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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256화 (256/260)

쯧.

“참으로 미련하도다.”

전장에 내려앉는 나팔소리를 멀리서 들으며 콜레오네는 검을 빼내드는 레이몬드 황자를 향해 가볍게 혀를 찼다.

“보이느냐.”

“예. 어르신.”

“이상이란 별과도 같은 것이다. 손에 넣을 수는 없지만, 밤하늘의 나침반이 되어 가야 할 길을 알려주지.”

그리고.

“그 끝에 도달하는 운명의 종착지는 결코 좋지만은 않다. 절벽에 매달려, 그곳에 피어난 꽃을 꺾는 순간 남은 건 떨어지는 일 뿐이니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허면…… 이제 좌익을 칩니까?”

허허.

돌려말하지도 않는 그의 한 마디를 들으며 콜레오네는 너스레 웃음을 토해낸 뒤 수염을 매만졌다.

“기다려주도록 하자꾸나. 적어도 이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해주는 것이, 내가 건네줄 수 있는 최소한이자 마지막 예우니.”

“알겠습니다.”

맑고 푸르던 하늘에 어느덧 구름이 지고, 햇살이 한가득 비추어지던 대지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태양 또한 마지막 배려를 해주는 것인지.

까악──!

심지어 전장의 청소부조차, 아직 결판이 나지도 않았는데 미리 찾아와 허공을 배회한다.

움찔.

“……”

아니, 그렇다고 치기에는 하늘을 배회하는 까마귀떼가 지나치게 많아 콜레오네는 순간적으로 의아함을 머금었다.

군대가 풍기는 피비린내를 따라 시체를 파먹기 위해 날아왔다 해도.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할텐데, 앉을 곳도 없는 이 허허벌판에 어찌하여 이리도 많은 까마귀떼가 창공을 배회하는 것일까.

“어, 어르신……”

이윽고 그 의문을 해소시켜주듯, 자신을 부르며 어느 한곳을 가리키는 가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그는 명백히 볼 수 있었다.

노화가 많이 진행되어 늙은 몸뚱이로 가지고 있는 두 눈에도 선명히 담기는──저 너머, 지평선을 아득하게 메우고 있는 수백 수천의 망자들을.

그래, 까마귀떼는 군대가 풍기는 피비린내에 이끌려 날아온 것이 아니라……

저들이 풍기는 죽음의 냄새에 이끌려 이 전장에 도착을 한 것이었다.

곧이어 자신의 팔에 앉은 까마귀 한 마리를 날려 보내며, 망자들의 앞으로 한 사내가 걸어 나온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품격을.

그 자태를.

그 모습을.

알프레드가 어떻게 잊을 수가 있으랴.

“흐…… 흐하하하!”

죽음 조차도, 그들의 충성심을 막을 수 없었단 말인가.

‘아니──!’

두 눈을 부릅뜨며, 콜레오네는 두 손에 꽈악 힘을 주었다.

필멸의 존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건, 태초부터 이어진 오랜 역사로 이미 증명되어진 것!

그러니 페르젠이라는 사내가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그저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고.

명확한 목적은 오직 이 순간, 황실을 향해 반기를 들고 있던 자들을 색출 해내기 위한 덫을 깔려는 것이었으리라.

“어르신……”

“크흐흐……!”

뒤통수가 아려올 만큼, 콜레오네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으나 오히려 기분은 최고조에 도달해있었다.

“하룻 강아지에 지나지 않았던 황실이, 드디어 범의 새끼 정도로는 자라났는가.”

전쟁에서 승리를 한다 하더라도, 황실의 힘은 기존보다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의 구조 자체가 그러했으니까.

심지어 원인의 제공을 엘마르크 제국이 하였다고 한들, 전쟁을 먼저 선포한것은 에르네스 제국.

그 차이는 적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 덫을 통해 귀족파들의 세력을 대거 깎아 먹을 수가 있으니, 이 얼마나 멀리 내다본 계획이란 말인가.

조금만 성급하게, 아군의 좌익을 물어 뜯으라고 명령을 내렸다면.

자신은 두말없는 반역자가 되어 처형을 피할 수 없었겠지.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기에, 콜레오네는 기꺼이 이 순간 그들의 무대 위에 올라서주기로했다.

“자. 가도록 하자꾸나. 돌격의 목표는 엘마르크 제국군의 중심이다.”

가장 많은 피를 흘리고.

가장 많은 희생을 치루어.

“내게 가장 값비싼 영광을 가져오도록 하거라.”

“예──!”

이내 콜레오네 웨인 바레타 알프레드, 그가 이끄는 군대가 진격을 시작했다.

* * * * *

막아라──!

능구렁이 같은 영감의 군대가 자신들을 향해 돌격해오자 그레모리는 피식 웃으며 등을 뒤로 돌렸다.

이 전장에서 사실 페르젠이라는 사내의 존재감을 가장 빠르게 눈치챈 건 다름아닌 그레모리다.

‘분명 내 두 눈으로 지켜보았것만……’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 명계로 향한 인간이 다시금 이승으로 돌아 올수가 있는 건지.

