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태동한 봄이 무르익는 계절.
새벽과 밤동안은 쌀쌀하던 날씨도 따스한 포근함을 머금게 되었다.
그리고 유페미아의 침실에서 그녀를 보살펴주고 있던 페르젠은 가벼운 노크후 안으로 들어서는 시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 맡기신 작업이 전부 끝났다고 합니다.”
“그러느냐.”
잠들어 있는 유페미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서, 그녀의 보살핌을 시녀들에게 일임한 후 페르젠은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직후, 별채에 따로 마련된 공방 안으로 들어가니 미미한 땀내와 물감의 냄새가 짙게 풍겨온다.
“오, 오셨습니까.”
“작업이 전부 끝이났다고 들었다.”
“예!”
“보여주겠느냐.”
“이, 이쪽으로 오십시오.”
직접 로젠베르크로 사람을 보내 고용한 미술가들.
그들이 끝마친 작업의 결과물을 보기 위해 페르젠은 안내를 따라 걸음을 내딛었다.
이 순간을 위해 구역질이 나도 알프레드의 노괴, 콜레오네와 만남을 가졌던터라 페르젠은 부디 자신이 실망하지 않기를 염원했다.
“……”
하지만 역시 예술과 문화의 성지, 로젠베르크에서 이름을 날리던 미술가들이라 그럴까.
자신의 두 눈에 들어오는 결과물들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방향성──밑그림을 자신이 그려주기는 하였지만, 상상속의 결과물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한다는 건 의뢰주의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는 만족이리라.
그리고 페르젠에게 고용된 미술가들 또한 그가 아무런 말없이 자신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주먹을 꾸욱 말아쥐었다.
그들도 익히 쌓아온 경험과 눈치가 있었기에, 페르젠이 보여주고 있는 반응을 통해 성공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말 한마디 없는 고요한 침묵.
작품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그보다 확실한 극찬이 있을까.
“이만 나가봐도 좋네. 보수는 별채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녀가 챙겨줄테니 걱정말게나.”
“예! 수고하셨습니다.”
주섬주섬, 공방에 널브러진 자신들의 도구를 챙기며 밖으로 나서는 미술가들이 드디어 일이 끝났다는 실감을 하며 묵힌 숨을 토해낸다.
솔직히 보수도 보수이지만, 이들이 페르젠의 의뢰를 받아들인 것은 브뤼테인과의 인연을 쌓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보다…… 솔직히 놀랍지 않나.”
“그러기는 했어. 아내 분에게 이런 선물을 준비하실 분은 아닌 것 같았는데.”
“나는 참고하라고 중앙에 전시해둔 아젤리아의 드레스에 물감이 묻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어……”
“크흐흐. 그건 다들 같은 생각이었을 걸세.”
의뢰 받은 작업을 하는 동안 있었던 일들과, 그 후기를 소소하게 풀어내며 걸음을 옮긴 미술가들은 이내 별채 앞에서 자신들이 받은 보수를 보고는 자연스레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쯤되면 아젤리아의 드레스를 더럽혔을 때, 우리의 목을 치실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군.”
생명수당이 포함된 것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많은 액수를 받아도 되는 것인지.
미술가들은 저 마다 두 눈을 끔뻑끔뻑 거리다, 한손으로 움켜쥐어도 부족할 만큼의 금화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는 뒤늦게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 * * * *
정말 오랜 시간, 별채의 공방에서 미술가들이 작업을 마친 그림들을 보고 있던 페르젠은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는 브뤼테인의 정원──그곳에서 여러 귀족가의 영애들을 모아놓고 다과회를 즐기고 있는 유리엘을 보고는 잠시 걸음을 멈추어섰다.
그러자 자신을 발견한 다른 영애가 시선을 보내오더니, 그 뒤를 따라 유리엘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눈길이 모여 페르젠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
정말, 이 별거아닌 반김에도 화사한 미소를 지어주는 유리엘.
‘그 동안, 매번 나를 기다리는 건 너였지.’
