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경을 단련한 브뤼테인의 선조들이 자신의 공격을 읽어낼 수 있다고 한들, 한합 한합을 마주할 때 마다 실리는 압도적인 마력의 양을 감당할 수 없었던 터라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솔직히 헛점을 한 번만 잡아낸다면 더이상 사역조차 할 수 없게끔 박살내는 건 어렵지도 않은 일이나, 그러지 못하고 유치한 소꿉 놀이를 하듯 그들의 공격에 어울려 주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페르젠이 강림 시킨 명계의 괴이 때문.
「 ■■■. 」
지끈!
또다.
협곡을 거미줄처럼 뒤덮는 거대한 뼈들이 하나의 권좌를 만들고, 그 위에 고고히 앉아 있는──녹아 내리는 밀랍 인형과도 같은 흉측한 괴이의 목소리는 차마 거역하기가 힘든 강렬한 충동과 굴복심을 느끼게 만들었다.
한 번 경험을 하고 곧바로 고막을 터트려 청각을 손실 시켰지만, 감히 생물의 성대로 낼 수 없는 목소리와 기이한 언어는 뇌리에 또렷히 울려 퍼진다.
그리고 그 강렬한 욕망과 충동에 거역하려 들 때면 어마어마한 양의 마력이 순식간에 소진 되었다.
당연히 그것에 거역 할 마력이 없는 일반 병사들은 제자리에서 자신의 심장을 도려내다 적군의 검과 창에 베이고 꿰뚫려 생을 마감한다.
차라리 압도적인 힘을 가진 괴이였다면 상황이 나았겠으나, 상성이 매우 불리한 괴이였던터라 그레모리의 미간은 찌푸려진 채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이 굴복을 강요하는 목소리가 울려퍼질 때 마다 녹아내리는 밀랍의 속도가 가속화 되고 있다는 것.
‘재화는 더 남아 있지 않은 것이냐.’
2층 이상의 괴이부터는 대상을 선별 하는 게 불가능하다.
때문에 상성이 좋은 괴이가 등장해 유리한 상황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만큼, 추가적인 재화가 있다면 한번더 명계의 문을 열어 이 승기를 확실히 잡아 결착을 짓는 것이 좋을 텐데 페르젠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하지 못한 것이겠지.
그리고 지금까지 그레모리가 취했던 행동을 통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어렴풋하게 짐작한 페르젠은 쓰게 웃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소모되기 시작하는 마력은 벌써부터 마력 탈진 증세를 보이려들지만, 페르젠은 내부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무력감을 애써 무시한 채 계획하고 있는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최대한 의식을 집중했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들끓는 리지의 주박과, 그것을 희미하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 새겨넣은 강박증세는 고도의 분할 사고를 요구한다.
당연히 페르젠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한낱 인간의 몸뚱이로 그것을 무리없이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상상이상의 피로감을 느끼는 뇌가 과부하를 일으키며 코끝에서 검붉은 피를 주륵 흘려 보냈다.
스륵.
그에 그것을 닦아낸 페르젠은, 한쪽에서만 흐르는 코피를 느낀 뒤 스스로 주먹을 말아쥐며 콧잔등을 거세게 가격했다.
주륵.
그러자 한층더 많은 양을 머금고 사이좋게 흘러내리는 코피가 입술 주변을 덕지덕지 물들이자, 페르젠은 자조섞인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라우라가 자신에게 새겨 넣은 상처.
그리고 단검으로 스스로 그은 자상만해도, 이미 충분한 양의 강박 증세가 리지의 주박과 함께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데.
이 이상의 강제적인 의식의 분할은 오히려 독이 될 것이다.
“……만월의 괴벽으로부터 발버둥 쳤던 너의 과거 못지 않게, 나또한 정말 추하게 살아가는 구나.”
죽은자의 냉기를 흘리며 자신의 곁을 지키는 이사벨을 보고서, 페르젠은 작게 심호흡을 한 뒤 마력을 운용했다.
그레모리가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은 강림시킨 괴이가 첫번째일것이고.
그 다음이, 이사벨을 통한 고밀도의 마력을 형질 변환 시킨 마법이리라.
하지만 그녀의 몸뚱이를 꿰뚫게 되는 것은, 결국 마법도 괴이도 아닌 순수한 “물리적 타격”이 될 것이다.
오러 나이트가 몸에 두르는 마력이 반응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력을 통한 결과물과 괴이의 능력 뿐.
물론, 불순물이 제거되고 마력이 타고 흐르는 몸뚱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견고한 갑옷이다.
그러나 그 자신감과 자만심이 오히려 독이 든 성배를 들이키게 하는 허점이 될 터.
‘못난 후손의 불효를 용서하소서.’
이내 그레모리를 붙들고 있는, 선조들의 시신으로부터 자율통제를 거두어 들인 페르젠은 직접 의식을 연결하여 사방에서 그녀를 옥죄게 만들었다.
“……!”
당연히 그 변화는 직접 검을 맞대고 있는 그레모리가 가장 빠르게 간파를 해낼 수 밖에 없었다.
공방의 균형을 잡고 있던 자세에서, 빈틈이 가득 드러나는──그야 말로 죽음을 각오하고 내지르는 한수.
일반적인 기사나 평범한 오러 나이트라면 여기서 얌전히 방어 자세를 취하고, 이후 반격을 받아낼 수 없을 만큼 흐트러진 적의 목을 쳐버리는 반격을 가할테지만 극의에 오른 그녀의 몸은 굳이 그런 정공법을 취할 필요가 없었다.
범이 한낱 개의 발악을 마주하며 날카로운 이빨을 숨기려 들까.
오히려 발악하는 개의 몸뚱이는 그대로 처참히 짓씹을 뿐이다.