하지만 그레모리는 그것을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중요한 건 오직 눈앞의 결과였으니까.

‘그래.’

이 세계의 순리를 우롱하고, 필멸자들의 두 눈을 멀게한 것은 칭찬을 해줄법하나.

‘죄다 썩어 문드러진, 그 볼품없는 시신들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

희미한 비웃음과 함께.

그가 조각한, 이 시대 최고의 세공석이자 만병지왕인 그레모리가 걸음을 내딛는다.

* * * * *

돌아왔다라는 실감이 왜 이리도 나지 않는 것인지.

마치 모두가 자는 깊은 새벽, 어둠이 내려깔린 거리를 조용히 걷고 있는 듯 하다.

리지는 분명 자신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기한이 한달이라고 하였는데.

벌써 그 시간이 지나버린 것일까.

‘아니……’

생각해보면 자신이 돌아가고자했던 곳은, 에르네스 제국이라는 땅덩어리가 아니라.

길을 막고 있는 엘마르크 제국군의 너머, 그녀들과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 옆자리 일것이다.

때문에 페르젠은 자신의 제단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뒤 걸음을 내딛었다.

쿠웅!

곧이어 그의 뒤로 열리는 명계의 문은 심층의 바로 이전, 4층으로 연결이 되고.

그곳에서 강림하는 건 생물의 형태를 지닌 괴이가 아니라 「 땅 」

“끅……! 끄아아악!”

그래, 즈려밟고 있는 땅은 명계의 문을 중심으로 가파르게 영역을 확장해나가더니 대지를 꿈틀거리는 살덩이로 바꾸어버렸고.

그 위에 서있는 엘마르크 제국군들의 다리를 뿌리 내리게 만들어 그들의 몸을 비틀어버렸다.

순식간에 빨랫감처럼 쥐어짜여지는 그들의 몸뚱이는 체내의 피와 장기, 근육과 핏줄들을 모조리 토해냈으며.

남은 뼈들은 비틀린 살가죽을 뚫고 튀어 나오더니 조금씩 자라나 앙상한 나무를 형성한다.

대제국의, 수만의 군세가 자리를 잡고 있던 곳이.

겨울을 맞이한 대수림으로 천천히 변해가고 있는 광경은 정말이지 기이했고, 또 경외스러웠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마주치는 그레모리는 처음 페르젠을 향해 다가갈때의 기세가 무색하리만큼, 꿈틀거리는 대지에 남은 왼발이 집어 삼켜져 추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3층의 괴이와 다르게 4층의 괴이에게 저항할 때는 소모되는 마력의 양도 차원이 달랐기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마력을 토해내며 간신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

당연히 그것을 얌전히 주시하고 있을 만큼 괴이라는 존재에게 자비심이라는 감정은 없었던터라, 주위의 앙상한 나무들은 몸을 숙여 그레모리에게 일제히 달라붙었다.

그러자 꿈틀거리는 나뭇가지들이 해당 접촉을 통해 그녀의 피부위로 서서히 이식된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생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의미에서 보자면 완벽한 이화접목(移花接木)이라고도 할 수 있었기에.

자연스레 그레모리의 마력은 더더욱 가파르게 소모되기 시작했고……

으드득!

쁘직!

끝내 희미해지는 마력을 따라 저항감이 약해지자, 가느다란 허리춤이 비틀리며 척추가 으스러진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찢겨지는 살가죽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선홍색 핏물은 그녀의 옷자락을 아름답게 물들여나갔다.

“크…… 크흐……!”

27년의 인생, 그 시간 동안.

이리도 무기력하고, 가공할 폭력에 압도를 당해본 적이 있었을까.

열려있는 명계의 문──그곳에 표기된 층수가 4층이라는 건 틀림없이 페르젠이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는 증거이리라.

그래, 결국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고 명계로 향한 그가.

이승으로 돌아와 자신을 넘어선 이 순간, 과연 어떤 소감을 들려주련지.

죽음의 문턱에서 내심 그레모리가 궁금한 건 그것이었다.

저벅.

하지만 자신이라는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옆을 지나쳐가는 페르젠.

그의 붉은 눈동자가 담고 있는 건 이 너머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녀들과 그들 뿐이었다.

그에 그레모리는 얼마 남지 않은 기력을 쥐어 짜내어 페르젠의 걸음을 돌려 세워보려고 발악을 해보았으나……

결국, 포기를 하고서는 입을 닫았다.

본디 인간은 오르고자 하는 산의 정상을 올려다보지만.

반대로, 산의 정상은 그러한 인간을 내려다보지 않는다.

그래, 그것이 이치.

‘아……’

나쁘지는 않구나.

더이상 오를 곳이 없는 정상에 서서, 무료하게 삶을 마감하는 것 보다는……

오르지 못한 산의 정상을 올려다보며 눈을 감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

쩌억──!

그렇게 처절하게 뒤틀리는 그레모리의 몸뚱이 안에서 자라나는 뼈들이 가지로 뒤바뀌고.