그러니까 유리엘.
‘이번에는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으마.’
* * * * *
“하아……”
늦은 밤.
시녀들을 대동하며 마차에 올라탄 유리엘은 한숨과 함께 창가에 몸을 기댔다.
도대체 무슨 용무에서인지 황급하게 자신을 불러들인 할아버지의 편지.
자신이 홀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까.
하기야 자신 못지 않게 태내의 이 아이에게 집착을 하는 것이 할아버지일텐데.
직접 찾아오지 않고 긴히 자신을 불렀다는 것은 그만한 중대사항이 있다는 것이리라.
지끈.
약간의 두통이 치미는 건지 관자놀이를 꾸욱꾸욱 누르는 유리엘이 목을 뒤로 젖힌다.
어느덧 브뤼테인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마차.
어둠이 짙게 내려 깔린 숲들의 풍경을 바라보며 유리엘은 두 눈을 감았다.
상당히 오랜 시간 마차가 나아갈테니, 억지로 잠을 취해둬야 아이에게 무리가 없겠지.
끼익.
그러나 브뤼테인을 벗어난지 30분도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추어서자, 쪽잠을 자던 유리엘은 두 눈을 뜨고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괜스레 긴장을 머금고 시녀들을 바라보는 유리엘이나, 시녀들은 유리엘의 의문을 해소시켜주지 않고 마차의 문을 열고 내리더니 극진히 허리를 숙여왔다.
마치 달빛이 내려앉은 고요한 숲속.
이곳이 목적지라는 듯.
“……”
혹여나 습격의 위험이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잔뜩 경계를 취한 유리엘이었지만, 브뤼테인 가문의 시녀들이 누군가에게 매수를 당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렇기에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마차에서 내린 유리엘은 사박사박, 수풀을 밟으며 걸음을 옮기는 시녀들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아……”
그러자 달빛이 내려비추는 한 가운데는 통나무로 만들어진 자그마한 오두막이 있었고.
시녀들이 그 오두막의 문을 열어주자, 커다란 거울과 함께 그 옆에 놓인 순백색의 드레스가 드러난다.
도대체 이게 무엇이냐고 묻고 싶은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으나, 그것을 억누르는 건 막연한 기대감.
“이리오세요. 저희가 아가씨를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꾸며 드릴테니.”
“……”
창가로 은은히 들어오는 달빛이란 참으로 마성의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자신을 보필하던 시녀들이 요정으로 보일리가 없겠지.
스륵.
그렇게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아젤리아의 이름이 기품있게 새겨진 순백색의 드레스로 갈아 입은 유리엘은 커다란 거울 앞에서 점점 아름답게 변해가는 자신을 보며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의 고동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내 화장을 마치고 뒤로 물러서는 시녀가 자그마한 상자를 가져오더니, 신고 있는 자신의 구두를 벗기고.
바닥에 내려 놓는 상자의 포장을 뜯어, 입고 있는 드레스와 똑닮은 구두를 정성스레 신겨준다.
끼익.
직후, 달빛을 어루만지며 자신에게 마법을 부려주었던 시녀들이 오두막을 나가는 문을 열어주자……
또각.
유리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걸음을 내딛었다.
쏴아──
따스한 봄바람과 함께, 살랑이는 수풀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자신이 가야할 길을 밝혀주는 달빛을 따라 걸음을 옮긴 유리엘은, 머잖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자그마한 호수와, 그 앞에 두갈래로 나열되어진 수많은 폭의 그림들을.
가장 처음 눈에 들어오는 건 요람에 누워 있는 아기였다.
대칭을 이루듯 반대쪽에 놓인 그림 또한, 배경만 다를 뿐이지 갓 태어나 쭈글쭈글한 주름을 가지고 있는 아기가 보인다.
또각.
하지만 조금씩 걸음을 옮기며 나아가자, 놓여 있는 그림 속의 아기들은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으나, 명확한 특징과 형태가 서서히 자리를 잡고 나니.
