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쥐어 뜯고.
머리를 내려 치고.
뺨을 후려 갈겨도.
리지는 무엇하나 자신의 이 울분을 해소하지 못하는 현실에 서서히 식어가는 감정을 느끼며 공허한 눈빛을 머금었다.
오랜 시간 이어지는 감정의 배설에 단정했던 그의 모습은 꼴사나울만큼 흐트러져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것에 일말의 통쾌함도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에 리지는 두 손을 뻗어 페르젠의 뺨을 붙잡은 뒤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고서는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당신에게 그 지독한 강박증을 다시 꽃피울거야.”
그리고.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그들과 그녀들을 만지지도 못하게 만들 거야. 당연히 온기를 전해 받을 수도 없겠지.”
“……”
“목소리 또한 들리지 않을 것이고, 전하는 것도 할 수 없을 거야.”
글로 적어서 의사를 전달하는 행위 조차도 불가능하게 만들겠다며 리지는 페르젠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볼 수는 있겠지만 얼굴을 볼 수는 없을 것이고, 당신 또한 비추어지겠지만 얼굴은 드러나지 않을 거야.”
“……”
“그토록 좋아하는 그녀들의 향기를 맡을 수 없을 것이고, 그녀들에게 당신의 향기가 뒤섞이는 일도 없을 거야.”
존재 하되, 존재하지 않고.
살아 있되, 죽은 사람처럼.
오직 그들의 곁을 망령처럼 배회하기만 하며, 아무런 교감도 느낄 수가 없는.
그렇게 산송장과도 같은 삶을 어디 한 번 살아보라며 리지는 페르젠의 뺨을 꾸욱 붙잡고 자신의 보랏빛 눈동자를 특유의 붉은 눈에 가까이 들이 밀었다.
인연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교감이 줄어들수록 함께 옅어지는 것.
그러니……
서로가 서로의 온기를.
서로가 서로의 향기를.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조금씩 잊어가게 된다면, 인연을 구성하는 각자의 추억 또한 물거품처럼 사라지리라.
그것을 지독한 강박증에 시달리며, 손을 뻗으면 당장이라도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무력하게 지켜만 봐야하는 페르젠은 어떠한 반응을 보여줄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모든 것이 되었고.
그 모든 것이 다시금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순간, 그래.
리지는 처음으로 그가 “후회”라는 것을 하길 바랐다.
그리고 페르젠은 리지의 그러한 말을 듣고,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그러길 바란다면, 그리하도록 하거라.”
하.
비틀려 올라가는 리지의 새빨간 입술이 명백한 비웃음을 머금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뺨과 입술 주변을 지분거리며 조롱을 표한다.
“웃기는 사람.”
“……”
“한낱 동화나 소설처럼, 그들과 그녀들이 끝까지 당신을 놓지 않고. 또 잊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한 믿음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 믿음이 부수어진다해도, 페르젠은 괜찮다고 생각을 했다.
당연히 그 순간이 온다면 상상할 필요도 없이 괴롭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펼쳐지리라.
그러나 약속을 했지 않던가.
설령 어떠한 형태가 되었든, 반드시 곁에 있어 주겠다고.
물론, 자신을 잊고 등을 돌린 채 살아가는 그녀들과 그들의 모습은 지독한 슬픔을 불러 올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은 울부짖으며 들리지도, 닿지도 않을 분노를 토해낼지도 모르겠지.
나아가 리지의 말대로, 만신전에 혼을 묶어둘 필요도 없이 희미해진 인연에 회의감을 느끼며 후회를 할지도 모르리라.
그래도 꿈이 후회가 될 때, 인간은 비로소 늙었다는 걸 체감하는 법이라 하였다.
기사를 꿈꾸던 소년은 성인이 되어 그것이 부질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공주를 꿈꾸던 소녀는 성인이 되어 그것이 동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는 걸 알게 되며.
청년이 된 소년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손에 물 하나 묻히지 않는 행복한 삶을 약조하고.
처녀가 된 소녀는 그 말을 고스란히 믿으며 장미빛 미래를 상상한다.
하지만 늙어가는 청년은 점점 투박해지고 굳은살이 가득 새겨지는 아내의 고왔던 손과, 쭈글쭈글한 주름이 자리 잡기 시작하는 얼굴을 보며 그 또한 헛된 것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고.
늙어가는 처녀 또한 가혹한 현실 속에서 모든 것을 물리쳐줄 것만 같았던 남편이 가정을 유지하는 것으로만으로도 급급한 모습에 상상했던 장미빛 미래를 고이 접어 마음 속 어딘가에 묻어 둔다.
