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은 순조로운가……’
루벨타 강으로 향하고 있는 별동대는 괴이를 통해 연결된 물건으로 시각적인 상황을 공유 받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적의 추적에 걸리지 않고 강의 상류로 나아가고 있으니, 도착한 별동대가 작전에 성공한다면 남은 것은 마지막 최후의 결전일테고.
그것이 아니라면, 봄을 넘겨 더욱 기나긴 전쟁을 지속하게 되리라.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레이몬드 황자는 작금의 상황이 좀처럼 편하지가 않았다.
복귀한 페르젠이 술 기운을 빌려 자신의 몸을 상하게 만들면서까지 막사에 틀어박힌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에.
리지를 죽였던 것이 그의 마음에 커다란 죄책감을 선사한 것일까.
아니, 그것은 아닐거라고 레이몬드 황자는 생각했다.
그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었다면, 로에르와 세자르가 처형되고 클로디아 가문이 멸하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지 않았겠지.
결국 페르젠이 스스로의 몸을 망치면서까지 저러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이겠으나, 그것을 돌려말하자면 지금 상황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일 터.
그래, 레이몬드 황자가 제일 답답해하고 속이 쓰려 하는 것은 그 점이었다.
브뤼테인의 핏줄이.
아폴리온 등급의 흑마법사가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자신 따위가 도울 수는 없을 테니까.
아마 페르젠이 속사정을 털어 놓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리라.
어차피 결과를 바꿀 수가 없는 상황이라면, 자신의 어깨에 불필요한 짐을 싣게 하지 않으려는 것일 터.
“백작……”
때문에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페르젠이 건넨 그 호의를 억지로 받아 눈을 돌리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더라도.
그의 아내인 유리엘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그렇게 레이몬드 황자는 시기상 곧 도착할 두번째 보급을 기다리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 *
비단길처럼 화려하게 내려깔린 눈밭을 즈려 밟으며, 다시금 가장 치열한 전장으로 돌아온 유리엘은 저 멀리서 눈에 들어오는 엘티알타 협곡의 입구를 보며 기쁜 기색이 서린 입김을 내뱉었다.
페르젠과의 재회도 재회였지만, 다른 곳으로 보급을 갔던 부대와 마주쳤을 때 그들이 전해준 소식이 전부 긍정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자신의 할아버지, 콜레오네 웨인 바레타 알프레드가 향한 오베른 왕국 쪽은 확실한 승전보였다.
이 소식을 전해준다면 틀림없이 심리적으로 많은 부담을 줄여 줄 수 있으리라.
물론, 그 모든 것들은 이 전선의 승패에 따라 얼마든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지만……
유리엘은 그러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지 않기로 했다.
“진군 속도를 올리도록 하지요.”
“예!”
말의 고삐를 단단히 붙잡는 유리엘을 따라 보급 부대의 속도가 올라간다.
그렇게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좁혀 엘리알타 협곡의 입구, 에르네스 제국의 진지로 도착했을 때 유리엘은 가장 먼저 자신들을 마중 나온 제 2 황자──레이몬드를 볼 수 있었다.
“유리엘 웨인 데이나 루에르그.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고생이 많았네. 인수인계는 부관에게 맡겨두고, 잠시 짐을 따라오지 않겠나.”
“네. 안 그래도 들려드릴 기쁜 소식이 있답니다.”
“그래…… 그것은 참으로 다행이군.”
“전하?”
아직 상세한 내용을 들려주지 않았어도.
이 치열한 전선에 들려줄 수 있는 기쁜 소식이란 틀림없이 다른 곳의 승전보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을 텐데.
레이몬드 황자의 안색이 그리 밝지가 않아, 유리엘은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또 한 번 뒤처리를 맡게 되어 뚱한 표정을 짓는 라우라를 뒤로하고, 레이몬드 황자를 따라 그의 막사로 들어섰을 때 유리엘은 억지로 가녀린 손을 꾸욱 말아 쥐며 떨리는 마음을 추스리려 들었다.
자신과의 자리를 따로 마련한 채, 입도 제대로 뻥끗하지 못하고 있는 레이몬드 황자를 보니 본능적으로 불길한 가정이 뇌리를 스치나……
유리엘은 억지로 그 가정을 의식하지 않으려 들었다.
“……리지 폴 리아나 클로디아, 그녀가 죽었네.”
움찔!
“아니, 정확히는 백작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지.”
“아……”
“둘 사이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상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클로디아 영애가 백작을 위협했던 것 같네. 그러지 않았다면 백작이 굳이 이 전선에서 클로디아 영애를 죽이려 하지 않았을 테니까.”
