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을까.”
페르젠이 우악스런 힘으로 찢어버린 자신의 옷자락들을 주섬주섬 주워 적나라하게 드라난 나신을 가리고 있던 리지는 복잡한 상념이 휘몰아치고 있는 듯한 페르젠의 얼굴을 보며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고약한 취급에 오히려 서글픈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건 나일 텐데.”
눈이 녹고 새싹이 무르익기 시작하는 땅이었어도.
천 조각 하나 깔지 않은 맨바닥에 깔려 그에게 안겼으니, 새하얀 엉덩이와 등에는 적잖은 생채기가 새겨졌다.
그리고 고간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이 뒤섞인 걸쭉한 정액의 덩어리들은 그가 얼마나 난폭하게 그녀의 음부를 쑤셔댔는지 아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원치 않는다면, 여기서 당신의 손으로 나를 죽여도 좋아.”
자신을 취했을 때, 그가 감정을 느끼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한달.
때문에 자신을 죽인다는 건, 앞으로 한달 후.
모든 감정을 거세 당한 채, 공감할 수도 없는 기억에 의존하며 연기밖에 할 줄 모르는 삶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답잖은 도발이구나……”
자신이 결코 선택할 수 없는 일을 보란듯이 제시하는 리지의 목소리에 페르젠은 쓰게 웃으며 흐트러진 자신의 옷을 정돈했다.
아니, 정돈을 하던 도중 페르젠은 더이상 미묘하게 어긋난 대칭에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자신의 몸을 느끼며 옅게 몸을 떨었다.
베르트엠 엘퀴에 에뤼에라는, 영겁의 시간을 살아왔던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있기에.
강박증의 증세는 이전보다 더욱 심했어야 정상일 것이다.
물론, 그 부분에 대한 해결을 오복신들에게 맡겨 놓았지만.
작금의 상황으로 유추하건데, 틀림없이 리지는 그 또한 자신이라는 존재에게 귀속 시킨 것이리라.
“뭐해요?”
천박하게 두 다리를 벌려 고간에서 흘러내리는 핏물과 정액을 닦아낸 리지가 다소곤히 다리를 모은 뒤 페르젠을 향해 손을 뻗는다.
“안아줘요. 나는 혼자서 걸을 수 없으니까.”
자신의 육신을 다시금 창조했어도, 그에게 분질러졌던 다리는 그대로 놔두었기에.
리지는 킥킥 웃으며 페르젠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여유를 부릴 시간이 당신에게 있지는 않을 텐데.”
“네가 그렇게 말이 많은지는 처음 알았구나.”
“나도 당신이 이렇게 꼴사납고 볼품없는지는 처음 알았는 걸.”
단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옅은 한숨을 내뱉은 페르젠은 천천히 걸음을 내딛어 리지의 자그마한 몸을 품안으로 안아 들었다.
스륵.
그러자 능숙하게 자신의 목에 두 손을 휘감는 리지가 목덜미 쪽에 얼굴을 묻어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페르젠.”
“……”
“언젠가……”
이 몸으로 처음 보게 될.
“당신이 흘리는 눈물은…… 꼭, 나 때문이었으면 좋겠어.”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보랏빛 눈동자.
그것을 또렷이 내려다보며, 페르젠은 특유의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응. 그랬으면 좋겠네.”
묘하게 확신에 차있는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리지는 딱히 꼬리를 물고 늘어지지 않으며 눈을 감았다.
건네 받았던 그의 기억 속, 자신의 오빠인 로에르는 이렇게 말을 했었다.
자신이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이라는 남자의 불합리함이 되어 보이겠다고.
물론, 자신의 오빠인 로에르는 끝내 그것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그 의지를 이어 받아, 고독한 항해를 나서며…… 그의 불합리함이 되어 살아갈 것이다.
평생.
그의 곁에서.
죽는 순간까지.
영원히.
* * * * *
또각.
어느덧 자신의 품안에서 잠이든 리지가 새액새액 숨소리를 내뱉는다.
어찌 이리도 태연자약한 모습인건지.
하기야 여유가 없는 것은 자신이었지, 그녀가 아니었다.
그리고 돌아온 엘리알타 협곡의 중심에서 페르젠은 근처에 널브러져 조금씩 부패 되고 있는 에르네스 제국 병사들의 시신을 아련한 눈빛으로 훑다 가공할 양의 마력을 폭발적으로 방사했다.
그것은 겉보기에도 아폴리온 등급에 해당하는 경지를 까마득히 넘어선 신위.
그래, 일시적이기는 해도.
25년의 인생, 그에게 있어서 결코 극복할 수 없었던 강박증이라는 장애가 해소된 지금.
그는 아폴리온 등급의 다음 단계, 테르미엘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이윽고 그의 마력에 통제되는 에르네스 제국군의 시신이 제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부패가 진행될 만큼, 어디하나 성한 곳이 없는 시신들이었기에 당연히 사역을 위해 요구되는 마력의 양도 많았지만.
페르젠은 기꺼이 그것을 감내하며, 자신의 뒤로 그들을 한데 모았다.
그리고는 멈췄던 걸음을 내딛으며 읊조린다.
“가자.”
