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네스 제국의 수도, 그곳의 황궁.
권좌에 조용히 앉아 있던 황제는 머잖아 문이 열리자 조심스레 두 눈을 떴다.
또각.
또각……
이윽고 잔잔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그의 앞으로 당도하는 건, 현 브뤼테인의 가주──제레미아 폰 베르엠 브뤼테인.
“왔는가……”
두 눈을 떴으나, 차마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황제는 시선을 돌린 채 입을 열었다.
“예. 제레미아 폰 베르엠 브뤼테인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러나 제레미아는 황제의 그 나약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충성심을 담은 채 절도있는 예의를 취했다.
“하하. 하하하……!”
그에 에르네스 제국의 황제는 휘몰아치는 복잡한 감정을 실소로 표현할 수 밖에 없었고, 끝내 울적한 목소리로 한낱 노인의 넋두리를 토해냈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짐은 그대에게 황제라 불리울 수 있는가……”
너무나도 염치가 없어 자신의 권좌에서 일어난 황제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겨 그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쿵!
그리고는 무릎을 꿇어 이마를 거세게 바닥에 찍는다.
대역죄인이 할법한 석고대죄를, 무려 한 나라의 황제가 펼쳐내고 있는 것이다.
“미안하오.”
“……”
“이리도 무능하고, 힘없고, 못난 황실이라 미안하오……”
“폐하.”
“오랜 세월 그대들의 충의에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온, 아이 같은 황실의 모습을 벗어 던지고 자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소……”
하지만.
“결국, 우리는 걸음마조차도 제대로 떼지 못하는 반푼이였구려……”
브뤼테인의 역사가 손을 잡아 주지 않는다면 제대로 서지조차 못하고.
브뤼테인의 피로 얼룩진 길이 아니라면 나아갈 수도 없는.
“그저…… 유능한 충신의 목숨을 갉아 먹기만 하는 기생충이였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전쟁의 근본적인 발단은 적어도 페르젠이 얽힌 악연이다.
물론, 자신들의 눈치를 보는 탓에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한 황실도 죄가 있다면 있으리라.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자신들 또한 브뤼테인이 가지고 있는 입지를 그 당시에 명백히 이용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한번이 아니라, 페르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추가적으로 권력을 휘둘렀다.
그런 주제에 황실이 올바른 소신을 유지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지극히 결과론적인 가정은 그릇된 욕심이고 책임전가라 할 수 있겠지.
애당초 그것을 허용할 수 없었기에, 죽어버린 자신의 동생──페르젠은 최전선에 나선 것이었다.
원인이 자신이니, 그 결과 또한 자신으로 끝내기 위해.
그러므로 옳고 그름, 잘못됨을 따지자 한다면 그 대상은 브뤼테인이라 하는게 맞을 것이다.
즉, 여기서 오히려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건 제레미아였다.
또,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황실의 가신으로 남아 있어도 되는지──그것을 물어봐야 하는 것 또한 제레미아였다.
그렇기에 제레미아는 황제를 따라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제가…… 이곳에서, 끝까지 폐하의 가신으로 남아 있어도 되겠습니까.”
라고.
꽈악!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황제는 주름진 주먹을 움켜쥐며 소리없는 울음을 토해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브뤼테인을 보고 있으니 왜 이리도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지는지.
그는 잘못이 오직 브뤼테인의 것이라 하였으나, 황제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의 눈치를 본것도 본것이지만, 올바른 소신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한 본질적인 이유는……
브뤼테인이라는 가문이 일탈을 했다는, 그 오점 자체를 자신들도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벌을 내려 그릇됨을 바로 잡기 보다, 그 과정에서 오점이라는 균열이 벌어져 브뤼테인이라는 가문이 다른 귀족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지는.
그 결과를 가장 두려워 했던 것이다.
사리사욕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언제나 의지가 되는 청렴결백한 충신이자 기둥.
그 완전무결의 형태로, 브뤼테인이 영원히 남아 있어주기를 원했던 바램.
그 바램이 결국에는 욕심이 되어버린 것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군주가 되어 신하에게 이상향이 되어주지는 못할 망정, 신하에게 이상향을 품는 군주라니.
참으로 볼품이 없었다.