왼쪽에 놓여 있는 그림은 페르젠이고, 오른쪽에 놓여 있는 그림은 자신이라는 걸 유리엘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여기에 놓인 그림들은 페르젠과 자신의 시간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도 자신도.
행복한 기억만이 담겨 있지는 않았다.
어릴적의 그는 미소보다는 눈물과 좌절을 머금고 있을 때가 더 많았으며.
자신 또한, 개인의 삶을 박탈당하고 그를 위한 여인으로 길러지며 힘겨워 하는 모습이 더 많이 담겨 있었다.
그러다 문득, 13번째 그림 앞에서 유리엘은 걸음을 멈추었다.
왜냐하면 줄곧 각자만을 표현하는 그림이 처음으로 두 사람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오른쪽은 의자에 앉아 페르젠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
왼쪽은 의자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페르젠.
……이것은, 그를 위해 키워지고 길러져온 자신의 시간이 처음으로 부정당했던 순간.
욱씬.
차마 태연하게 있을 수가 없었던 건지, 가슴으로부터 아릿한 아픔이 퍼져나간다.
하지만 이제는 이또한 그와의 추억으로 받아들이며 유리엘은 걸음을 내딛었다.
14살.
15살……
13번째 그림을 기점으로 다시금 갈라지는 그림은 각자의 인생만을 표현하나, 정확히 23번째 그림.
10년의 공백을 가진 끝에 그곳에서 페르젠과 자신은 다시 만났다.
지금까지는 1년을 기준으로 했다면, 이제부터는 작년──그 12개월을 쪼개어 그림이 나열되어진다.
아카데미에서 그와 재회하는 자신.
함께 습격을 막아내는 그와 자신.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건지 모를 만큼 투닥거리는 그와 자신.
그리고 가장 뇌리에 깊게 박혀 있는, 자신의 할아버지──콜레오네의 저택에 단란히 앉아 있는 페르젠과 자신을 보았을 때 유리엘은 그만 눈물을 훔쳤다.
이때 그가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불안함과 두려움.
끝끝내 그가 당도했을 때 피어오른 기쁨과 행복은, 지금도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으리라.
그렇게 마지막 37번째 그림.
서로가 한살을 더먹은 다음 해, 3월의 봄.
전쟁의 끝에서 재회하는 순간을 담은 그림이 과거로부터 자신을 현재로 인도한다.
“……”
아니, 현재가 아니라.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이나는 호수 앞, 미쳐 보지 못했던 38번째 그림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그려주고 있었다.
순백색의 드레스를 입고, 검은색의 단정한 정장을 입은 그와 웃으며 입술을 맞추고 있는.
또각.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숙이니, 우측 상단에 익숙한 필체로 새겨진 글귀가 보인다.
「 년을 쪼개어 달. 」
「 달을 쪼개어 일. 」
「 일을 쪼개어 시. 」
「 시를 쪼개어 분. 」
「 분을 쪼개어 초. 」
「 나의 순간순간에 새겨진 당신과의 추억이, 부디 내 시간의 흐름이기를. 」
“읏……! 흐윽……!”
정교하면서도 간결한 필체로 새겨져 있는 그림의 글귀.
그것을 전부 읽었을 때, 유리엘은 스며들어 있는 페르젠의 애정을 느끼고서는 자연스레 울음을 토해내고 말았다.
세상에 이보다 로맨틱한 고백이 있을까.
세상이 이보다 감동적인 사랑의 보답이 있을까.
저벅.
저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어도, 그 사내가 페르젠이라는 걸 유리엘이 어떻게 모를 수가 있으랴.
“유리엘.”
“네……”
“엇갈렸던 시기가 참으로 많았다.”
“……”
“그 덕에 네가 내 곁에 있는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이겠지.”
그러니 내 지난날의 과오와, 저질렀던 실수가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라면.
조금 더 욕심을 부려……
“내가, 네 인생의 종착지가 되어도 괜찮겠느냐.”