너희들의.
아니, 우리들의 고향으로.
* * * * *
결전을 앞두고 자신의 막사에 틀어 박힌 유리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울었던 탓일까.
목소리는 잠기었고.
더 이상의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술 기운이라도 빌려 이 슬픔을 몰아내고 싶었지만.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 때문에 그럴 수 없었고, 결국 유리엘은 페르젠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좌절과 고통을 온전히 직시해야만 했다.
예정되지 않은, 너무나도 이른 시일에 회군을 하는 본대와 맞닥트린 시점부터 안좋은 예감이 들기는 하였지만 필사적으로 부정을 하였는데.
결국 그 불안함이 기정사실화 되어버리니, 유리엘은 일순간 삶의 의지가 모조리 꺾여버렸다.
유리엘 웨인 데이나 알프레드.
세상에 태어나 오직 한 남자만을 위해, 한 남자만을 위한, 한 남자의 것으로 자라온 여인.
자신의 정체성과도 다름 없는 그가 사망하였으니, 사실상 그녀는 살아 있되 죽은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가장 먼저 그를 따라 자살한다는 선택지가 뇌리를 잠식하였으나……
그러지 못하고 살아 있는 이유는, 역시나 뱃속의 아이 때문.
이래서 어머니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제일 강인하다고 하는 것일까.
모든 것이 무너진 잔재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붙드는 가녀린 지지대.
그것에 비틀거리는 몸을 간신히 기대어 서있는 유리엘은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없는.
당신의 아이를 위한 어머니로 밖에 존재할 수가 없는.
그런 미래 만큼은, 정말 원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유리엘은 그 미래를 놓아 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품고 있는 이 아이만이, 이제는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그의 흔적이었으니까.
* * * * *
유리엘의 막사 앞.
안으로 들어서려다 포기한 라우라는 몸을 돌린 채,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렇게 나약해진 주제에.
유페미아에게 페르젠의 사망 소식을 알리지 말라는 배려는 무엇하러 한 것인지.
남을 배려하기 이전에, 본인부터 신경을 써야 할 판국이 아니던가.
“……”
물론,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라우라는 유리엘의 그 행동 동기를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했다.
아무리 질투하고, 시기를 하였어도.
결국 한 남자를 똑같이 사랑했던 사이.
그러니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더라도, 설령 허상이라 할지라도.
그녀를 페르젠이 살아 있는 세계에 놔두고 싶은 것이리라.
이미 그가 죽어 있는 세계에 살아 가고 있는 자신들이 느끼는 슬픔과 괴로움은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었으니.
‘망할 애송아.’
이럴 거면 왜 자신에게 희망을 주었고.
‘왜……’
사랑을 알려준 것이냐.
과부도 되지 못할 삶이라면.
차라리 자신의 손에 죽어, 요녀로 살아가게 해주는 것이 훨씬 나았을 텐데.
만월이 드리우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일.
라우라는 그 모든 것이, 참으로 부질 없다고 느껴버렸다.
* * * * *
또각.
무사히 본대로 합류하여 채비를 끝마친 엘리자베스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는 모습이 왜 이리도 어색하기만 한 건지.
문득 실소가 입밖으로 흘러 나온다.
하지만 그것을 덮어버릴 만큼 서러운 울음이 쏟아지려하자 엘리자베스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또 한 번, 브뤼테인의 희생 위에 서게된 자신들이.
도대체 무슨 자격이 있다고 마음 편히 그 슬픔에 잠겨 울음을 토해낸단 말인가.
그의 죽음을 추모할 자격도.
그의 죽음에 아파할 자격도.
결코, 자신들 황실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것이겠지.
때문에 스스로를 채찍질하여 표정을 갈무리하는 엘리자베스가 확고한 결의만을 머금고 거울 속에 비추어지는 자신을 바라보지만……
역시, 그럴 때 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과 함께 일그러지는 얼굴은 스며든 슬픔을 어떻게든 토해내려든다.
그에 엘리자베스는 걸음을 내딛어 막사의 문을 굳게 닫은 뒤, 간이 침대 위에 힘없이 걸터 앉아 고개를 숙였다.
“흐…… 읍!”
에르네스 제국의 황녀, 엘리자베스.
그 신분으로는 그의 죽음을 추모할 자격도, 그의 죽음에 아파할 자격도 없겠지만.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이라는 사내를 연모하였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임에도, 그 감정을 조금씩 키워온──한낱 여인에 불과한 엘리자베스라면.
그의 죽음에 아파하고, 그의 죽음을 추모할 자격이 있지 않을까.
자신에게 남은 페르젠이라는 사내의 잔재는, 오직 이 감정 뿐이었고.
이 감정을 더듬지도 못할 만큼 사랑이 잔인한 것이라면, 세상은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리라.
“페르젠……”
제국의 기둥이자, 제국의 충신으로서 그대는 참으로 좋은 사내일지도 모르겠지만……
“페르젠……”
한 명의 남자로서의 그대는, 참으로 나쁜 사내로구나.
* * * * *
3월.
그가 없는 봄.
그것을 기릴 여유도 없이.
그 계절을 짓밟으려드는 엘마르크 제국군이 당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