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깼다.
어두운 방 안.
몽롱한 정신으로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밝게 빛나는 액정화면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오전 8시 42분.
어제 늦게까지 게임을 한 거치고는 일찍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시간도 적당했다.
하지만 귀찮다는 생각은 어쩔 수 없었다.
‘가자.’
마음을 먹고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몽롱한 정신으로 화장실로 가 적당히 세수했다.
거울 속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흐리멍덩한 눈동자와 찢어진 눈매.
까칠한 턱수염.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는 탄탄하고 굴곡진 복근은 어디 갔는지 살짝 나와 있는 밋밋한 배와 옆구리 살을 가지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관리하지 않은 몸이 불어 있었다.
“쩝.”
관리를 좀 해야 했지만, 예전과 같은 열정은 없었다.
화장실에서 나와 가볍게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한잔 마셨다.
시원한 물에 정신이 좀 더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장비방 한 구석 거치대에 모셔져 있는 전투 슈트를 볼 때마다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에 들어간 돈을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긴 했다.
전투 슈트를 거치대에서 꺼내 입었다.
불어난 몸에도 불구하고 맞춤형처럼 잘 들어맞았다.
하이엔드급은 아니지만, 당시 비싼 돈을 주고 산 사이즈 조정기능이 있는 나름 가성비가 좋은 강화 전투 슈트였다.
싸구려를 샀으면 불어난 몸에 맞지도 않았을 거다.
헬멧을 쓰고 바이저를 내려 슈트 에너지 잔량을 확인했다.
디스플레이에 보이는 잔량 표시가 65%를 나타내고 있었다.
하루 쓰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충전은 갔다 온 다음 하기로 하고 장비들을 챙겨 집을 나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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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서포터 생활 4년 차에 감각이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각성이라고 생각했다.
서둘러 비싼 마력 검사를 받았지만, 전과 다름없이 각성자 판정은 받지 못했다.
눈에 띄는 불이나 번개를 뿜어내는 자연계 능력이면 모르겠지만
“감각이 예민해졌어요.”
라고 해 봐야 측정직원에게는 개소리로밖에 안 들렸을 거다.
마력 측정은 별의별 이상한 소리를 하며 기계 탓을 하는 놈들도 많기 때문이었다.
그런 놈들과 같은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그래도 난 내가 각성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느끼는 평범한 인간을 초월한 감각이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총알을 피하는 반응속도를 자랑하는 D급 강화계 능력자를 너튜브에서 본 적이 있다.
자신과 각성자의 다른 점이라면 그건 육체 능력이었다.
나는 날아오는 총알을 볼 수는 있지만 피하지는 못한다.
그걸 보고 인식한다고 해도 그걸 피할 만한 육체 능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각성자는 각성하면 기본적으로 육체 능력이 향상된다.
강화계 능력자는 말할 것도 없고 육체 능력이 약하다고 평가받는 F급 자연계 각성자조차도 현역 운동선수급의 체력을 보여 준다.
나의 육체 능력은 F급 자연계 각성자급은 되었지만 이건 각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련의 결과였다.
각성했다면 그보다 높은 육체 능력을 갖추는 게 당연했고 육체 능력은 그대로였으니 마력 측정을 해도 각성자의 마력 등급에 닿지 않는가 싶었다.
물론 열심히 뛰어다니며 자신의 초능을 증명해 각성자라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구구절절 이해시키려고 할 노력을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
반쪽짜리 각성이다.
어렵게 인정을 받는다고 해도 F급일 게 뻔했다.
반쪽짜리 각성으로 각성자들 사이에 끼어 제대로 된 사냥을 할 수 있으리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특이 케이스라고 피곤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각성자로 인정을 받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알았지만 들이는 노력과 리스크에 비교해 얻는 것에 대한 메리트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때는 조금만 더 지나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반쪽짜리 각성자였다.
어중간한 각성은 10년이란 긴 세월을 나에게 게이트를 헤매이게 만들었다.
이제 각성해봐야 F급일 테고 나이도 있으니 거기서 몇 년을 더 노력해야 D급이 될까.
아니 평생 F급에서 못 벗어날지도 모른다.
나이도 몇 년만 더 지나면 마흔이다.
뒤늦게 현실을 자각하고 나니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각성을 위해 달려온 10여 년의 세월.
피로감과 허무함에 현자 타임이 찾아왔다.
집에서 쉬는 날이 많아졌다.
멍하니 그냥 뒹굴기에는 조금 심심했다.
게이트가 터지기 전에 게임을 꽤 좋아했던 생각이 떠올랐다.
당시 망할지도 모르는 세상 분위기와 각성에 꽂혀 자연스레 하지 않게 됐다.
심심하기도 했고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며 게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하는 게임은 생각보다 재미가 있었다.
