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253화 (253/260)

하늘을 머금는 어둠.

그 곁에 드리우는 달.

그리고 그 밑, 밤을 이불 삼아 엘리알타 협곡에 홀로 누워 있던 한 사내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

그토록 염원하던 이승으로 돌아왔는데.

정작 페르젠은 별이 가득 드리운 밤하늘을 보며 어떠한 감상도 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어떠한 감상도 품지 못했다.

뇌리를 잠식하는 건 오직 거슬리는 딱딱한 바닥과,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다는 1차원적인 사고.

스륵.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니, 여기서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흔적이 적나라하게 널려 있다.

특히나 저 너머로 드문드문 보이는 희미한 불빛은, 마침내 엘리알타 협곡을 점령하고 이곳을 교두보로 삼은 엘마르크 제국의 새로운 진지일 터.

“누구냐──!”

“……”

“신원을 밝혀라!”

범위를 넓혀 주변을 순찰하던 경계조들이 진지로 복귀하던 도중, 희미한 달빛이 내리비추고 있는 페르젠을 발견하고 목소리를 높힌다.

그에 페르젠은 아무런 말없이 그들을 응시하다, 자신의 제단을 쓸어내려 아공간에서 이사벨의 시신을 꺼내들었다.

“아……”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화사한 은발.

이미 죽어버린 시신임에도 변치 않는 그 아름다운 외모는 순식간에 병사들을 홀리게 만들었으나, 그것은 곧이어 경악할 충격이 대신 일깨워주었다.

경국지색이라 하여도 손색이 없는 미모를 가지고 있는, 역사에 길이 남을 희대의 마녀.

그리고 그 마녀의 시신을 사역하는──천칭의 문양이 아로새겨진 제복을 입고 있는 남성.

“부, 분명…… 주, 죽었을 텐데……?”

그래, 그들은 명계에 있어야 할 존재가 어째서 이승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그 말이 되지 않는 모순에 혼란스러워하며 뒤로 걸음을 물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 혼란스러움을 가라 앉히듯, 어둠을 내찢는 섬광이 강렬히 피어오르고……

파직──!

그 찰나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곳에 자리 잡은 건 새까맣게 그을린 바닥과 맡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느끼게 만드는 탄내 뿐이었다.

「 습격이다! 」

당연히 그 마력의 울림을.

주변으로 장렬하게 발산되는 뇌전을 적들이 보지 못했을리가 없었기에.

엘리알타 협곡의 주변으로 조금씩 불꽃이 드리우기 시작하며, 내려앉은 어둠을 몰아낸다.

“……”

명계에서 흘렀던 시간은 반나절.

이승에서 흐른 시간은 27일.

그 한달 간의 공백을 메꾸어주는 첫 만남은, 순수한 적의로 무장된 엘마르크 제국군이었다.

* * * * *

동이 떠오른다.

아침이 밝아 온다.

그리고 잿더미가 되어버린 엘마르크 제국군의 진지 가운데 서있던 페르젠은, 자신의 뺨에 묻은 선홍색 피를 스윽 닦아냈다.

이들이 덤벼왔기에 자신 또한 응수를 하기는 하였으나, 이토록 많은 사람들을 직접 살해하였음에도 미동도 하지 않는 자신으로부터 선명한 위화감을 느낀다.

특히 얼른 에르네스 제국 쪽으로 걸음을 돌려야만 한다고 자신의 기억은 말해주고 있지만, 정작 그 기억이 품고 있는 긴박함과 초조함은 이 몸뚱이에 전해지지 않았다.

마치 감정이 메마른 것처럼.

유리엘.

라우라.

유페미아.

제레미아.

에르네스 제국의 황실이 얽혀 있는 그 모든 기억들 조차도.

제 3자의 입장에서 관조하듯이, 닿을 수가 없는──너무나도 머나먼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런가.’

이것이 인과율을 비틀어 자신에게 간섭한 리지의 영향.

움찔!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페르젠은 이승으로 귀환한 이후 이 몸뚱이로 처음 감정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반쪽을 갈망하는 듯한 이끌림이기도 했고.

동시에 결코 결코 잃을 수 없다는 격렬한 애착심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페르젠은 정반대의 방향.

이승의 시간으로 약 한달 이전, 리지와 끝맺음을 고했던 곳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 * * * *

추위가 가득 서린 겨울이 조금씩 물러나고.

화사한 봄이 찾아오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3월.

눈덮혔던 설원은 새싹이 무르익은 대지를 선보이며, 이곳에서 끝맺음을 맺었던 인연이 새로이 이어진다는 걸 암시한다.

“하…… 큭!”

실제로 그곳에서 끝맺음을 고했던 리지의 흔적을 뒤쫓아 걸어온, 아니 달려온 페르젠은 폐를 찢어 발기는 듯한 괴로움을 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얼마나 오랜시간, 잠도 자지 않고 달려온 것인지.

