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지고,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잔잔한 새벽이 다가온다.
그리고 서로의 애틋함으로 겨울의 추위가 느껴지지 않을 따스한 모닥불을 피워내고 있었던 페르젠과 유리엘은 단란히 침상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부스럭.
아니, 잠을 자기를 몇차례 페르젠과 유리엘은 수시로 잠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리지의 주박으로부터 의식을 분산시키기 위해 수액을 맞았던 왼팔과 비교되는 오른팔을 의도적으로 방치해두었으니, 그것이 거슬려 애매하게 회복된 페르젠의 몸은 깊은 잠에 빠져들지 못하고 계속 잠자리를 뒤척였다.
이럴거면 진작 수면제를 사용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약물의 도움없이 잠조차 자지 못하는 자신을 본다면 유리엘이 얼마나 걱정을 할까 싶어 그러지 않았는데 괜스레 후회가 밀려들어 페르젠은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페르젠을 따라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반복한 유리엘은, 자신의 옆에서 억지로 눈을 감고 다시금 잠이든 척을 하고 있는 페르젠을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은 채 가느다란 손을 뻗었다.
“잠이, 잘 오지가 않아……?”
“……”
저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해줘야 하련지, 도통 감이 잡히지가 않았기에 페르젠은 고개를 돌린 채 두 눈을 뜨고는 조용히 숨소리만을 내쉬었다.
삐걱.
그에 유리엘도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는 듯, 상체를 조심스레 일으켜 두 손을 풍만한 가슴 부근으로 옮겼다.
툭.
투둑.
그러자 단추가 하나 둘 풀려 나가는 소리를 따라, 병상 안에는 훨씬 더 짙은 복숭아향이 맴돌기 시작하고.
끝내 모든 단추가 풀어 졌을 때는, 압도적인 질량감을 선보이는 그녀의 가슴이 오랜 세월 배여 있는 기품을 모두 덮어버리는 천박함을 자아내며 은은하게 출렁거린다.
“우는 아기는, 엄마의 심장 소리를 가까이서 들으면 뚝 그치고 잠이 든다고 해.”
“……”
“당신이 내 아가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장 가까이서 오랜시간 살을 맞댄 여인의 고동소리는, 충분한 안정감을 선사해주지 않을까.”
유리엘 본인도 이것이 무척이나 얼토당토않는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곁에서 그가 잠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모습을 얌전히 지켜보고만 있는 것은 너무나도 싫었다.
스륵.
이내 일으켰던 상체를 다시금 뉘이고, 페르젠의 얼굴을 두 손으로 끌어 안아 자신의 품에 묻은 유리엘은 점차 숨소리를 줄여 나갔다.
자신의 심장이 뛰는, 그 고동 소리가 조금이라도 크게 페르젠에게 닿을 수 있도록.
“……”
그리고 옷으로 가려지지 않은, 완연한 맨살을 드러낸 그녀의 가슴에 고개를 묻고 있는 페르젠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움직여 편한 위치에 자리 잡았다.
보다 선명히 느껴지는 유리엘의 체온과, 특유의 익숙한 체취는 놀라우리만큼 말을 듣지 않는 아이처럼 뛰어 다니는 강박증을 진정시킨다.
……물론, 이것은 페르젠이 심리적으로 그렇게 느낄 뿐이었다.
향과로 변질된 그녀의 체향은 최음 효능을 지니고 있어, 단순히 그가 느끼고 있는 충동 일부를 성욕 쪽으로 분산 시켜주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원체 정신력이 강한 페르젠이었기에, 그 일말의 여유만으로도 마음편히 수면을 취하는 게 가능했다.
“……”
그렇게 자신의 품에서, 천천히 눈을 감은 채 고른 숨소리를 내쉬기 시작하는 페르젠을 보며 유리엘은 옅게 웃었다.
이미지 상, 페르젠이라는 사내는 도저히 여인의 치마폭에 기댈 것 같지가 않았기에.
하지만 아이처럼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잠에 빠져드는 페르젠을 보고 있으니, 유리엘은 아주 오묘한 모성애를 머금고 말았다.
전쟁이 종식 되고,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젖을 먹다 잠이 들면 이런 표정일까.
‘아……’
그러나 반쯤 발기하여 볼록 솟은 그의 바지춤이 자신의 허벅지에 닿자, 유리엘은 일순간 그를 통해 느끼고 있던 모성애가 바람결에 흩날리는 먼지처럼 훌훌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나약하고, 아이처럼 느껴질 상황이어도.
자신을 남편이자, 사내이자, 수컷으로 인지하라는 것인지.
치마폭에 기대면서까지도, 그 자존심만큼은 굽히지 않는 페르젠을 보며 유리엘은 참으로 그 답다라는 생각을 한 채 눈을 감았다.
“잘자요……”
* * * * *
부스럭.
이른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페르젠은 자신의 두 눈에 들어오는 한가득한 살색의 향연을 보며 지그시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익숙한 유리엘의 체향이 만개한 꽃밭의 향기처럼 자신을 감싸 안는다.
사실 익숙한 냄새를 그리도 선명히 맡는다는 것은 조금 어폐가 있겠으나, 향괴로 변질된 그녀의 체향은 뇌가 익숙하다고 인지해버린 냄새조차도 무취로 받아들이지 않게 하는 효능이 있었다.
