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한 댐에서 방류된 물이 직선으로 가로질러 엘리알타 협곡까지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적으로 40분.
물론, 물의 속도를 정확하게 염두하지 않은 것이라 오차 폭은 상당히 클 것이다.
때문에 댐의 붕괴를 본 순간 곧장 출진을 해야 했지만, 페르젠은 그 없는 시간을 쪼개어 자신의 막사로 들어가 있었다.
“허, 음……”
그에 밖에서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수뇌부들은 적잖은 초조함을 선보이며 레이몬드 황자를 힐끔힐끔 쳐다보았으나, 정작 그는 말 위에 올라탄 채 엘티알타 협곡 너머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미치겠군.’
능구렁이 같은 알프레드 가문의 노괴, 그리고 브뤼테인이 오랜 시간 충성심으로 섬겨왔던 황실이 아니라면 감히 페르젠에게 재촉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터라 결국 대기를 하고 있는 수뇌부들은 피말리는 심정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안절부절하는 마음을 애써 억눌렀다.
만약, 별동대를 차출하는 과정에서 페르젠이 자신들의 권위와 지위를 이용한 불합리함을 눈감아 주지 않았다면 직접 나설만한 상황이 되었겠으나……
페르젠은 오히려 그런 자신들을 존중 아닌 존중을 해주었기에, 수뇌부들은 무형의 목줄이 차인듯한 느낌을 받아 죽을 것만 같았다.
‘제발 빨리 좀 나와주시오. 백작……!’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마음 속으로 페르젠을 향해 들릴 일이 없는 간절한 애원을 하는 것 뿐.
그리고 그 닿지 않는 애원의 중심──페르젠은 자신의 막사 안에서 남아 있는 네 구의 선대 가주들을 향해 깊게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이 마지막 전투에서, 저는 잠시 브뤼테인의 핏줄임을 망각 할 것 입니다.”
오직 살아 남기 위해.
“선조 분들의 시신을 한낱 도구처럼 다룰 것입니다.”
브뤼테인의 역사를 붓으로 깎아, 자신이라는 인간의 삶을 그려 나가기 위해.
“경의와 예의 보다는, 삶에 대한 추악한 발악과 생존본능만을 담아 사역을 할 것 입니다.”
그러니 먼 훗날.
자신이 죽어 명계에 가게 된다면.
“이 철없고 못난 후손을 엄벌 하소서.”
그렇게 다짐을 마친 페르젠은 허리를 곱게 폈다.
그러자 더 이상 눈조차 내리지 않고, 먹구름도 없는 창공에서 내리 비추는 햇살이 창가로 들어와 그림자를 길게 늘어지게 만든다.
“……”
하지만 그 늘어진 그림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리지의 환영이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모습이 보이자, 페르젠은 품안에서 단검을 꺼내들어 오른팔에 얕은 자상을 새겨 넣었다.
킥.
덕분에 일시적으로 흐릿해지는 그녀의 주박을 따라 특유의 붉은 눈에 아른거리던 환영도 서서히 사라지지만, 자신의 발악을 비웃는 듯한 마지막 비웃음은 귓가에 오래 맴돌며 적지않은 불쾌감을 선사해온다.
‘그래…… 어디 명계에서 지켜 보거라. 리지.’
한낱 악당의, 삶에 대한 비참하고 추악한 발악을.
또각.
그렇게 걸음을 내딛는 페르젠이, 자신의 선조들과 함께 막사를 나선다.
준비는 끝이었다.
출진이다.
* * * * *
에르네스 제국이 움직였다는 보고를 듣고, 출진 준비를 끝마친 뒤 엘리알타 협곡 안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그레모리 여제는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끊임없는 소음을 느끼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폐하. 왜 그러십니까?”
“재밌는 장난을 쳐놓았구나.”
“예?”
아무리 그녀의 청각이 인간의 범주를 벗어 났다고 한들, 머나먼 곳의 소음까지는 좀처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귀로 이 소리가 들려온다는 건, 그만큼 근원지의 소음이 크다는 반증일 터.
……우지끈!
……쿠우웅!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나가고.
높다란 파도가 절벽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
“원소 마법사들을 최후방으로 옮기거라.”
“최후방으로 옮겼다가는 적군의 마법에 대응 하는 속도가……”
“언제부터 본녀의 말에 토를 달았다고 그러느냐?”
“아, 알겠습니다!”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며 노려보는 그레모리의 시선에 명을 받은 귀족은 재빨리 말머리를 돌려 마도 부대를 최후방으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이번 명령은 수행을 하면서도 도저히 그녀의 의도가 가늠되지 않는다.
마력에 대한 재능이 없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기사 보다 더욱 무서운 것이 원소 마법사인데.
“?”
그러나 배치를 마치고, 다시금 말머리를 돌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던 귀족은 저 너머의 지평선을 보고는 눈매를 슬며시 좁혔다.