그레모리 엘딘 이슈타르 엘마르크라는 여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거목이 되었다.

54,221.

명으로 따진다면 그것은 이곳에 집결한 엘마르크 제국군의 숫자였고.

그루로 따진다면, 이 대평원에 자리 잡은 나무들의 숫자이기도 했다.

저벅.

그리하여, 그 길을 전부 헤쳐나온 페르젠은 몇 걸음 남지 않은 곳에서 짤막한 심호흡을 머금었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쿵쿵 뛰고.

설레임인지 긴장인지 모를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보아하니.

다행히도 지금 이 순간, 이곳에 두발로 서있는 존재는 페르젠이라는 “인간”이 맞는 듯 했다.

툭.

이윽고 구두의 앞굽으로 바닥을 가볍게 내려치자, 앙상했던 54,221 그루의 나무가 일제히 꽃을 피운다.

만발하는 것은 싱그러운 향기였고.

만개하는 것은 분홍색 꽃잎을 가진, 아름다운 벚꽃.

저벅.

저벅……

15걸음.

그 앞에서 차마 빈말으로도 보기좋은 표정이라 하기는 힘든, 울상이 가득한 레이몬드 황자를 보며 페르젠은 한쪽 무릎을 꿇은 뒤 고개를 숙였다.

“페르젠 폰 슈바이크 루에르그. 기나긴 여행에서 지금…… 돌아왔습니다. 전하.”

바람결에 휘날리며, 비처럼 떨어지는 벚꽃들이 시야를 한번 가린다.

그리고 그 비가 그쳤음에도, 페르젠이 자신의 앞에 있다는 건 작금의 이 순간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증거이겠지.

태어난 모든 것들은 기약없는 이별을 준비하고.

동시에 운명 같은 만남을 기다리며 살아나간다.

그러니 이별 전, 그가 했던 말을 뇌리에 떠올리며 레이몬드 황자는 환하게 미소지은 채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어서오게나…… 백작.”

물론, 반겨주는 건 그만이 아니었다.

내려앉은 벚꽃잎을 즈려 밟고 있음에도, 발걸음 소리가 죽지 않는.

이 재회의 순간에, 솟구치는 감정을 만발한 벚꽃처럼 흘리는 유리엘이 달려와 페르젠을 와락 끌어 안았다.

“흐…… 끕!”

더듬더듬, 그의 얼굴과 몸을 매만지는 가느다란 손이 애처롭다.

정말 그가 자신의 두 눈앞에 제대로 살아 있는 것인지.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몇십번, 몇백번을 더듬거리는 손길.

그리고 그 끝에, 너무나도 커다란 손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유리엘은 파르르 떨리는 몸을 그의 품에 조심스레 맡기며 말했다.

“어서와……” 라고.

그 한마디를 들은 페르젠은 기꺼이 그녀에게 대답을 들려주려고 했으나……

꾸욱.

어느덧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라우라가, 아무런 말없이 왼손에 깍지를 끼자 너스레 웃고 말았다.

이제는 굳이, 유리엘이 바로 코앞에 있음에도.

숨기면서 살 이유가 없다는 뜻일까.

또각.

나아가 한 명 더.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깝다고 할 수 있는.

고작 네 걸음 떨어진 위치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화사한 백금발을 귀 뒤로 쓸어넘기자 페르젠은 아련한 눈길로 시선을 마주해주었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은, 어렵지 않게 눈치를 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 질 수 없음에.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감정을 페르젠에게 쏟는다는 게 욕심이라는 걸 알았고.

페르젠 또한, 그녀의 감정을 받아준다는 게 욕심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기에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조심스러웠으나, 이 재회의 순간만큼은 조금 느슨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약속…… 지켰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다가오는 봄.

그 곁에서 여전히 함께 있어 달라고 했던 그녀의 말.

그것을 어기지 않았다고 대답하며, 페르젠은 옅게 웃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는 짤막하게 떨어진 거리에서 주먹을 살짝 말아쥐었다가 천천히 피며, 페르젠을 따라 함께 미소를 그렸다.

“그래…… 어서오거라. 페르젠.”

백작이 아닌, 그의 이름을 머금어 보는 것은.

유치하더라도 한번 내세워보는 나지막한 욕심.

그렇게 이들의 곁으로 돌아온 페르젠은, 그제야 귀환을 했다는 실감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반드시해야만 하는 한마디를 목구멍까지 끌어 올리며 입을 연다.

“다녀왔습니다.”

* * * * *

3월.

봄.

악당은 그 자리에 있었다.

피어나는 행복과 함께.

“흥.”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을까.

만발하는 벚꽃 속, 그들의 시야 밖에서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리지가 코웃음을 친다.

생명의 태동.

계절의 시작.

그 모든것을 알리는 아름답고 화사한 벚꽃마저도, 그는 누군가의 목숨과 불행을 씨앗삼아 꽃피우는구나 싶어 리지는 참으로 그답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그래.

피어나는 행복속에는.

잔잔한 파란 또한 함께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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