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앞으로──!
에르네스 제국의 수도, 거리에 세워진 호화스런 단상 위.
호명을 따라 별동대에서 생존했던 원소 마법사 두 명은 깔끔하게 차려 입은 복장을 내심 한번 더 매만지며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황자도, 황녀도, 황비도 아닌.
제국의 황제가 그들 앞으로 손수 걸어 나온다.
“빌레드.”
“예!”
“에드윈.”
“예!”
“제국을 위해 죽음의 위험도 불사지르고 용맹하게 작전을 수행한 바, 빌레드 그대에게는 에스테반이라는 성과 함께 남작위를 수여한다. 마찬가지로 에드윈 그대 또한 더글라스라는 성과 함께 남작위를 수여하겠네. 이 승소식이 끝나고 나면 할당 받을 영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줄 터이니…… 지금은 그대들을 위한 이 영광과 찬가의 순간을 즐기도록 하게.”
“폐, 폐하의 은총에 감사드리옵니다──!”
짧게나마 배운 격식을 취하며 감사를 표한 두 사람은 이내 허리를 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소감을 말해야 할 순간인데, 도대체 무엇을 말해야 하는 것일까.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 번 부풀려 말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정치의 연장선으로, 자신들의 상관이었던 이들을 입에 담아 치켜세워주는게 맞을까.
많은 고민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에드윈과 빌레드는 서로를 한 번 마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14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기억을 해주는 건, 오직 저희 두 사람 뿐이겠죠. 그들의 가족과, 역사에 기록될 짤막한 한 페이지는 그들을 잊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저희는 당신들이 기억을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는 영웅이 되어보겠다는 포부를 품고 사지로 걸어 들어 간것이 아닙니다. 그저 주어진 상황 속에서 도망을 치지 못했을 뿐이지요. 예. 도망을 치지 못했을 뿐인데 세상은 저희를 영웅이라 칭송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저 도망칠 용기가 없었던 저희들을 영웅이라 단정지을 것이라면, 이곳에 없는 12명도 함께 부디 영웅으로 기억해주십시오.”
저희 14명은 그곳에 있었고.
또.
“지금 이자리에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흘릴 눈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서 왜 또 한번 울음이 터져나오는 것인지.
그렇게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으며, 단상에서 내려오는 에드윈과 빌레드는 주먹을 꾸욱 말아 쥐었다.
황실이 동료들의 가족에게 적지않은 보상을 주기는 하겠으나, 역시 그들의 미래까지 생각한다면 자신들이 손을 거들어 주는 게 맞겠지.
한낱 평민에서 공로를 쌓아 귀족이 되어, 앞으로의 나날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솔직히 어색하기만 하다.
하지만 길라잡이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장에서, 사지에서, 그 곁에서.
귀족이라는 게 어떠한것인지, 자신들에게 보여준 사내가 있었으니까.
* * * * *
“이제 정말, 다 끝났군.”
늦은 밤.
레이몬드 황자의 처소.
그곳에서 단둘이 만남을 가지고 있는 페르젠은 와인 한잔을 들이키며 그의 말에 가볍게 웃어주었다.
“겉보기로는 그렇지요.”
처리해야 할 안건은 아직 많았다.
엘마르크 제국도 그렇고, 오베른 왕국도 그렇고.
나아가 반기를 들었던 이들도.
거기서 한줌 아쉬운 건, 기왕 그런 그림이 그려졌는데.
콜레오네는 그것을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오히려 칼침을 맞고 병상에 누워 있기에, 그는 문병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실제로 오베른 왕국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그의 공로가 막대했던지라 무시하기에도 애매했다.
그리고 그 불쾌한──고작 5시간 전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자 페르젠은 뒤늦게 품안에서 편지를 꺼내 망설임없이 찢어버렸다.
아니, 찢으려다가 포기했다.
유리엘의 회임 소식을 듣고 대량의 작명가들을 자신의 병실에 불러들어 뽑아낸 이름, 그 목록이 담긴 편지.
이것을 무시하고 이름을 지었다가 혹여나 명단에 포함된 이름이라면, 얼마나 징그러운 웃음을 지을까.
“자네가 그렇게 기겁하는 표정은 정말 처음보는 군.”
“……죄송합니다. 솔직히 감정의 갈무리가 잘 되지 않는군요.”
“괜찮네. 그보다 곧 콜레오네의 생일이기도 한데, 그때는 어쩌려고 그러나.”