물론, 페르젠은 오히려 그덕에 지독한 강박증으로부터 무너지지 않고 자신만의 자아를 형성해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이라는 것은 모호했고.
이제와서 그것을 따지는 것도 의미가 없는 일이리라.
저벅.
그에 상념을 가라앉힌 황제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다시금 자신의 권좌로 돌아가 앉았다.
긴 세월, 변치 않는 충성을 바쳐온 브뤼테인.
그들이 끝까지 그 모습으로 남아 있고자 한다면, 자신 또한 끝까지 그들의 황제로 남아 있어야 하겠지.
또각.
그리고 그 무언의 긍정을 확답 받은 제레미아가 몸을 일으켜 조용히 자신의 곁에 서자, 황제는 아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충성을 받을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었네.”
“예. 저 또한…… 폐하와 황손분들을 섬길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에르네스 제국의 수도, 그곳의 황궁.
너무나도 넓고 커다란 대전 안에는, 마지막 전투의 소식을 기다리는……
한 명의 황제와, 한 명의 충신만이 남아 있었다.
* * * * *
“흐음.”
자신들의 진군을 막기 위한, 에르네스 제국군의 최후의 전선.
그것은 보는이로 하여금 자연스레 긴장을 머금게 만들었으나, 정작 가장 선두에 서있는 그레모리는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한쪽 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협소했지만, 이것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동안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산의 정상──그 곳의 풍경 일테니 딱히 아쉬움이 들지는 않는다.
“빼내든 창과 검은 장난감 같고, 진중한 표정은 가소롭기 그지없구나.”
존재하지 않는 두팔.
오른발의 의족.
전쟁터에서는 가히 병신이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모습으로 내뱉는 그레모리의 한 마디는 조소를 불러일으켜야 정상이었으나, 그녀의 뒤에 서있는 엘마르크 제국의 가신들은 오히려 어느 때 보다 안정되고 든든한 표정을 지은 채 말의 고삐를 붙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금의 그레모리 엘딘 이슈타르 엘마르크라는 존재는 극한으로 담금질 된 검이자 이 세상 최고의 병기였으니까.
만병지왕(萬兵之王)을 묻노라 한다면 그것에 대한 해답이 곧 그녀의 육신이었고.
영원에 필적하는 절대와 무적이라는 단어는 감히 그녀를 수식하려 들었다.
때문에 엘마르크 제국의 가신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에르네스 제국의 기둥──페르젠이라는 한 사내에게 감사함을 표했다.
그녀는 보석으로 비유하자면, 이 세계의 기술력으로 세공이 불가능한 다이아몬드와도 같은 것.
하지만 결국 그런 그녀를 손수 세공해준 것은 유일무이한 호적수, 페르젠이지 않던가.
스스로의 목숨을 조각칼로 깎아, 이 시대에 탄생할 수 없는 금강석을 세공한 것을.
그는 틀림없이 명계에서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으리라.
“그나저나……”
옆으로 고개를 슬그머니 돌리는 그레모리가 개구장이처럼 짓궂게 웃는다.
“저 늙은 영감의 군대는, 참으로 애매한 위치에 서있구나.”
자신들을 따라 에르네스 제국, 그 최후의 전선에 합류한 콜레오네 웨인 바레타 알프레드.
그는 얼핏 보면 전투가 발생했을 때, 가장 커다란 피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곳에 자리 잡은 듯 했지만.
그 위치는 동시에 아군의 좌익을 철저히 찢어 발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과연,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충신의 마음가짐으로 저곳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극악무도한 간신의 마음가짐으로 저곳에 있는 것일까.
하기야 고민하는 게 우습지 않나.
타 제국의 귀족이어도, 알프레드 가문의 노괴라 불리우는 그의 인물상이 어떠한지 그레모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역사란, 오직 승자의 일기.
‘그렇지 않느냐.’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시선이 닿지 않아도.
콜레오네 웨인 바레타 알프레드라는 노괴와 목소리 없는 대화를 주고 받은 그레모리는 이내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전선을 바라보았다.
머잖아 마지막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에르네스 제국군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진다면……
자신이 해야 할 것은──그들의 피와, 눈물, 울음을 펜촉에 적셔 일기를 써내리는 것 뿐이리라.
* * * * *
“그대들은…… 그대들은 일말의 양심조차 없는가──!”