“……”
잠결에 내뱉은 따스한 숨결 때문일까.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음탕한 가슴골 사이로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자 페르젠은 그곳에 부드럽게 입술을 맞춘 뒤 자신을 끌어 안고 있는 유리엘의 두 손을 푼 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가슴을 드러낸 채 새근새근 자고 있는 그녀에게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주고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다.
드르륵.
그러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의원 한 명이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오더니 이른 시각에 벌써 일어나 있는 페르젠을 보며 깜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주, 주무시는 줄 알고……”
“그렇게까지 융통성이 없지는 않다.”
“예, 예……!”
“목소리는 낮추고. 잠든 유리엘이 깨는 걸 원치 않아.”
“죄, 죄송합니다…… 그러면 잠시만 앉아 주시겠습니까.”
“그러지.”
추가적인 수액을 가지고 온 의원을 보며, 페르젠은 자신도 모르게 오른팔을 내밀었으나 빠르게 그것을 정정하고는 왼팔을 내밀었다.
어떻게든 올바른 대칭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몸뚱이는 어제 수액을 맞았던 왼팔이 아닌, 오른팔을 내밀라고 아우성을 치지만……
여기서 그 강박증세에 타협을 해버리면, 영원히 맞출 수 없는 대칭이라는──리지가 자신에게 새긴 주박이 더욱 날뛰겠지.
“끝났습니다. 호전이 무척 빠르시니…… 이 수액을 다 맞고 나시면 복귀하셔도 괜찮을 겁니다. 그, 그래도 목의 염증은 완전히 가라앉은 게 아닐테기에 술은 드시면 안되고 연초도 당연히 금물입니다.”
간간히 말까지 더듬으며,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주제에.
환자를 앞에 둔 의원이라는 사명감 하나만을 가지고, 그 압박감을 이겨내고 있는 의원을 보자 페르젠은 희미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래. 알겠네. 명심하도록 하지.”
그렇게 자신의 대답을 듣고 몸을 일으켜 등을 돌린 채 나가는 의원이지만, 페르젠은 슬그머니 창밖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오늘은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
그러니 술과 연초를 하지 않아도, 내일 아침이 밝기 시작하면 다른 의미로 상태가 나빠진 자신이 이곳을 찾아오게 될 것 같은 직감이 든다.
‘키우던 개에게 물리는 주인 만큼 한심한 것은 없을 텐데.’
아니, 물리기만 하는 것이라면 다행이리라.
어쩌면 자신이 잡아 먹힐지도 모르는 상태였기에, 페르젠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 *
투둑.
잠시 눈이 그친, 흐릿했던 하늘이 정오를 넘어 가는 순간 비를 쏟으며 고드름과 매서운 빙판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우라는 자신이 배정받은 움막 안에서 작게 뚫린 창문 위에 날카롭게 만들어진 고드름을 토옥 건드려 깨고는 고개를 치켜 들었다.
떠오르는 보름달이 완연히 가려질만큼 저리도 우중충한 하늘이라면.
오늘 밤 괴벽이 발작할 때는, 자신의 이성도 완전히 집어 삼켜지지 않고 공존하겠지.
적어도 수척해진 페르젠이 정말 위험할 정도로 착정할 일은 없겠다 싶어, 라우라는 등을 돌려 하던 “조합”을 마저 이어 나갔다.
* * * * *
찰박.
제시간에 맞추어 자신의 시신을 꺼내 사역하는 라우라가 우산을 들게 만든 뒤, 움막을 나서서 조심조심 걸음을 내딛는다.
쏴아아아.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쏟아지는 거친 빗줄기지만, 자그마한 몸집에 눈과도 같은 백발을 휘날리며 사역하는 시신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는 라우라는 아름다운 요정과도 같아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의 눈길을 대번에 휘어 잡았다.
하지만 페르젠이 곤란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확히는 유리엘의 귀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조취를 취해야 했기에.
라우라는 자신의 마력을 운용해 사역하는 시신을 거쳐 정말 투명하고 매끄러운 얼음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거울과도 같은 그 얼음판들을 이용해 반사각을 조절하여,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병사들의 시선을 간단히 벗어난다.
스윽.
직후, 페르젠의 막사 앞에 도착한 라우라는 천막을 걷어 안으로 들어서려 했으나……
“……”
우연찮게, 근처를 지나가던 병사 한명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곧 다가오는 야심한 시각.
도착한 보급 부대의 귀족 영애가 사내의 막사를 찾는 것이라 한다면, 역시 제 3자의 눈에는 그것이 음흉한 의도로 비추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는 잠시 한 걸음 물러나는 게 낫지 않을까.
라우라는 그렇게 생각을 했지만, 이상하게 이쯤오니 눈치를 보는 자신에게 오기가 생겨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굳이 따진다면, 자신도 엄연히 그의 여인인데.
언제까지 도둑 고양이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인지.
그래서 라우라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병사에게 매혹적이고 색스러운 눈웃음을 지어준 뒤, 당당히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흔들흔들, 자그마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살랑거리는 그녀의 엉덩이는 더할 나위 없는 암컷과 같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병사는 한동안 제자리에서 두 눈을 떼지도, 걸음을 옮기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