“선물준비는 미리 다 끝내놓았습니다.”
수도의 건물 한채를 사들여 마련한 그의 관──장례식의 장소.
이미 산전수전을 다겪고 살아온 늙은이니.
선물이라면 정성스레 마련한 관짝으로 충분하겠지.
“화제를 돌리도록 하지요. 이 자리에서 그 노괴의 이름을 담는 건 아깝습니다.”
“자네가 원한다면 기꺼이.”
챙──!
거리감 한점 느껴지지 않는, 편안한 웃음을 머금으며 두 사람이 잔을 부딪친다.
* * * * *
새벽 3시.
기분 좋게 술에 취한 두 사람은 곯아 떨어지고.
레이몬드 황자의 처소에서 기사에게 엎혀 배정된 개인 침실로 옮겨진 페르젠은 단잠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황궁이어도, 낯선 누군가의 손길이 자신의 몸을 건드는데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그의 심리적, 정서적 상태가 안정되었다는 증거이리라.
“아…… 황녀 전하. 여기는 어쩌신일로.”
그렇게 문을 닫고 페르젠의 침소밖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기사는, 잠시 뒤 저 멀리서 엘리자베스 황녀가 걸어오자 깍듯이 경례를 취했다.
“백작은 잠들었느냐.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예. 주무시고 계십니다. 깊게 잠이 드신듯 하여 깨우는 건 민폐가 아닐지……”
“그럴 생각 까지는 없었니라. 급한 용건은 아니니 나중에 일어났을 때 다시 찾아오면 되는 일이겠지.”
“아닙니다. 백작님이 일어나시면 제가 따로 언질을 드리겠습니다.”
“되었니라.”
손을 저으며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덧붙인 엘리자베스는 걸음을 돌려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애당초 전하고 싶었던 말 따위가 없었으니, 기사가 정말로 언질을 주었다가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머리만 아파질 뿐이다.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구나.’
단순히 페르젠이 잠들었는지, 그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야밤에 걸음을 옮겼던 자신의 모습이란……
마치 길거리의 생선을 훔치기 위해 혀를 할짝이는 도둑 고양이 같아 엘리자베스는 미묘한 자괴감에 사로 잡혔다.
하지만 곧 그 자괴감을 떨쳐내고, 방안의 기물을 조심스레 조작한 그녀는 황궁의 비밀통로를 개방했다.
어디까지나 안전한 대피를 위해 마련된 장소였지만, 그녀는 순전히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그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정확히 페르젠이 잠들어 있는 처소.
그 부근의 기물을 다시 한 번 조작하여 비밀통로 안쪽에서 문을 연다.
‘아……’
그러자 내려앉은 어둠.
침상 위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는 한 사내가 그녀의 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에 조심스레 한 걸음을 내딛어 보려고하는 엘리자베스였으나……
멈칫.
일말의 양심이라는 것이 그녀의 도덕성을 쿡쿡 찌르며 가녀린 발목을 붙잡는다.
하지만 애초에 페르젠 또한 자신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하지 않았나.
품고 있는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데.
그럴 여유도 주지 않고,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 들어서다니.
손을 뻗으면 당장이라도 닿을 수 있는 곳에 연모하는 사내가 있는데, 여인으로서 어떻게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있을까.
‘정말, 추악한 자기합리화구나……’
처음부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면, 제발이 저리지도 않았을텐데.
당당하지 않은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스스로도 이러는 게 아닐까 싶어 엘리자베스는 쓰게 웃었다.
그에 겉으로는 먼저 거리를 두려는 듯 하면서도, 기회가 생기면 주저하지 않고 그를 탐하려드는.
그래, 속이 생각보다 시꺼먼 여인이라는 것을 인지하며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도덕성을 철저히 짓밟은 채 걸음을 내딛었다.
사근.
사근……
발걸음 소리도 죽이기 위해 맨발로 찾아왔던 터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말 그대로 도둑 고양이가 따로 없었다.
이윽고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를 따라 짙어지는 배덕감을 느낀 엘리자베스는 불규칙해지는 호흡에 자신의 심장 부근을 꾸욱 움켜쥐며 희미한 신음을 토해냈다.
“후으…… 흐윽……”
고작 몇걸음 나아갈 뿐인데, 왜 이리도 숨이 막히는 것인지.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연출임에도, 사랑하는 사내와 한 침소에 있다는 사실은 여인의 심장을 망가뜨리기 딱 좋은 불협화음이었다.
