 반응일뿐이었다.
지금은 예전의 그 프로그램과 대화한다고 느낄 수가 없었다.
대화를 더 이어가 보기로 했다.
“상태는 어때.”
[상태 양호합니다.]
“헬멧이 사라졌는데 다른 기능이 이상이 없어?”
요즘 나오는 슈트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산 전투슈트의 거의 모든 기능이 헬멧에 몰려있었다.
그런데 헬멧의 흔적이 없다.
그러면 수니는 물론 그 외에 몬스터 감지기라던가 내비게이션 기능이 멀쩡할 수가 없었다.
[전에 있던 기능에 문제는 없습니다. 주인님의 시스템에 의해 오히려 성능 면으로는 전과 비교했을 때 두 배 이상의 성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전투슈트는 각성 스킬이 됐다.
그러면서 성능이 업그레이드가 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수니도 변한 모양이었다.
검은 마석.
그게 무언가의 작용을 한 심증은 있지만 어떻게 알아볼 방법이 없었다.
이건 고민해봐야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나는 각성을 했고 전투슈트는 업그레이드가 됐다.
지금까지 보면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오히려 좋았다.
“그나저나 이 머리 어떻게 안 되나?”
시커먼 얼굴 없는 근육 빡빡이가 거울 앞에 서 있는 모습은 과히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머리 보호를 해제하시겠습니까?]
“가능해?”
[네. 가능합니다.]
“해제해.”
머리를 뒤덮고 있던 슈트가 녹듯이 사라지며 내 얼굴이 나타났다.
마치 슈트가 살아있는 듯 했다.
‘정말 전투 슈트가 맞는 건가?’
“도대체 무슨 원리로 작동하는 건지….”
[주인님의 시스템에 의해 작동되고 있습니다.]
별로 의문을 해결될 만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냥 스킬이라서 된다. 라는 소리다.
<전투슈트 Lv 1>
스킬을 보면 전투슈트가 맞긴 한 거 같은데.
애초에 각성이라는 거 자체가 아직 해석 불가한 불가사의긴 했지만, 슈트에서 나타나니 신기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도 내가 보는 메시지가 보여?”
[인식할 수 없습니다.]
“안 보인다고?”
[네. 하지만 주인님의 허가가 있다면 가능합니다.]
“내 허가?”
[저는 주인님의 시스템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주인님의 허가 없이는 주인님이 보시는 그 메시지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종속됐다고?”
[네. 저는 주인님의 시스템 일부분입니다.]
전투슈트는 스킬이다.
수니는 전투슈트의 음식 인식 인공지능이었다.
‘전투슈트가 스킬이 되어버렸으니 수니도 그 일부분이라는 건가?’
<전투 슈트를 시스템과 동기화 하시겠습니까?>
그때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스템 동기화가 무슨 뜻이지?”
[전투슈트가 주인님의 시스템으로 완전히 동기화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은 동기화가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인 거 같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지금 전투 슈트의 관리는 제가 하고 있습니다. 시스템 동기화가 된다면 주인님의 의지만으로도 슈트를 완전히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조금은 이해가 될 거 같았다.
지금은 수니를 통해 슈트를 사용한다는 거다.
하지만 동기화를 하면 수니를 거치지 않고 상태창처럼 내 생각만으로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인 거 같았다.
굳이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수니는 슈트의 관리 프로그램이었다.
“동기화를 한다면 너는 어떻게 되는 거지?”
[주인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주인님께서 원하신다면 보존도…. 삭제도 가능합니다.]
수니의 감정을 느낀듯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자신이 삭제될 거로 생각한 것일까.
그리고 이내 수니가 감정을 느꼈다고 생각을 한 내가 웃기기도 했다.
감정이 없는 인공지능이라 해도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함께하니 나름대로 애착이 생긴 모양이다.
“그렇게 오래 살을 부대끼며 지냈는데 그럴 순 없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
<전튜슈트를 동기화하시겠습니까?>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오른다.
동기화를 실행했다.
<다른 관리시스템이 존재합니다. 삭제시키겠습니까?>
“아니.”
<다른 관리시스템과의 동기화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전투슈트 동기화 20%…. 60%…. 100%>
<전투슈트 동기화 완료.>
시간이 걸린다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도록 별 느낌이 없었다.
수니는 전투슈트가 내 의지대로 움직인다고 했다.
‘몬스터 감지장치가 작동되나?’
내 의지에 나를 중심으로 파동이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전투슈트가 한 일이었지만 내가 한 듯한 느낌이었다.
거의 100미터는 되는 거 같은데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도 느껴지는군.
업그레이드가 됐다더니 이런 걸 말하는 건가?
팔을 하나 더 사용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건 나름 집중력이 필요해 전투 중에는 쉽지 않아 보였다.
멀티태스킹이 필요한 일이었다.
내 머리로는 힘든 일이다.
수니를 지우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니.”
[네. 주인님.]
머릿속에 수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달라진 거 있어?”
[주인님의 관리시스템과 동기화 후 시스템 서포트를 더욱 적극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슨 소리지?”
[주인님이 허락하신 범위에 한해서 시스템을 활용한 자율적인 행동이 가능합니다.]
인공지능이라 그런지 말이 어려웠다.
“뭐…. 내가 시킨 일을 더 잘한다는 뜻인가?”
[그렇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님은 의지만으로 저에게 명령을 내리실 수 있습니다.]
굳이 소리를 내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인 거 같았다.
‘이렇게?’
[네.]
‘똑똑해진 거 같은데.’
[예전의 저와 비교하신다면 월등히 뛰어납니다.]
‘월등히라니 얼마나?’
[데이터의 저장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자율적인 학습 능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예전의 수니는 말이 인공지능이지 그냥 단순한 음성인식 프로그램이라고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진짜 인공지능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좋냐 안 좋냐로 생각하면 수니가 유능해졌다는 의미니까 안 좋을 이유가 없었다.
“그나저나 슈트가 너무 튀는데….”
[지금이 최적의 효율인 상태입니다.]
“예전처럼은 안되는 건가?”
[어느 정도 가능은 합니다만 기능 저하는 감수해야 합니다.]
보기에는 답답해 보였지만, 상당히 쾌적했다.
예전 슈트도 시스템만 작동한다면 꽤 쾌적했으니 지금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얼굴을 덮지 않은 상태로 위에 겉옷을 입어도 될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