뻐걱──!
아니나 다를까 정면에서 그녀를 마주하고 있던 브뤼테인 가문의 선조가 반격을 허용하고, 안면이 함몰 되다 못해 절반이 처참히 박살나 우측의 광대뼈와 두개골이 살점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푸욱!
측면에서 그녀에게 검을 내지르던 선조는 마력을 덮어 씌운 의족에 복부가 꿰뚫리더니, 신체를 지탱할 척추가 박살나 상체가 뒤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지르는 검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궤적을 그려내며 그레모리를 압박한다.
이것은 순수하게 반격을 당한 이들이 산자가 아닌 죽은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
하지만 그것은 결코 호재가 아니었다.
사역하는 시신의 손상도가 높아진다는 건, 그만큼 동일한 값의 마력을 부여했을 때 구현율이 낮아진다는 뜻이었이니.
특히 안그래도 불안정한 연결을 하고 있는 페르젠에게 그것은 더한 과부하를 건다는 것과 동일한 이치였다.
움찔!
“큿! 또……!”
하지만 페르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결을 해제하거나 다시금 자율 통제로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선조들의 시신이 망가지면서까지 내지르는 한수와, 강림시킨 괴이의 도움을 받아 그레모리에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방어에 전념하길 강요한다.
“크……! 끅!”
그리고는 할당할 수 있는, 자신의 모든 마력을 최연소 아폴리온 등급의 원소 마법사이자 에르네스 제국 희대의 마녀──이사벨에게 모조리 쏟아 부었다.
그에 페르젠은 자연스레 뒤따르는 막심한 통증에 입밖으로 신음을 흘렸다.
순식간에 대량의 마력이 빠져 나가고, 불안정한 연결로 인해 회복되는 마력의 양으로는 도저히 메꾸어지지 않는 공백.
극도의 굶주림을 통한 허기에 배가 쪼그라드는, 아니 벌레에게 파먹히는 음식의 고통을 인간에게 재현할 수 있다면 이러할까.
흐릿해지는 초점.
등 뒤로 흘러내리는 식은땀.
당장이라도 의식을 잃은 것만 같은 탈력감이 휘몰아치고, 숨을 쉬기만 해도 헛구역질이 올라오나.
페르젠은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제단을 통해, 아공간에서 회백색의 금속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쥐어든 이사벨은 페르젠에게 건네 받은 압도적인 마력을 지휘하듯, 생전의 버릇을 따라 손가락을 휘두르며 강렬한 뇌전을 발산시켰다.
파지직!
쾅!
쿠웅!
그러자 고농도의, 그것도 대량의 마력을 한번에 뇌전으로 형질 변환 시킨 탓에 좀처럼 제어 되지 않는 빛줄기가 사방으로 비산하더니 죄없는 바닥을 거칠게 두드리며 특유의 난폭함을 과시한다.
하지만 어느덧 입고 있는 로브가 흘러내리며 드러난 아름다운 은발과, 정말 마녀라 불리우기 손색이 없는 고혹적인 외모를 드러낸 이사벨은 우는 아이를 뚝 그치게 만들듯 그 뇌전 다발들을 전부 제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허공에 찬란한 육망성을 만들며, 페르젠에게 건네 받은 회백색의 금속을 날려 보낸다.
얼핏 보면 저 찬란한 육망성을 통해 가공할 뇌전을 발사시키려는 듯 보이나, 저것은 가림막에 지나지 않았다.
정확히는 고농도의 마력을 형질 변환 시켜 만들어낸, 그 강렬한 뇌전 다발을 곧 쏘아 낼거라고 알리는 퍼포먼스.
그래, 화려하면 화려 할수록.
그레모리는 그렇게 믿을 수 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페르젠이 이사벨을 통해 준비하고 있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
본질은 찬란한 육망성 뒤에 가려진, 뇌기 다발을 성질 변환 시켜 고체로 만들어낸 선형궤도(線型軌道).
마치 포신과도 같은 그것을 이루는, 양쪽에 놓여진 고체 뇌기는 각기 다른 전위차를 가지고 있어 전도성이 높은 금속을 투하하는 즉시 강렬한 자기장을 형성 할 것이고 그것을 통해 투하된 금속은 총알처럼 발사되리라.
위력에 비례하는 것은 당연히 전압, 그리고 궤도의 길이.
그 점을 고려할 때, 무엇하나 손색이 없는 사전 준비였다.
아폴리온 등급의 마법사가 보유하고 있는, 고농도의 마력을 그것도 대량으로 응축 시킨 뇌기가 전압 그 자체이자 포신이었으니까.
이것은 시엘 미드포드와 대결을 벌였을 때 초전도 현상을 이용했던 것처럼, 이 시대보다 우월하게 앞서 있는 문명──이서진의 기억에서 끄집어 낸 것이다.
그 세계에서도 완벽히 구현하지 못한, 이 선형궤도에 담긴 물리력을.
오러 나이트의 극의에 오른 그녀의 몸이 감당해낼 수 있을까.
이윽고 대기에 간섭하는 이사벨이 회백색 금속을 살짝 밀어, 선형궤도 안으로 집어 넣는다.
파직!
그러자 눈으로 분간하기도 힘든, 정말 짤막한 전류가 튀고.
그 주위로 형성되는 거대한 자기장이 눈가림을 위해 형성된 찬란한 육망성을 밀어낸다.
콰앙──!
직후, 무아지경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병사들조차 순간 움직임을 멈추게 만들 만큼 거대한 소음이 전장을 덮더니……
뻐엉──!
떨어지는 유성처럼, 특유의 꼬리를 만들며 쏘아져 나가는 금속이 몽환적인 궤적을 선보이며 그레모리에게 직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