처음에는 내렸던 비로 인해 눈이 녹는 과정에서 생긴 안개가 지평선 끝에 걸려 있는 줄 알았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선명해지는 그것은……
“허, 허…… 으어……!”
압도적인 높이의 해일이었다.
지평선을 가로 덮고, 지상의 모든 것을 난폭하게 먹어치우는 폭군.
“자, 자, 장벽을…… 장벽을 쌓아라! 빠, 빨리──!”
속도가 얼마나 빠른 것인지 지평선 끝에서만 아른거리던 해일이 어느덧 두 눈에 명확히 들어온다.
대처가 늦었다가는 이 자리에서 자신들은 모조리 수몰되고 말 터.
그 공포감을 느낀건 자신만이 아닌지, 명을 받은 원소 마법사들 또한 재빨리 대지에 간섭하여 엘리알타 협곡의 절벽보다 높다란 장벽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장벽의 벽이 높아지는 시야 너머, 말끔히 휩쓸려 버리는 자신들의 진지를 보고서 귀족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진지야 다시 지으면 된다고 한들.
식량은 여기서 창조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쿠우우웅!
철썩──!
이내 코앞까지 도달한 해일이 쌓아 올린 장벽을 거칠게 두드리자, 귀족은 심장이 철렁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들이닥친 해일은 쌓아 올린 장벽을 무너트리지 못하고.
좌우에 세워져 있는 엘리알타 협곡의 절벽을 타고 두갈래로 나뉘어 흐른다.
촤아아악!
협곡의 절벽 너머로 물줄기가 치고오르는 것을 보기만 해도, 이 해일의 높이가 어느정도 인지는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그렇게 들이닥친 해일의 수위가 낮아지기 전 까지, 완벽히 퇴로가 가로 막힌 시점에서 에르네스 제국의 군대가 당도한다.
엘리알타 협곡의 절벽은 거듭된 전투로 인해 망가진 곳이 다수 존재했기에, 그 틈새로 흘러들어오는 거친 물살은 당연하게도 에르네스 제국의 뒤편을 똑같이 가로 막고 그들의 진지를 순식간에 집어 삼켰다.
다만, 엘마르크 제국 보다 나은 점이라고 한다면.
혹여나 모를 사태를 대비해 식량만큼은 따로 보관을 해두었다는 것이다.
‘하룻 강아지가 범의 퇴로를 가로 막는 다라……’
적군이 준비한 전장의 무대를 슬며시 훑으며, 그레모리 여제는 피식 웃었다.
이 배수진에서 적군이 선보일 건곤일척.
그것을 깨부수는 것만큼 즐거운 것도 없겠지.
* * * * *
“쏴라──!”
마법이 하늘을 뒤덮고.
검과 창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전장 가운데, 적군과 아군이 격렬히 뒤섞인다.
하지만 페르젠과 그레모리는 제자리에서 발을 떼지 않은 채, 조용히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최후방으로 배치된 원소 마법사들이 뒤쪽의 급류를 막기 급급한터라 시작부터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선공은 양보해주겠다는 여유로움.
저것은 오만함 이전에 명확한 자신감이겠지.
저만큼이나 신체가 망가진 상태에서 극의에 오른 오러 나이트가 낼 수 있는 저력이란 말로 이룰 수가 없을 테니까.
“……”
그런 점에서 자신이 그녀를 따라 여유를 내비춘다 한들, 초라한 허세에 불과하리라.
다른 강박 증세를 통해 의식을 분산시켜 리지의 주박을 흐릿하게 만들었어도, 여전히 사역을 통한 연결은 불안정하여 마력의 소모는 기하급수적이었고.
명계와 거래를 할 수 있는 순수한 재화는 1회의 값어치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쿠웅!
하지만 처음부터 고유능력을 통한 남은 2번의 횟수도 모조리 소진할 각오를 하고 있었던 터라, 페르젠은 망설임없이 자신의 제단을 통해 명계의 문을 열었다.
저벅.
이내 그 광경을 보고 그레모리가 한걸음을 내딛자……
움찔!
페르젠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걸음을 물러 설 뻔했다.
“하……”
시작부터 그녀의 기세에 밀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 그녀의 기세에 밀렸다기 보다는 이 마지막 전투 자체를 자신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것만큼 확실한 자기 객관화가 없겠지.
지나온 모든 일은 긍정적인 복선을 뿌린 뒤 그것을 직접 회수하는──그야 말로 결과를 확신하고 벌인 것이었지만.
유일하게 지금만큼은 차마 다음 페이지를 넘기기도 싫을 만큼, 부정적인 복선이 한가득 뿌려져 있다.
그리고 악당의 굴레가 쌓아 올린 업보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너무나도 친절히 그 복선을 하나하나 회수하려 든다.
그래, 그렇다면.
자신의 인생을 기록하는, 삶이라는 책이.
개연성이 박살나고, 회수되지 않은 복선이 즐비한 망작이 되도록 해야겠지.
애당초 하늘을 날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는데.
어찌, 땅을 기라는데 동의를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