가장 앞, 선두에 위치한 곳임에도.
레이몬드 황자는 차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뒤로 돌려 커다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콜레오네 웨인 바레타 알프레드.
저 노괴가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후퇴를 명령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해당 소식을 알리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를 하고 통제를 했거늘.
기어코 틈을 비집고 나아가, 이들은 영악한 여우를 불러들이고 말았다.
알프레드 가문이 보여주는 충성의 형태가 어떤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텐데.
몰락하는 제국을 위해 끝까지 충성을 바칠 만큼 그는 충직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충의를 들먹이는 것도 우스우리라.
왜냐하면 그의 비틀린 욕망이 브뤼테인을 향한 열등감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다면, 진작 자신들의 심장을 옥죄고도 남았을테니.
브뤼테인이라는 거목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거기에 지는 알프레드라는 그림자는 황실이 잠시나마 쉬어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그 관계가 깨진 이상, 알프레드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들을 잡아 먹으려 들겠지.
몰락하는 제국은 그들 입장에서 새로운 거목으로 자라나기 위한 적합한 터전이 아니었으니까.
“그대들은…… 그의 죽음을 보고서 무엇하나 느끼는 게 없는가?”
꼭, 페르젠이 아니더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루벨타 강으로 나아간 별동대들을 보고서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는가──!”
여기는 나의 국가도 아니고.
여기는 나의 제국도 아니고.
“우리들이 자라나고 태어난 고향이지 않나……”
평소에는 그리도 욕심을 부리는 주제에.
왜, 이럴 때는 그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인지.
허탈함.
좌절감.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환멸 등.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 힘없는 목소리를 토해내며, 레이몬드 황자는 끝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런 레이몬드 황자를 바라보고 있던, 콜레오네를 불러들인 귀족들은 말의 고삐를 붙들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전하. 패배가 정해진 전쟁에 백성들을 밀어 넣는 것이 정녕 합당한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
“당신은 그저 페르젠이라는, 브뤼테인의 핏줄이 죽은 것에 대한 울분을 갚고 싶은 게 아닌지요.”
“엘퀴레 자작! 그게 무슨──!”
“황녀 전하. 제가 틀린말이라도 했습니까? 그레모리 여제에게 대항할 수 있는 건 루에르그 백작 뿐이었고. 그가 죽은 시점에서 이 전쟁은 승리할 가능성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끌어봐야 적들에게 철저히 유린당하는 길만 남은 판입니다.”
비웃음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을 향해 무어라 한 마디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반박할 여지가 없는, 그 냉혹한 사실에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꾸욱 말아쥐며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패전국에 대한 대우는 분명 좋지는 않겠으나…… 사랑하는 연인, 부모, 아내와 딸. 그런 이들의 곁에서 함께할 수 있는 미래를 승리할 가능성이 조금도 없는 전투를 위해 내걸으라고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게 아닙니까? 브뤼테인의 핏줄이 죽었다는 슬픔에 잠겨, 당신들은 잿더미 밖에 남지 않을 미래로 백성들이 향하게끔 그 이기적인 광기를 전염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자작!”
“당신들은! 정말 저들이 모든 전후사정을 알고 나서도 이 전투에 목숨을 바칠 것이라 확신을 합니까? 정녕! 그 확신을 가지고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을! 불라고! 명령을! 내릴 수 있냐는 말입니다──! 이것이 애국심이라면…… 차라리 가지지 않는 게 낫겠군요.”
그의 논리는 지극히 감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강력하기도 했다.
그에 레이몬드 황자는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다가, 고개를 뒤로 젖혀 푸른 하늘을 두 눈에 담으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에게 우리는…… 언제나 씹기 좋은 입맛대로 변화하는 군주 군……”
“언행이 지나치기는 했어도, 틀린 점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엘퀴레 자작. 저항은 백성의 의무고, 침략에 맞서는 건 국가의 의무라네.”
그리고.
“그 의무를 외면했을 때 돌려 받는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지.”
때문에 앞으로의 역사에 자신이 더할 나위 없는 암군(暗君)으로 기록된다 하더라도.
그 의무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레이몬드 황자는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이 전장 전체를 가득 메우는, 크고 웅장한 나팔소리가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