저벅.
기어코 침대의 끄트머리, 잠들어 있는 페르젠의 얼굴이 선명히 들어오는 종착지에 도착한 엘리자베스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자신의 꼬락서니를 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이렇게 가슴을 졸이면서까지 그의 애정을 원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관습을 무시하고 고백을 해보는 것이 낫지 않을까.
‘……’
하지만 배덕심에 점칠된 지금이라도, 엘리자베스는 거기까지는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이번만 해도 보았지 않은가.
브뤼테인도 잘못을 저지른다.
이번이야 자정작용을 하였다 하지만, 다음 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보장이 있겠나.
특히나 황실과의 결혼을 통해 유착관계가 혈연으로 이어진 상태에서 문제가 터진다면, 그 누구도 브뤼테인을 막을 수 없겠지.
선조들의 일기에도 자신과 같은 경우가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 모두가 미래의 황손들을 위해 고이 감정을 접었으니, 어찌 자신이 개인의 욕심을 더 부릴 수 있으랴.
그러나 몇 안되는 이 짧은 시간 정도라면, 황녀──엘리자베스가 아니라 여인 엘리자베스로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스륵.
삐걱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게끔, 침대에 걸터앉는 엘리자베스가 잠이든 페르젠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흘러내리는 백금발을 오른손으로 정돈한 채 고개를 숙인다.
쪽.
서로의 혀가 뒤엉키는 그런 적나라한 키스는 아니었지만, 입술과 입술이 잠시 마주 닿는 그 느낌만으로도 엘리자베스는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라 정신 또한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내뱉는 그의 숨소리에 상당히 도수가 높은 와인의 향기가 묻어 나와서일까.
꼴깍.
딱히 목이 마른 건 아닌데, 왜 이리 갈증이 일어나는지.
쪽.
이내 한번더 입술을 겹치는 엘리자베스가 수줍게 혀를 내밀어 페르젠의 치열을 훑는다.
할짝.
그러자 선명하게 느껴지는 알싸한 와인의 맛.
여기서 조금 더, 조금만 더……
굳게 닫힌 그의 치열 너머, 서로의 설육을 섞어보고 싶어 애처롭게 툭툭 문을 두드려보는 엘리자베스였지만 뒤늦게 자신의 과욕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아…… 하아……”
그의 입안에 남아 있는 와인의 맛.
그의 입술에 묻어 풍겨오는 와인의 향에 취하기라도 한 것일까.
좀처럼 식을지 모르는 뜨거운 체온에 엘리자베스는 황급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륵.
움찔!
희고 가느다란 다리.
그곳을 타고 식은땀이 야릇하게 흘러 내리자 엘리자베스는 두 다리를 오므리며 부르르 떨었다.
아니, 이것이 정말 식은땀이기는 한 걸까.
고개를 숙여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니, 음탕하게 새겨진 얼룩이 두 눈에 들어온다.
그에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내려 고간을 어루만진 엘리자베스는, 옷자락 위로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끈적함에 얼굴을 한가득 붉히고 말았다.
그래, 자신은 그의 입술에 남아 있는 와인의 맛과 향에 취한 게 아니라.
유일하게 이 몸이 기억하고 있는 수컷의 맛에 취한 것이었다.
‘얼른……’
얼른 돌아가도록 하자.
어째서인지 여기서 더 있었다가는, 한 명의 여자로서 욕심을 부리는 게 아니라.
한 마리의 암컷으로서 욕심을 부릴 것만 같았다.
“……”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와 입술을 맞추었던 자신의 입술을 지분거리는 고운 손가락.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한번만더.
이것은 욕심을 부리는 게 아니라, 최선의 타협이라고 생각하며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숙였다.
“흣!”
하지만 그 예상을 웃돌듯, 한 손을 뻗은 페르젠이 자신의 몸을 감싸 안으며 침대 위로 끌어 눕히자 엘리자베스는 호흡을 멈추었다.
순간적으로 찰나의 기억이 전부 날아가버린터라 자신의 뇌가 활동을 중지한 게 아닐까 싶었지만, 다행히도 거세게 뛰는 심장이 그녀의 정적을 몰아낸다.
스륵.
간신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 페르젠을 쳐다보니, 깊은 잠에서 깨지는 않은 것 같았다.