그의 옷에는 흙먼지가 가득했고, 특유의 흑발은 볼썽사납게 흐트러져 꼴볼견의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페르젠은 자신의 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신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눈앞, 봄의 완연한 태동을 앞두고 있는 나무 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리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이승으로 돌아와 내 앞에 서게 될 당신의 첫모습이 어떠할지…… 이곳에서 기다리며 줄곧 상상을 했었는데.”

“……”

“내 상상보다 훨씬 더, 볼품없고 추한 그 모습이 잘 어울리네.”

작별 전, 처참하게 망가졌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말끔한 복장과 특유의 보랏빛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며, 요염한 붉은 입술로 비웃음을 선보이는 리지가 조롱을 일삼는다.

하지만 페르젠은 그 목소리에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지친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여린 손목을 으스러지듯 붙잡았다.

이렇게 바로 코앞에서 그녀를 보고, 또 만지고 있으니 더더욱 선명히 느껴진다.

자신의 몸이 그녀를 갈망하고 있는 충동을.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식욕, 성욕, 수면욕이라는 3대 욕구를 가볍게 웃도는──마치 생존본능과도 같은 아주 원초적 욕망이었다.

“읍!”

그걸 온전히 직시한 끝에, 페르젠은 고개를 숙여 리지의 입술을 게걸스레 범했다.

사내에게 저항해야 한다면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지.

사내에게 호응해야 한다면 어떻게 호응해야 하는지.

그런 것을 하나도 모르는 여인의 입술을 강제로 벌리고, 치열을 훑으며, 설육을 희롱한다.

배려한다는 느낌은 하나도 없었고.

순수하게 자신이라는 존재를 갈구하려고만 드는 행위.

그에 치솟는 불쾌함을 굳이 억누르지 않고, 리지는 고개를 뒤로 내뺐다.

“흐읍!”

그러자 자신의 두 손을 붙들고 있던 커다란 손이 순식간에 머리채를 휘어 잡고 뒤통수를 단단히 받친다.

도망갈 곳도 없고.

딱히, 도망갈 의지도 없는데.

그는 무엇이 그리도 두려운 건지.

압도적으로 나는 체격차에도 필사적으로 굴며, 자신의 몸을 단단히 옭아매어 온다.

분명, 누가 봐도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페르젠인데.

오히려 여유를 품으며 그를 비웃고 있는 것은 리지였다.

투둑!

곧이어 우악스러운 손이 그녀의 옷을 찢어 발기고.

더욱 밑으로 내려가는 페르젠의 입술은 그녀의 목덜미와 아담한 가슴을 범했으며.

어느새 바지 밖으로 나와 껄떡거리는 흉측한 성기는……

찌붑!

앙증맞게 다물린 분홍빛 음부를 거칠게 헤집고, 그 안쪽으로 깊숙히 파고 들어가 그녀를 탐했다.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체온, 향기, 박동, 온기의 모든 것이.

강제로 잠궈져 있던 그의 모든 것들을 깨워내기 시작한다.

강박증에 몸부림쳤던 고통과, 그것에 타협할 수 밖에 없었던 좌절.

시엘 미드포드라는 존재를 통해 느꼈던 긴박함, 초조함, 불안감.

유일한 평온이자 안식처가 되었던 유페미아를 향한 소유욕과 그녀를 통해 깨달았던 사랑.

자신을 위해 한 평생을 바쳐온, 유리엘에게 품은 애정.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지니고 있었던 라우라에게 느낀 동질감.

가문의 아픈 손가락인 자신이더라도 떳떳히 동생이라는 존재로 바라봐준, 제레미아를 통한 가족애.

못난 자신이더라도 의지하고,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바쳤던──황실에 대한 충의.

그래, 25년.

페르젠이라는 인간으로 살아오며 느꼈던 기억에 담긴, 그 감정의 모든 것들이.

온전히, 그의 몸에 새겨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자신이 잊었던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잃었던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떠올린 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되찾은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명확하게 깨닫게 된 페르젠은 더더욱 리지라는 존재를 갈구해나갔다.

철퍽!

“아윽! 아…… 흑!”

그리고 오고가는 감정의 교류가 조금도 없는 교접 속, 고통이 억눌린 신음을 입밖으로 토해내고 있는 리지는 어느 때 보다 추하게 허리를 흔들고 있는 페르젠을 보며 그의 목에 두 손을 휘감아 목을 끌어 당겼다.

“읏……! 흐…… 아…… 하핫!”

인과율을 비틀어 새로 창조된 몸은 다시 한 번 그에게 처녀를 내주었고.