바보 같은 질문이다.
이제와서 그런 허락을 맡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래도 유리엘은 내미는 페르젠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치며, 화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네…… 부디, 제 삶의 모든 것이 되어주세요……”
유리엘이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을 현실로 보는 감상은 엄연히 달랐기에, 페르젠 또한 입가에 행복한 웃음을 머금고는 유리엘을 끌어 안았다.
“사랑한다.”
“저도…… 저도…… 사랑해요.”
그렇게 서로의 인생에 기록되지 않은, 마지막 38번째 그림이……
쪽.
서로의 현재로 이루어진다.
* * * * *
4월 12일.
누군가는 이제서야 4월 초순이 지나가는가 싶겠지만, 페르젠은 벌써 4월 중순이 다가오는가 싶어 서재에 조용히 앉아 펜촉을 잉크에 적셨다.
그리고는 아무 내용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의 책을 펼쳐 서두에 손을 뻗는다.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이 몸으로 살아온, 페르젠이라는 악당의 삶.
그래, 이것은 추하고 비참하게 발버둥을 친 끝에 간신히 에필로그를 바라본──그러한 악당의 소감이자 후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처음, 서두를 장식할 문장은 사실상 정해져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리라.
「 새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 」
「 시리도록 차가운 한파가 몰아 닥치는 루에르그에서…… 」
「 나는,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 」
──完.
21. 02. 19.
22. 09. 11.
1년 7개월 끝에 드디어 연재가 끝이 났네요.
후기에 앞서 일정부터 언급을 드리자면……
일단 히강악의 초반부 빙의 관련을 살짝 손보고 전작을 옮겨오는 일에 착수할 예정입니다.
완결에 집중을 한다고 너무 오래 미뤘거든요.
말하는 대로는 약간의 수정만 하면 되지만, 아가페 필리아는 조금 많이 손볼 것이 있네요……
때문에 외전 작업은 전작을 옮겨오는 과정이 끝나고 나면 할 예정입니다.
에필로그처럼 각 캐릭터마다 분량을 할애할 예정이고.
리지와의 관계는 아마 외전에서 최종적으로 깔끔하게 마무리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황녀는 원래 딱히 생각에 없었는데, 브뤼테인과 황실의 관계가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외전을 내보겠습니다.
이하는 후기입니다.
* * * * *
서두를 어떻게 떼야 할까요.
네.
일단…… 저는 소설을 집필할 때 그냥 매력적인 원아이디어나, 그려내고 싶은 히로인의 인물성에 영감을 받는 편이었습니다.
실제로 아가페 필리아는 이누야샤의 셋쇼마루와 링의 관계를 보고 시작한 것이었고.
말하는 대로는 집안에서 굴러 다니던 마법 천자문 만화책을 보고 “오……?” 하다가 시작한 것이었고.
모형정원은 원래부터 심시티하는 것에 관심이 조금 있었습니다.
다들 어릴 때 부터 자그마한 페트병에 흙이랑 나뭇가지 같은거 넣고 개미를 붙잡아 나만의 왕국 느낌 같은 걸…… 즐기고는 했을까요?
물론, 모형정원의 발단은 그러했지만.
집필을 할 때는 지금 제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한 번 보고 싶은 욕망이 제일 컸습니다.
3질을 완결 내면서도 스토리의 서사는 힘을 잡지 못했고.
장편을 이끌어 나갈 역량이 늘어나지 않았거든요.
다만 그 욕심이 제 몸상태랑 겹쳐서 많이 안좋은 결과를 내기는 하였지만, 그 어느때 보다 자기객관화……
아니, 그냥 제 주제를 제일 잘 알게 해준 작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무튼 굳이 이말을 한건……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는 기본적으로 원아이디어나 히로인의 인물성에 영감을 받았다기 보다는.
굳이 언급을 하지 않아도 아실만한 작품에 영감을 받았습니다.