배가 고프면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가 있는 편한 배달 음식이 있었다.
밤을 새워 게임 엔딩을 보고 게임을 하다 피곤하면 누워서 스마트 폰과 함께 너튜브의 알고리즘에 흘러 다녔다.
생각 없이 시작한 백수 생활이 하다 보니 꽤 재미있었다.
게이트를 찾는 횟수도 줄이며 게임을 즐겼다.
10여 년의 세월을 게이트에서 구르는 사이 세상에는 다양한 재미있는 게임들이 나와 있었고 예전의 편리한 세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때 무너질 뻔했던 현대 세상의 편리함은 중독성이 있었다.
뒤늦게 자가 격리 게임 폐인 생활에 빠져들었다.
요즘은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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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송도 게이트.
50미터가 넘는 거대한 공간의 일렁임은 언제봐도 장관이다.
한국에 남은 미공략 게이트 두 곳 중의 하나다.
일찌감치 포기한 제주도 게이트에 비해 서울과 가까워 초창기부터 우선 공략순위에 포함돼 있었다.
예상을 한참 벗어난 끝이 없는 밀림.
그 끝이 어디인지 아직 파악조차 못 하고 있었다.
공략을 시작한 지 10여 년이 넘은 현재 공략이라고 부르기보다 개척이라 불리는 게 더 익숙해져 버린 이 게이트는 다른 차원이나 먼 우주의 행성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나오고 있었다.
게이트 안은 게이트를 중심으로 거대한 성벽을 쌓아 요새를 만들고 그 요새를 중심으로 정부와 헌터 길드들이 각자 위성 캠프들을 만들어 개척과 공략을 동시에 해 나가고 있다.
게이트 발생 초창기 폐허가 된 송도 게이트 주변은 안팎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수많은 건물이 들어서 하나의 도시를 형성해 차량과 사람이 게이트를 끊임없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게이트 요새 안에 있는 햄버거집에서 햄버거 세트를 사고는 요새 바깥으로 향했다.
방향은 남쪽으로 잡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정보수집이니 머니 하는 그런 열정은 애초에 사라졌고 이제는 거의 마실 나오는 기분이다.
어느 쪽으로 간다고 해도 수익은 비슷할 거다.
오늘은 그냥 남쪽으로 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요새를 나와 위성 캠프로 이어져 있는 도로를 따라 걸었다.
요새 반경 2킬로는 혹시 모를 몬스터 습격에 대비해 나무를 다 잘라 시야가 확 트여 있었다.
위성 캠프는 이 도로를 따라 10킬로 이상은 가야 나온다.
위성 캠프는 서포터라면 모르겠지만 자신과 같은 무각성 헌터가 가 봐야 사람 구경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다.
당연히 나는 갈 일이 없었다.
20분을 걸어 밀림으로 진입하기 전에 거대한 나무 그루터기 앉아 아침 겸 점심으로 사 온 햄버거를 먹으며 태블릿을 꺼내 지도를 확인했다.
오늘의 파밍 루트를 짜야 하기 때문이다.
지도에는 빼곡히 맵마킹이 되어 있었다.
이 지도는 밥줄임과 동시에 헌터 생활의 흔적이다.
오랜 헌터 생활하며 알게 된 파밍 할 만한 열매나 약초들의 포인트를 지도에 표시한 것이다.
다른 무각성 헌터들이 아는 곳과 겹치는 곳도 있고 자신만이 아는 곳도 있었다.
무각성 헌터는 자신만이 아는 포인트가 얼마나 많으냐에 따라 수익이 결정된다.
나는 무각성 헌터다.
무각성 헌터는 공략이 완료된 게이트나 여기처럼 어느 정도 토벌이 된 나름 안정화된 지역을 위주로 채집활동을 한다.
사람들이 무각성 헌터들을 심마니라 부르는 이유기도 했다.
무각성 헌터라고 해도 벌이가 나쁘지는 않다.
열심히만 한다면 일반 직장인보다는 고수익을 보장했다.
각성 헌터에게는 가성비가 나오지 않는 일이지만 무각성 헌터에게는 각성을 향한 희망과 안정성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게이트 안쪽에서는 각성 확률이 오른다.
정부와 헌터 협회에서도 보증한 이야기다.
티브이에서는 게이트에서 각성한 일반인이 심심치 않게 방송을 타고 여기에 낚여 수많은 각성자 지망생들이 죽어 나갔다.
나름 안정화되었다고 하지만 전방에서 새는 몬스터가 없는 건 아니었고 특히 돌발성 차원 균열은 무각성 헌터에게는 재앙이었다
태블릿의 파밍 루트 데이터를 전투 슈트에 전송했다.
그리고 남은 콜라를 쪽쪽 빨아 먹고는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