무식한 크기의 흉물에 쑤셔 박힌 음부는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도구처럼 다뤄지며, 애처로울 만큼의 핏물을 자아내지만……

리지는 이토록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는, 굶주린 거렁뱅이가 허겁지겁 음식을 퍼먹는 듯한 그의 표정에 일말의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고통으로 찌푸려지는 얼굴 위로는 오히려 선명한 비웃음만이 자리를 잡을 뿐.

꾸국!

“끅……!”

격식도.

예의도.

품격도 없이.

필사적으로 자신을 탐하는 그가 여전히 부족함을 느낀다는 듯, 흉물을 거칠게 전진시키며 자신의 자궁을 압박해온다.

그에 리지는 아랫배가 더부룩한 불쾌함을 느끼면서도, 가녀린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아 주었다.

마치 음식을 구걸하는 거지에게 먹던 것을 던져 주는 듯한, 얼마든지 자신이라는 존재를 갈구해보라는 조롱섞인 배려.

꾹!

꾸국!

이윽고 교접에 있어서 훨씬 편한 자세가 되자, 페르젠은 망설임없이 자신의 체중을 한가득 실었고.

꾸득!

그 행동은 본래는 침범할 수 없는 자궁 안으로, 흉물의 앞 부분──귀두 끄트머리를 서서히 들어차게 만든다.

“하……! 큿!”

밑둥을 감싸안는 질주름과, 자궁 안으로 파고 들어 그곳에 걸린 귀두에 전해지는 강렬한 조임은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부류의 쾌락이었기에.

페르젠은 꼴사나울만큼 헐떡이며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리고 그런 페르젠의 모습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스륵.

그의 목을 휘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가까이 얼굴을 들이민 리지는, 자신의 보랏빛 눈동자에 볼썽사나운 페르젠의 모습을 아주 선명히 새겨 담았다.

지금까지는 비워졌던 감정들을 되찾기 위한 발버둥이었을지 몰라도.

현재의 모습은 순수하게 성욕이라는 쾌락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이었던터라, 리지는 적잖은 충족감을 느꼈다.

이것은 유리엘도, 유페미아도.

감히 그에게 해주지 못한 경험일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육체적 구조상.

애당초 불가능의 영역이니까.

이것은 두 번째로, 오직 그와 자신만이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기억일까.

“아핫.”

문득, 웃음을 터트리는 리지가 페르젠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어떻게 이리도 서로가 추악하고, 천박한 경험만을 상대방에게 새겨 넣는지.

물론, 자신의 자궁조차 한 사내의 쾌락의 도구로 탈바꿈 시킨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추하게 흐트러지는 페르젠의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

울컥!

곧이어 자신의 자궁에 자리를 잡은 그의 흉물이 거센 박동과 함께 조금의 손실도 없이 걸쭉한 씨를 배설하기 시작하자 리지는 킥킥 웃으며 희미한 신음을 흘렸다.

“아……”

볼록 치솟은 자신의 아랫배에 피어오르는, 화상이라도 입은 듯한 뜨거운 감각.

그리고 빈틈없이 꽈악 메꾸어지는 듯한 포만감과 묵직함.

그의 정액이 자신의 자궁 안에서 바글바글 거리고 있을 걸 생각하니, 반사적인 역겨움이 치밀어 오르지만……

리지는 편히 그의 밑에 내려 깔린 채 호흡을 고르며 비아냥 거리는 듯한 아름다운 눈웃음을 선보일 뿐이었다.

이쯤되면 틀림없이 그도 깨달았으리라.

인과율을 비튼 자신이 무엇을 바꾸었고.

인과율을 비틀어 함께 이상으로 돌아온 자신이, 그에게 있어서 어떠한 존재가 되었는지.

그래, 페르젠이라는 인간의 삶이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라면.

리지라는 여인은 그러한 페르젠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통로이자 열쇠였다.

기껏 삶을 이어 나가는 주제에, 그 삶의 모든 것이 고작 한 사내의 등대라는 것은 잔혹할지도 모르겠으나.

이것이 우유부단한 관망함을 일삼았던 자신에 대한 속죄이자, 스스로의 의지로 내딛는 선택이었고.

세상에서 제일 더럽고, 추악하고, 비겁하고, 비열한 헌신을.

자신에게 가장 열정적이고, 정성스레 해온 악당에게 보내는 그녀의 보답이자 헌사였다.

“페르젠.”

“……”

“나의 악당.”

아니.

영원히.

“당신은 나의 악당으로 남아 있어 줘.”

당신이 그럴 수 있게끔.

“내가, 당신의 곁에서 죽는 그 순간까지 함께 할 테니까.”

자신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이어 나간다는 건.

동시에 악당의 삶 또한 함께 연명한다는 것.

그에게 있어서 리지는 모든 것을 위한 유일한 것이 되었고.

리지에게 있어서 그는, 유일한 것을 위한 모든 것이 되었다.

이로소……

비틀렸던 천칭의 균형이 맞추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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