단순한 잠꼬대일까.
아니, 굳이 따진다면 그의 무의식에 자리잡힌 반사적인 행동이리라.
내뻗었던 그의 손은 정확히 무언가를 끌어 안고자 했으니.
그렇다면 페르젠은 아마도, 자신을 유리엘이나 유페미아로 착각한 것이 아닐까.
‘아……’
고개를 밀착하는 페르젠이 자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편하게 호흡을 한다.
그 뜨거운 숨결이 가져다주는 간지러운 감각에 엘리자베스는 발가락을 꼬물꼬물 거렸다.
‘읏!’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몸 위로 얹혀지는 그의 커다란 손이 풍만한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자 엘리자베스는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다.
심지어 침대 위로 쓰러지는 과정에서 흐트러진 어깨끈과 흘러내리는 식은땀은, 미미한 힘을 주어 주물럭거리는 그의 손길을 따라 옷자락을 자연스레 벗겨 내린다.
그 끝에 오른쪽 가슴만이 밖으로 삐져나와 분홍빛 유륜과 함께 수줍게 선 유두를 드러내며 맨살 위로 그의 손길을 허용하고 말았다.
“흐윽……!”
입밖으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최대한 억눌러 보고 싶었지만, 페르젠이 자신의 몸을 매만지고 있다는 사실은 촉감과 별개로 그녀에게 적지않은 심리적 흥분을 선사했다.
스륵.
하지만 곧이어 밑으로 내려가는 그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아랫배를 상냥하게 토닥거리다 멈추어서자……
엘리자베스는 역시, 그의 이 모든 행동은 자신을 유리엘이나 유페미아로 착각하고 선보이는 무의식적 반응이라는 걸 깨달았다.
처음에도 예상은 했었지만, 품고 있는 자신의 아이를 어루만져주기 위한 자상한 손길을 느끼고 나니 지금은 그것이 확신으로 뒤바뀐다.
솔직히 비참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설령 잠이든 그의 곁에서, 그녀들의 모조품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하더라도.
엘리자베스는 이 순간이 행복했다.
왜냐하면 황녀의 신분인 엘리자베스도.
그 신분을 벗어나, 평범한 여인인 엘리자베스도 아닌.
잠시나마, 그의 여자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게다가 별거 아닌 듯 해도, 소소한 소득 또한 분명 있었다.
자신의 아랫배 위에 얹혀 그곳을 부드럽게 매만져주던 손길은 남편으로서의 페르젠일지도 모르겠지만, 가슴을 주물럭거리던 손은 틀림없이 사내로서의 페르젠일 터.
“그대도……”
상당히 응큼하고, 음흉한 면이 있었구나.
키득.
소리없는 웃음을 머금는 엘리자베스가 이내 자신의 아랫배 위에 얹힌 페르젠의 커다란 손을 조심스레 마주잡으며 잠이든 그의 입술에 짤막한 키스를 건넨다.
* * * * *
부스럭.
오전 8시 40분.
잠들었던 침실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슬그머니 막는 페르젠이 두 눈을 뜨며 상체를 일으킨다.
약간의 숙취와 떠나지 않은 수마의 기운으로 인해 정신이 몽롱했다.
하지만 그탓에 페르젠은 이 방안에 남아 있는 왠지 모를 익숙한 향기를 선명히 맡으며 고개를 두리번 거렸다.
누군가가 잠시 왔다가 간 것일까.
스륵.
침상에서 내려와 냉수를 한컵 마시고는 문을 열어 그 앞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기사를 부른다.
“내가 자는 사이에 누가 들렸다가 갔는가.”
“아닙니다. 백작님이 주무시는 동안 찾아오신 손님분은 없으셨고, 전번 교대자에게도 아무런 전달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런가.”
“예!”
의아함을 머금으며 다시금 문을 닫는 페르젠이 방안을 한번 천천히 거닐었다.
“……”
그러자 역시, 너무나도 익숙한 향기가 자신의 주변으로 맴돌아 페르젠은 의아함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아련하고, 은은한 분위기가 한가득 스며들어 있는 향.
숙취가 내려앉은 몸은 얼른 창문을 열어 쌀쌀한 봄바람을 맞이하자고 속삭이지만……
그 속삭임을 외면한 페르젠은 얌전히 의자에 앉아, 이 방안에 서려있는 향기가 자신의 몸을 감싸안도록 내버려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