그처럼 꿈이 후회가 되어버리는 아픔이라는 건, 시간의 흐름에 구애 받지 않는 자신에게 필멸의 삶을 살아왔다는……
그녀들과, 그들과 함께 늙어 갔다는 명확한 증거가 되어 자리를 잡으리라.
한 마디로 페르젠은 영겁의 시간 속에 속해 있는, 인간으로서 살아온 시간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설령 견디기 힘든 아픔이라 하더라도.
“……”
그렇게 자신의 말을 전해들은 리지가 두 손을 천천히 떼어내고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잠시 뒤 페르젠은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그녀를 안아 들었다.
스륵.
조금의 저항도 없이 실풀린 인형처럼 자신의 손길에 몸을 맡기는 리지.
공허한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는 어디를, 또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하기야, 여기까지 왔다면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으리라.
자신과 그녀가 악연을 맺어 보내온 9년의 시간.
그 중에서도 숨김없이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오늘이라면.
서로가 서로의 선택에 있어서 오판은 없을 테니.
“……가지.”
페르젠이 걸음을 내딛는다.
어느덧 반나절의 시간이 흘렀다.
* * * * *
「 그러면…… 열겠네. 」
페르젠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천계의 신들은 짙은 한숨 끝에 각자가 가지고 있는 카르마를 대량으로 소모하여 명계의 문을 열었다.
이승에서 여는 명계의 문과 다르게, 이곳에서 여는 명계의 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인과율의 비틀림──카르마를 요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예외적인 몇몇 사안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외부 계층은 이승과 단절 되어 간섭하는 일 자체가 허락 되지 않았기에.
그래서 외부 계층은 시간의 흐름 또한 이승과 달랐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신들이 이승을 관조하다 인간들에게 애착을 품지 못하게끔, 금방 태어나고 금방 죽는 것으로 비추어져야 했으니까.
때문에 페르젠은 이들에게 반나절이라는 시간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렇게 역으로 개방된 명계의 문을 통해 카르마를 다시금 소모하는 천계의 신들이 페르젠의 바람을 조율하기 시작하자……
“……”
리지 또한 그에게 넘겨 받은 대량의 카르마를 사용하여 함께 동참하였다.
꿈틀.
「 …… 」
한낱 인간의 영혼이 자신들에게 간섭해오는 건 굉장히 불쾌한 일이었으나, 리지가 페르젠에게 내리는 처벌은 돌려 말하자면 자신들의 카르마 소모를 대폭 줄여주는 일이기도 했기에 천계의 신들은 애써 그 감정을 표정에서 지워냈다.
심지어 리지가 보유하고 있는 건, 본디 페르젠이 가지고 있던 카르마의 절반 가량.
즉, 그만큼 페르젠의 역량이 줄어드는 것이라 봐도 좋았기에 어찌 되었든 본래의 목표는 불완전하게나마 달성한 것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천계의──오복신들의 생각을 모르는 리지는 열린 명계의 문 앞에 서있는 페르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인간의 삶에 대한 그의 관점은 리지 입장에서 공감하는 게 힘들었다.
마치 아무렇게나 그려진 유명 미술가의 작품을 보고 그럴싸한 감상을 내뱉는 귀족들의 품평 같았다.
때문에 리지는 페르젠이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무료하게 살아온 영겁의 시간 속에 강렬한 자극이 되어준 인간의 삶이라는 걸 신기하게 여기고 있는 것으로 비추어졌다.
달콤한 설탕을 처음 먹어본 아이처럼.
신기한 것에 대한 흥미를, 그저 소중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
그래서 리지의 입꼬리는 조금씩 말려 올라가 그에게 조소를 선보이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입꼬리는 다시금 내려와 무표정을 그려냈다.
‘……’
사실은 그가 그런 식으로 착각하고 있기를, 자신은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좌절과 고통 끝에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좌절과 고통 끝에 응집된 아픔이, 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의미가 된다면.
과연, 그것을 벌이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조차도 그에게 허락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면.
자신은 도대체 어떠한 수단을 취해야 하는 것인지.
자신이 거울 앞에 섰을 때, 페르젠이 비추어지지 않고.
페르젠이 거울 앞에 섰을 때, 자신이 비추어지기를 바랐다.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그가 자신의 모든 걸 답습하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자신이 그의 거울이 되지 않는 이상에야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리고 왜 그러지 않냐는 자문에 대한 자답은 처음처럼, 완전히 똑같이.
