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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250화 (250/260)

한참을 걷던 페르젠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명계의 1층 위에 존재하는, 명계에 소속되어 있지만 독립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는 개별 구역──이승의 모든 존재들이 윤회를 거쳐가는 장소.

보유한 업보에 따라 혼들은 여기서 형벌을 집행 받으며, 그 시간대에만 자아를 유지하고.

그 외의 시간대에는 넋을 잃은 망령이 되어 이곳을 배회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끝나고 나면 다시 윤회의 굴레에 들어가 삶과 죽음을 순환하는, 세계의 섭리가 정해둔 필멸의 톱니바퀴가 되어 인생을 살아갈 뿐이었다.

“……”

그렇게 자신의 앞에서 이곳을 배회하는, 리지의 혼을 바라보며 페르젠은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흑마법사가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것.

그 행위에 어째서 괴이들이 단숨에 반응을 하겠는가.

필멸의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이 그 삶 동안 쌓은 업보 중에서도 카르마로 변환할 수 있는──악업을 차감시키는 선업만을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해당 행위를 통해 명계로 흘러 들어온 인간의 영혼은 아무런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어야 곧장 윤회의 굴레에 들어가는 게 가능했다.

그게 아니고서는 지금처럼 생전의 모든 과오를 형벌로 받아낼 뿐.

아…… 아……

배회하는 모퉁이 앞, 길을 가로 막은 자신에게 부딪쳐 감정 없는 목소리를 내뱉는 리지의 모습에 페르젠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죽고 나서도 나와 재회하는 건 네게 있어서 달가운 일이 아니겠지.”

아니, 달가운 일이기는 할 것이다.

자신 또한 저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필멸의 시간 속에 자리 잡은 부품중에 하나였다면.

하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여기서 그녀의 자아를 깨워봤자 지독한 무력감과 좌절감만을 느끼겠지.

자신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는, 사실상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수단을 최선의 수단으로 사용했는데.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절망하지 않는 게 가당키나 하겠나.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자신이 그런 점을 신경 써야만 하는 것일까.

그녀의 처지에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도 우스웠고.

애당초 이곳에서 그녀와의 끝맺음을 어떻게 맺고 싶은 건지, 그것조차 페르젠에게 있어서는 의문이었다.

답을 바라고 있기에 자신은 이곳에 있는 것이지만, 정작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는 갈피조차 잡히지 않는다.

아니, 내심 바라고 있는 답은 있었다.

리지가 자신을 포함한, 세자르와 로에르의 모든 형벌의 시간을 끝내고 윤회의 굴레에 집어 넣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

그것으로 이 관계가 명확한 끝맺음을 고했으면 좋겠다고, 페르젠은 은연중에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하는 것과 별개로, 이 지독하리만큼 불쾌한 감정은 무엇일까.

의문은 짧았다.

아마도 이것이 지금까지 줄곧 외면해오던 죄책감이라는 감정이리라.

이승에서 살아가던 시간 동안은 악당의 굴레를 고수하는 것만이 살아남기 위한 최선의 길이었으나,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마음 한 구석에 처박아두고 마주하지 않았던 죄책감이 이제와서야 몸부림을 치는 것이겠지.

한 마디로 그 감정은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천칭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대등한 천칭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수긍하지 않으려 드는 건, 최초의 발단 자체도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기 때문일 터.

인간의 육신을 통해 이승으로 환생을 한 건, 명확한 타의었으니까.

“……”

하지만 그 지독한 자기합리화 끝에 도달하는 종착점은, 자신과 마찬 가지로 그녀 또한 감당하지 않아야 할 불합리함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그 대가를 천계의 신들로부터 받아 낸다고 한들.

리지는 그 대가를 누구로부터 받아낼 수가 있겠나.

사실은 여기에 의문을 가지는 것 자체가 비겁한것이겠지.

그 대상은 자신 밖에 없을 테니까.

뿌리는 그들이었을지 몰라도, 그녀가 짊어지고 있는 불합리함은 결국 자신으로부터 파생된 갈래.

먼지의 티끌만한,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어도 페르젠이라는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배우지 않았던가.

죄는 죄였다.

거기에 구차한 미사여구는 붙을 수 없는 것.

그 사실을 부정한다는 건, 이승에서 보내온 페르젠이라는 인간의 삶 또한 부정한다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자신이 선택했던 건 결국, 악업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아 나가는 악당의 굴레였으니.

‘이렇게 될 것 이었다면……’

조금만 더 뻔뻔하게 살아 나갈 걸 그랬다.

죽어서 명계에 오게 된다면, 죄값을 치르겠다는 말을 너무 가볍게 한 게 아닌지.

툭.

