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249화 (249/260)

그다지 달갑지 않은 풍경이다.

오랜만이라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너무나도 아늑한 세월을 이곳에서 살아왔고, 그 시간에 비하면 이승에서의 시간들은 티끌에 불과했으니까.

“……왔는가.”

뒷방으로 물러난 노인네처럼, 허름한 차림새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한 명의 사내를 향해 페르젠은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소멸하지 않았나.”

“일말의 카르마는 남아 있으니 말이지.”

자신 이전, 이 명계를 다스리던 주인.

이제는 이름조차 사라진 그를 보며 페르젠은 피식 웃었다.

“네 놈들의 수작질은 어찌, 이득이 있어 보이나.”

“있어 보이는 군.”

“……”

“그런 식으로나마 자네가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이니.”

화법이 묘하게 불쾌하여 페르젠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의 권좌에 앉았다.

그리고는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카르마를 모조리 소진시켜 버릴까 싶다가도, 자신의 카르마가 아까워 페르젠은 그러지 않았다.

카르마라함은 해당 신의 격을 나타내는 전부이자, 탄생과 소멸에 연관되는 힘.

정확히는 간섭할 수 있는 정당한 여지가 없을 때도,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인과율의 비틀림이었다.

실제로 자신의 혼을 인간의 육신에 담아 이승으로 환생시킨 것 또한, 저자를 포함한 다른 신들이 각자 보유하고 있는 카르마를 통해 저지른 일이었으니.

“옳았다고 생각을 하나.”

넌지시 질문을 던지며 페르젠은 눈을 감았다.

카르마를 거의 잃어버린 그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가 이끌던 시절의 명계는 제대로 고삐조차 씌우지 못한 난장판이었다.

카르마를 소모하면서까지 안정시키지 못한 명계의 통치.

때문에 자신이 태어나 명계를 이끌었고, 이곳을 안정화시켰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페르젠──아니 베르트엠 엘퀴아 에뤼에라는 한 신의 주관적인 관점이다.

“옳다고 느끼지는 않았으나, 자네는 타협할 생각도 없지 않았나.”

제대로 제어가 되지 않았던 명계였던만큼, 당연히 그 다음 세대의 신으로 태어난 페르젠은 압도적인 카르마를 부여 받았다.

하지만 그것을 기반으로 이끌어 나가는 그의 폭정은 지나치리만큼 유능했기에, 보유하고 있던 카르마의 3할 정도만 소모하고서 평화를 안착시켰다.

본디 괴이들은 그 카르마의 소모를 유도하여 수명을 앞당기는 수단을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다져왔으나, 막대한 카르마까지 남은 상태에서 페르젠을 굴복시킬 수 없으니 자연스레 허리를 굽히게 되었다.

다만, 그의 폭정이 거기서 그쳤다면 모를까.

페르젠은 계속해서 그 폭정을 이어 나갔고, 썩은 환부가 도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멀쩡한 환부까지 도려내려 들었다.

“타협할 것이었다면 내가 태어나지 않았겠지. 나는 그런 식으로 명계를 이끌도록 태어난 몸이었고, 때문에 그것 밖에 할 줄 모르는 몸이었다.”

“적정 선을 유지 하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에 태어날 신은 미약한 카르마를 부여 받게 되고, 나의 무능했던 시절을 되풀이 했을 걸세.”

“그건 자네의 관점이겠지.”

“……”

“저 위에 있는 녀석들은 내가 압도적인 카르마를 보유 한 채, 소멸하지 않고 독재를 이어 나가는 걸 두려워했던 게 아닌가.”

자신을 인간의 몸으로 환생시킨 목적은 측은지심과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을 익히게 만들어, 통치에 유함을 스며들게 하기 위함.

그래, 이제는 이름조차 사라진 이전 명계의 주인은 진심으로 그 의도를 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여기에 관여한 다른 신들은 결코 그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이 명계에서 자리를 비운 동안, 괴이들이 몸집을 부풀리기를 바랐겠지.

괴이들 또한, 그것에 동의를 했기에 아무런 대가없이 무려 5번에 걸쳐 이승에 강림했던 것이리라.