한참 재밌게 따라 가면서도, 이렇게 실력이 뛰어 나신 작가분도 정말 악당스러운 주인공은 서술하지 않으려 하는구나…… 하는 아쉬움이 들더군요.
물론, 그게 대중적인 입맛에 더 부합할겁니다.
하지만 그 아쉬움이 너무 컸던지라, 한 번 정말 세탁기로 돌리지도 못할 악당다운 악당을 써보자가 히강악의 집필 동기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기본적으로 이것은 대중적인 입맛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일정 선은 절대 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다행히 그 선은 적당히 지켜진 것 같으나……
그럼에도 리지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신 분이 많더라고요.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을 했습니다.
유일하게 타협할 수 없는 요소가 리지의 분량이었으니까요.
다만, 말하는대로의 아리아를 거쳐.
히강악을 집필하면서.
“아…… 나는 생각보다 캐릭터간의 관계, 거기서도 애증을 풀어내는데 나름 소질이 있구나.” 하는 자만을 한게 상당한 실수 같습니다.
유리엘.
유페미아.
두 사람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얽힌 리지와의 관계를 풀어내는 건 엄청 힘이 들었고.
실제로 정해진 플롯상으로는 깔끔하다고 느껴던 것이, 살을 붙이다 보니.
특히 마지막에서 제 역량이 아직 많이 모자라다라는 걸 느꼈습니다.
실제로 명계에서 제가 어떤 그림을 그려내고자 하는지는 아셨을지 몰라도.
감정선이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분들이 많았으니까요.
……이 말고도 실수가 하나 더 있기는 하네요.
만우절 사태라고들 하시는데.
이것은 제 역량도 역량이지만 과욕이 부른 참사이기도 했고, 평소 집필 마인드가 제 목을 조였던 것이 컸습니다.
“기본적으로 개연성 측면에서, 독자가 파고들 수 있는 허점은 없어야 한다.”
이게 집필하는 기본 자세였고.
그러지 않기 위해 저는 언제나 주인공이든, 적이든, 다른 캐릭터든.
제 머리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최선만을 선택하도록 하였습니다.
강박증과 별개로 집필에 오래 걸린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해요.
제 머리에서 생각한 최선의 수를 적에게 쥐어준다면.
주인공 입장에서 그것을 뚫는 최선의 수도 당연히 제 머리에서 나와야 하니까요.
그것을 궁리하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시간을 잡아 먹었거든요.
실제로 캐릭터들이 멍청하게 느껴지지 않기 위해 초반부 주인공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선택만을 거쳐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원작의 주인공, 시엘 입장에서는 활로가 보이지 않았죠.
그런 주제에 시엘을 살리려 했던 과욕이 부른 참사이자, 제 역량 부족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정말 다사다난한 일이 많았네요.
그래도 히강악 덕분에 많이 성장을 한 것 같아요.
매번 200화를 넘기지도 못한 제가 260화라는 장편을 기록하기도 했으니.
이쯤 오니 기본 뼈대가 되어주는, 중심 서사를 다루는 역량은 포기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듭니다.
제 취향도 취향이고, 나름의 강점이 되어준 건 언제나 캐릭터였으며.
실제로 히강악은 유페미아의 갈등 해소 ㅡ 유리엘의 갈등 해소 ㅡ 리지의 갈등 해소.
이 서순으로 서사가 이어졌으니까요.
아……
어느덧 후기가 엄청나게 길어졌네요.
제 인생에서 히강악은 1년 7개월을 자리 잡았습니다.
독자분들의 인생에는 히강악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자리 잡고 있을까요.
리지.
유리엘.
라우라.
유페미아.
제레미아.
엘리자베스 황녀.
그리고 그 외의 조연들이.
페르젠이라는 주인공과 얽히며 1화부터 260화까지 달려온 과정이.
즐겁고.
행복했고.
재미가 있었다는 짧은 여운을 남겼으면 좋겠습니다.
못난 작가의 여행에 따라와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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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가락부러짐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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