피해자인 자신이 그와 똑같은 가해자가 되는 것으로 아픔을 돌려주는 건, 너무나도 원통하고 억울하다는 도돌이표를 찍는다.
꾸욱!
하지만 이쯤 되니 리지는 스스로 자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생각의 순환 자체가, 반사적인 방어기제이자 필사적인 자기변호라는 것을.
물론, 그 생각 자체가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벌 받은 않은 가해자를 보고 직접 나선 피해자가, 또 다른 가해자가 되는 것은 충분히 슬픈 일이었으니까.
다만, 해당 경우의 피해자는 그 결과를 고려했음에도 자신의 복수심에 손을 들어준 것일 터.
그리고 리지 또한 페르젠에게 받은 불합리함을 생각한다면, 복수심이 이성을 찍어 눌러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방어기제와 자기변호를 통해 스스로의 복수심을 외면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이 지독한 자기 합리화 자체가 해답이라 봐도 무방하리라.
시작은 좌절과 절망속에서 싹 틔운 증오와 분노로 살아 왔으나.
그 감정은 시험을 치르는 과정에서 타국의 습격을 받고, 환몽 결계에 갇혔을 때 산산히 부수어졌다.
외부적인 압력이 너무나도 커다랬다고 변명을 하려면 할 수는 있었지만, 결국 페르젠이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한층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시점에서 그것이 무너졌다는 건 리지가 본인의 의지로 자기 자신과 타협을 했다는──현실에 안주하기로 선택했다는 증거일 터.
심지어 복수를 위한 일념일로를 거두어 놓고.
그녀는 자신의 오빠들이라면 복수의 성공과 안락한 현실의 안주를 전부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는, 허황된 희망으로 포장 되어진 방관의 자세를 취했다.
결국, 그 결말이 어떠하였나.
억지로 조타석을 빼앗아 방향을 돌리지도 않은 주제에, 난파된 배가 가라앉는 것을 보며 울부짖기만 할 뿐이었다.
절망으로 얼룩진 삶을 선사한 건 페르젠이더라도.
거기서 한줌의 행복조차 얻지 못한 건, 필시 자신 때문이기도 하겠지.
아니, 원래는 그러한 행복조차 필요가 없는 복수를 다짐했던 삶이었는데.
홀로 한 걸음 물러나 현실에 안주하려는 선택을 하였고.
그런 주제에 추악한 욕심을 부려 같잖은 방관의 자세를 취했던 터라, 리지는 이토록 환멸스러운 자기방어와 자기변호를 이어 가는 것이었다.
사실은 선택이라 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자신이 무얼 했다고.
복수도.
잿더미 위에 미약한 행복을 쌓아 올리려는, 현실에 안주하는 타협조차 죄다 로에르와 세자르에게 맡기지 않았던가.
구역질이 나올 정도의 우유부단함이었으며.
그것은 악당을 위한 명품 조연을 만들어 냈다.
때문에 리지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가문이 맞이한 그 결말에.
……차마, 떳떳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명계에서 부여 받은 업이자, 그녀의 유일한 죄 또한 그것이었으니 두 말이 필요가 없으리라.
한 마디로, 그녀는──리지 폴 리아나 클로디아는.
그러한 자신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와 똑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억울 한 게 아니라.
그와 똑같은 존재가 되어, 더 이상 그를 원망할 수 없고.
그와 똑같은 존재가 되어, 더 이상 그의 피해자로 남을 수 없는.
자신의 못남을 외면하고, 그 책임까지 모조리 페르젠이라는 악당에게 떠넘길 수 없는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아……”
그리고 그 끝에, 리지는 선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유리엘.
라우라.
유페미아.
제레미아.
에르네스 제국의 황실 못지 않게, 자신 또한 다른 의미로 그에게 처절히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 * * * *
“하…… 아하하……”
맴도는 무거운 침묵 속, 홀로 실소를 터트리는 리지가 자신에게로 모여드는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올린다.
꽈악!
동시에 페르젠에게 넘겨 받은 대량의 카르마를 한줌도 남기지 않고 깔끔히 소모하여, 그 동안 조율되어진 인과율을 모조리 비틀어 버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완공을 앞두고 있던 건물을 가라 앉히고, 다시금 새로운 건물을 만들어내는 행위 와도 같았기에……
「 …… 」
일순간 천계의 오복신들은 넋나간 표정을 지은 채 리지를 쳐다보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조율한 결과가 페르젠이 원치 않는 것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자신들에게서 다시금 카르마를 소모시켜 재조율을 요구하지 않겠나.