최대한 자신의 죽음을 막고, 진명을 깨우치는 것을 늦추어 이승에 묶어 두기 위해.

“저 잡것들은 여유가 있을 때 짓밟아 놓는 것이 최선이다. 지금 명계의 평화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나?”

“자네의 방식은 평화를 이룩하는 시간은 빨랐을지 몰라도, 그것이 지속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걸세.”

“……”

“자네나, 저위에 머무르고 있는 자들이나 영겁의 시간을 살아 와놓고도 영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걸 모르고 있지.”

자.

“나만 해도 어떠한가. 자네 못지 않은 영겁의 시간을 살아 왔어도, 이제 곧 소멸을 앞두고 있지 않은가. 자네는 이 현상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명계의 평화를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 믿었고, 저들 또한 그것을 믿었기에 두려움을 머금고 나의 의견에 동조해 자네를 이승에 환생시켰네.”

하지만.

“영원이라는 것은 없다네. 인과율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모든 존재들에게 언젠가 끝이라는 아늑함을 고하지. 이승에서 25년간 자네의 눈으로 많이 지켜봐오지 않았나. 우리들 입장에서 이승의 존재들이 살아가는 시간은 티끌에 불과한 것이나,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들의 탄생과 끝을 일축 시켜 놓은 것이 이승의 존재들이네.”

“……”

“나는 그저, 거기서 자네가 부족함을 채웠으면 할 뿐이야.”

그럴 수만 있다면, 영원을 머금지는 못하더라도.

그 영원에 가까운 것만큼은 쥘 수 있겠지.

“자네에게도 좋은 것이지 않나. 이 다음 명계를 다스리게 될 주인은 겸사겸사 그 부산물을 받아 먹을 뿐이고.”

이름이 잊혀진, 자신 이전 명계를 다스리던 그를 보며 페르젠은 옅은 코웃음을 쳤다.

“이승에 다녀온 것은 나인데. 어째서 네놈이 다 늙은 노친네처럼 넋두리를 표하는지.”

“……”

“마지막으로 물으마.”

만신전 앞, 자신의 권좌에서 몸을 일으키는 페르젠이 그를 내려다본다.

“네 놈 입장에서 바뀌었으면 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일말의 후회도 없는가.”

“없다네.”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즉각적인 대답을 내뱉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페르젠은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 그런가……”

그 대답이 한점 거짓없는 진실이라면.

“두 손 놓고, 얌전히 지켜보기나 하도록.”

이윽고 등을 돌리는 페르젠이 방대한 카르마를 끌어모아 허공을 거세게 두드린다.

콰앙──!

그러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공에 실금이 그어지더니, 빠른 속도로 그 균열이 확장되어 공간의 비틀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베, 베르트엠! 」

「 지금 무얼 하는 건가! 」

명계가 아닌, 천상에 머무르고 있는 신들의 다급한 목소리.

그것을 들으며 페르젠은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괴이들에게 몸을 일으킬 것을 명했다.

쩌적──!

그리고는 공간의 비틀림을 완전히 찢어, 명계에서 천계로 올라가는 길을 강제로 형성한다.

“보면 모르겠나. 네놈들의 모가지를 비틀러 갈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라그나로크를 재현해보겠다고 말하는 페르젠의 말에 천계의 신들은 기가 차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강렬한 두려움을 머금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만큼 페르젠이 보유하고 있는 카르마의 양은 방대했고.

그가 굴복시킨 최상위 괴이들의 힘은 강력했으니까.

「 기, 기다려요! 」

“네 년은 입을 닫아라. 곱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일말의 카르마를 남겨두고 괴이들에게 던져 줄 테니 잠자코 기다리고 있도록.”

수호를 관장하는 영역의 여신──이승에서 시엘 미드포드에게 축복을 내렸던 그녀를 기억하며 페르젠은 자연스레 이를 갈았다.

흐끅!

그리고 거기에 담긴 선명한 살의를 느낀, 수호를 관장하는 여신은 자신도 모르게 꼴사나운 소리를 내며 덜덜 몸을 떨었다.