그렇게 문득 스며나오는 자조섞인 웃음을 머금으며, 페르젠은 리지의 이마를 가볍게 두드렸다.

* * * * *

짙은 안개가 내려앉은 숲속을 맴돌듯.

아늑한 심연 밑으로 가라앉아 반사되는 햇빛조차 보지 못하듯, 몽롱하기만 했던 정신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리지는 반사적으로 흠칫 몸을 떨었다.

왜냐하면 이 뒤에 기다리는 것은 되새김을 하기도 싫은 고통의 연속이었기에.

“아……”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형벌은 집행되지 않았고.

오히려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스한 온기라는 것에 리지는 묘한 안도감을 품으며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

그 끝에 자신의 두 눈에 담기는, 페르젠이라는 사내의 모습에 리지는 오랜시간 넋을 놓고 있다……

“하…… 아하하……!”

실소를 내뱉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번에 집행되는 형벌일까.

“하…… 아하…… 아…… 아아아악!”

아니, 제발 그러했으면 좋겠다고 리지는 크게 울부짖었다.

자신을 감싸안는 그의 온기.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그의 촉감.

이 모든 것이 집행되는 형벌이 아니라면, 이 세계는 도대체 어디까지 자신에게 잔혹하게 굴려는 것일까.

“리지.”

“……”

“오랜만이구나.”

“크…… 크흐흐……! 크흑……! 흐…… 흐아하…… 아하하!”

형벌이 집행 될 때만 자아를 되찾았기에, 리지는 자신이 여기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 알지는 못한다.

그래도 지금 이 광경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혼령에 불과했기에 그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나, 그외의 모든 사실이 불행으로 얼룩져 있기에 리지는 한참을 실소 하다 옆으로 고개를 툭 숙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친, 새끼……”

자신이 도대체 무얼 그리 잘못을 했다고.

자신이 도대체 무얼 그리 죽을 죄를 죄었다고.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쫓아, 명계까지 따라 온단 말인가.

“미친놈…… 당신은 미쳤어──! 미쳤다고──!”

“……”

“여기까지 나를 찾아와서 원하는 게 뭐야? 내 눈알을 파내려 그랬어? 내 귀를 자르려 그랬어? 내 다리를 분지르려 그랬어? 그것도 아니라면 우는 모습을 보고 싶었나?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 앞에서 추하게 오줌이라도 지리는 것? 하…… 아하하! 안타깝게 되었네. 혼에 불과한 나는 그래 줄수가 없는 걸.”

“……”

“그래 줄 수가 없다고!”

“……”

“그러니까 제발 돌아가…… 죽어서까지도 추하고 비참한 내 모습을 봤다면! 그걸로 만족하고 꺼지란 말이야──!”

처절함이 눌러 담긴 목소리.

좌절과 절망으로 얼룩진 보랏빛 눈동자.

그 모든것을 잠자코 마주하다, 페르젠은 두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네가 말하지 않았더냐.”

어디 한 번, 명계의 법도를 비틀 수 있으면 비틀어 보라고.

그리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죽어서 명계에 가게 된다면…… 그제서야 죄값을 치르겠다고.”

구차하게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으마.

이승에서나 지금이나, 나는 용서 받을 생각이 없었고.

너 또한, 나를 용서 할 일이 없을 테니.

스륵.

그녀의 뺨을 움켜쥐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카르마를 응집시키는 페르젠이 이마를 한 번더 가볍게 두드린다.

그러자 그가 품고 있던 카르마와 함께, 명계 일부의 기억, 페르젠이라는 인간이 살아온 생애가 리지에게 넘어가며……

“끄…… 아……! 아아아악!”

혼을 찢어 발기는 듯한 강렬한 통증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그에 페르젠은 리지를 조심스레 품에서 내려 놓은 뒤, 근처에 주저 앉아 해당 과정이 안정화 되는 것을 천천히 기다렸다.

절반 가량의 카르마를 넘겨주었기에, 안정화가 된다고 한들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또, 어느 형태로든 소모하는 것은 가능해도 발산은 하지 못하리라.

그것은 인간의 혼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한계였다.

그로인해 이곳에서 자신을 소멸 시킬 수 없다는 것도 넘겨 받은 기억을 통해 리지는 자연스레 깨닫게 되겠지.

……이것을 비겁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것이 자신이 선보일 수 있는 최선의 합당함이고 합리적임이었다.

애초에 이 정도 비겁함은 괜찮지 않은가.

자신은 악당이었으니.

‘그러니 리지.’

깨어나 눈을 뜨게 되면, 그 누구도 형벌을 내릴 수 없는 나에게.

……네가, 유일한 천칭이 되거라.

악연의 시작은 나였을지 몰라도.

그것을 매듭 짓는 건, 네가 옳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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