그러나 페르젠은 재조율 된 인과율의 비틀림을 보고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늘 그랬듯이.
위압적이고, 고고한 자세로 리지의 앞에 서있을 뿐이다.
스륵.
그리고 리지는 그런 페르젠을 향해 천천히 다가가, 그의 코앞에서 가느다란 두 손을 뻗어 목을 휘감았다.
그 자태는 마치 나무 위에 앉은 매를 사냥하기 위해 다가가는 뱀 같아, 지켜보고 있던 오복신들은 묘한 긴장감에 사로 잡혔다.
“내게서 살아갈 의미를 전부 빼앗은 당신이……”
“……”
“결국은, 내게 있어서 마지막 삶의 의미 였다는 게 참으로 모순적이네.”
그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과거의 자신.
그의 피해자로 남기를 원하는 현재의 자신.
그리고 그 가운데서 비명을 지르는, 가문과 가족으로부터 떳떳하기를 바라는 자신.
그래, 그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니 리지는 페르젠으로부터 건네 받은 비틀린 천칭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 명확히 깨닫게 되었다.
가문과 가족이라는 배가 난파 되고.
망망대해 위에 정처 없이 떠돌기만하던 자신에게 목적이라는 것이 생긴 것이다.
때문에 리지는 다시금 자신만의 배를 건조해 그 위에 올라타 고독한 항해를 이어 나가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그의 피해자가 되어버린 과거의 자신에 대한 위로였으며.
동시에 그의 피해자로 남기를 원하는 현재의 자신에 대한 꾸짖음이기도 했고.
한걸음 물러나 복수도, 미약한 행복도 스스로 움켜쥐려 하지 않았던 우유부단한 관망에 대한 속죄였다.
“페르젠.”
“……”
“나의 악당.”
그런 당신이, 내 삶의 의미이자 전부라면.
“기꺼이 나 또한, 당신의 모든 것이 되어줄게.”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리지 폴 리아나 클로디아라는 여인의 선택이였다.
그와 자신을 저울질 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있어서 자신이라는 존재를 저울질 하게 만드는.
“후회하지 않겠느냐.”
리지가 재조율한 내용을 페르젠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은 저 명계의 문을 넘어, 이승으로 귀환을 해봐야지만 알 수가 있겠지.
하지만 어렴풋한 짐작 정도는 되었기에, 페르젠은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확실한 의사를 물었다.
그에 리지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소리 없는 웃음을 선보이다, 페르젠의 뺨을 다정하게 붙잡았다.
“후회하지 않아. 아니, 유일하게 내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야.”
“그러느냐.”
“당신답지 않게 뜸을 많이 들이네.”
요염하게 훑듯, 그의 뺨으로부터 손을 치워내는 리지가 한걸음 물러나 왼손을 내민다.
“가요.”
“……”
“세상에서 제일 더럽고, 추악하고, 비겁하고, 비열한 헌신을…… 내게 가장 열정적이고 정성스레 해온 당신에게.”
그 헌사를 들려 줄테니.
“……그러지.”
이것은 분명 독이든 성배이리라.
하지만 그것을 마실 수 밖에 없음을 알았기에.
페르젠은 희미한 망설임 끝에 그녀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명계의 문 너머, 이승으로 에스코트를 하기 시작했다.
일순간 자신에게 춤을 신청했던, 어린 날의 그녀가 비추어지는 것은 착각일까.
그리고 그렇게 떠나가는 페르젠을 향해, 근처에 모여 있던 심층의 괴이들은 저마다 고개를 숙이며 일제히 입을 열었다.
「 좋은 유희가 되시옵소서. 」 라고.
콰득!
그러자 페르젠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본보기로 몇몇 괴이들의 존재를 소멸시키며 명계의 장부에서 이름을 지워버렸다.
명계의 장부에서 이름이 지워지는──무(無)가 되는 소멸의 공포는 오랜 시간 페르젠이 괴이들에게 각인을 시켜 놓은 것이기에.
당연히 심층의 괴이들은 본능적으로 벌벌 떨며 그에게 비참하리만큼 조아렸다.
그리고 페르젠은 멈췄던 걸음을 내딛으며, 조금전 괴이들이 했던 말을 친절히 정정해주었다.
「 이것은 유희가 아니라, 삶이라고. 」
그래, 베르트엠 엘퀴아 에뤼에.
영면에 잠들지 않는 그들의 왕은……
다시 한 번, 짧지만 기나긴 잠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