「 자, 자네에게도 적지 않은 카르마의 소모를 불러 일으킬 걸세! 그건 이득이라 할 수 없지 않은가? 우리에게 원하는 게 있다면 말을 해보게! 」

「 단순한 화풀이를 위해 자신의 수명을 앞당기면서까지 이러는 건 손해가 아닌가! 」

꿈틀.

페르젠의 명을 받고, 당장 천계로 기어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던 괴이들은 타협안을 제시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다른 의미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신들이 아는 페르젠이라면, 저 말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진격을 명령했을 텐데.

제자리에 서서 오랜 시간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페르젠을 보고 있으니 불길한 느낌이 맴돈다.

사실 괴이들 입장에서는 이 전쟁으로 자신들이 희생되더라도, 결국 페르젠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줄어들어 그가 채운 목줄이 느슨해진다면 호재였다.

그가 이승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자신들이 힘을 키울 시간을 버는 것?

확실히 나쁘지는 않았으나, 본질적으로 협력을 했던 궁극적인 목적은 귀환한 페르젠이라면 틀림없이 이러한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이라……”

그리고 그 불길한 느낌을 명확히 증명하듯, 홀로 낮게 읊조리는 페르젠이 고개를 치켜들자 괴이들은 확실히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정 그러기를 바란다면, 네 놈들의 카르마를 다시 소모해 나를 이승으로 돌려보내도록.”

「 …… 」

천계에서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을 할 수 없을 만큼 그가 제시한 요구가 예상 밖의 범위였기에.

물론, 예상 밖의 범위라고 한들 선뜻 들어주기에도 어려운 것이었다.

저만한 격을 보유하고 있는 신의 혼을 인간의 육신에 담고, 그 기억을 자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상상이상의 카르마를 소모하는 일이었으니까.

실제로 그것조차 잘 되지 않아, 인간으로 환생한 페르젠은 태생부터 지독한 강박 장애를 앓았다.

……그러니, 이번의 요구에는.

그 모든 흠집을 바로 잡기를 원하지 않겠나.

심지어 기억 일부까지 보존해달라고 할지 모른다.

그로 인한 육신의 붕괴까지 틀어 막아 줘야 할 테니, 한 마디로 페르젠은 모두가 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부 감당하여 카르마를 소진하는, 희생당할 몇몇 신들을 간추리라는 선고를 내린 것과도 같았다.

“반나절을 주지.”

움찔!

말을 하면서도, 페르젠은 자신도 모르게 낯섦을 느꼈다.

신에게 있어서 시간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흐르는 세월은 그들에게 있어서 수명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자신이 명확한 시간을 언급하는 모습에 페르젠은 묘함을 직시했다.

그래, 이름이 잊혀진──자신 이전 명계를 다스리던 그의 말대로.

영겁의 시간을 살아가는 탓에, 영원이라는 것이 당연히 존재할 것이라 믿었던 자신이…… 그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까.

이윽고 등을 돌린 페르젠은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런 페르젠을 지켜보고 있던, 이름이 잊혀진 이전 명계의 주인은 너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

“나는 분명, 그렇게 받아 들였다만.”

그의 말대로, 인간의 삶──그 필멸의 시간이란 아무것도 아니었다.

27년을 살아온 이서진의 삶도.

25년을 살아온 페르젠의 삶도.

자신이 여기서 보낸 영겁의 시간에 비한다면, 티끌에 불과한 것.

하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이제 자신에게 있어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지 페르젠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또각.

멈췄던 걸음을 내딛으며 그에게 대답해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동시에.

“모든 것이기도 하지.”

그것이 베르트엠 엘퀴아 에뤼에, 그가 필멸의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통해 깨달은 것.

그렇게 페르젠이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자, 이름이 잊혀진 이전 명계의 주인은 절망하고 있는 괴이들을 돌아보며 끌끌 웃었다.

“망할 것들. 내가 통치할 때가 좋았지 않느냐. 그때 말을 잘 듣기만 했어도 저 놈이 명계를 다스릴 일은 없었어.”

호탕한 넋두리를 품고 있는, 이름이 잊혀진 사내의 웃음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