“……”
“문제는, 그 다음이네……”
타닥!
이어지는 레이몬드 황자의 말을 전부 들었을 때, 유리엘은 곧장 등을 돌려 페르젠의 막사로 거침없이 뛰어갔다.
또각.
“하아…… 하아……”
그리고 도착한 막사 앞에서 차오르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얕은 천막을 걷는 순간……
“읏!”
유리엘은 지독하게 풍겨오는 술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입과 코를 틀어 막았다.
풍겨오는 냄새를 잠시 들이키는 것만으로도 알싸한 취기가 올라오며 정신이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
환기도 제대로 하지 않고, 도대체 얼마나 도수가 높은 술을 계속해서 들이킨 것일까.
순간적으로 이렇게 페르젠을 방치한 레이몬드 황자를 향해 유리엘은 분노가 솟구쳤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그의 심정이 이해가 되기도 하였다.
페르젠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식으로 자신의 몸을 망칠리는 없을 터.
그럼에도 이러한 짓을 해야만 했던 것에는 명확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당장 해결할 수는 없기에, 레이몬드 황자에게 알리지 않고 스스로를 상처입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레이몬드 황자는 어떠한 수도 쓰지 못한 것이리라.
이 그릇되고 미련한 선택이,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면.
괜히 쓸데없이 개입하여, 최악의 선택으로 방향을 꺾게 만드는 것은 아닐지.
……그것이 두려웠을 테니까.
“페르젠.”
곧이어 미약한 희망을 품고 자신을 바라보았던 레이몬드 황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유리엘은 페르젠을 불렀다.
솔직히 그 미약한 희망에 자신이 보답 할 수 있을지, 유리엘은 자신이 없었다.
그 어떤 위험도 넘어 설것 같았던 유능한 그에게, 최선이 고작 이런 바보 같은 선택지 밖에 없는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기에.
하지만 언제부터 부부가 서로간의 일에 가능성을 따졌단 말인가.
그런 것은 타인과의 관계 정도면 충분하다.
오히려 부부간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지나치게 미련 한 것이 더욱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유리엘은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페르젠……”
특유의 고압적인 분위기와, 날카로운 기품은 어디로가고.
지독한 술냄새를 풍기며 안쓰러울 정도로 수척해진 한 사내가, 의자에 앉은 채 책상 위의 물건들을 어지럽히고 정돈하기를 반복한다.
초점조차 맞지 않는 저 붉은 눈은 과연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자신이 이토록 가까이에서 뺨을 매만지고 있는데도, 일말의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 그를 보며 유리엘은 심장이 도려지는 아픔을 느꼈다.
“페르젠……”
“……”
“내가 왔어……”
“……”
“지금 당신의 곁에, 내가 있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러보아도, 그는 넋나간 사람처럼 책상 위의 물건들을 어지럽히고 정돈하기를 이어 나갈 뿐이었다.
“페르젠……!”
기어코 그런 그의 손을 붙잡으며 크게 이름을 불러보는 유리엘이었으나……
쿠웅!
“아윽!”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손길을 거부하는 그의 폭력과, 바닥에 넘어져 얼얼하게 올라오는 통증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런 유리엘에게 일말의 시선조차 주지 않은 페르젠은 다시금 의자에 앉아 자세를 고쳐 잡은 뒤, 책상 위에 흐트러진 물건들을 기계처럼 묵묵히 정돈해나갔다.
움찔!
하지만 지독한 술냄새가 가득 배인 이 막사 안에, 어느덧 강렬히 스며들어 풍겨오는 도화향이 코끝에 살포시 내려앉자……
“아……”
넋이 나가있던 페르젠의 몸은 반사적으로 아련한 떨림을 머금었다.
추악함과 더러움을 머금고, 강박증으로 인한 괴로움과 아픔에 점칠된 몸일지라도.
그 과정에서 손에 넣은,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부정할 수 없는 악당임에도.
페르젠 폰 슈바이크 루에르그──그는 그리움이라는 것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유리, 엘……”
그제야 흐릿했던 그의 붉은 눈은 초점을 잡아 그녀의 모습을 선명히 담는다.
“쿨럭……!”
하지만 그 직후, 헛기침과 함께 오랜 시간 학대 받은 위가 비명을 지르자 페르젠은 앉아 있던 의자에서 쓰러져 바닥에 신물과 함께 남아 있던 술을 모조리 토해냈다.
그 과정에서 역류한 위액으로 인해 낫지 않은 상처가 악화되며 선홍색 핏물이 뒤섞여 나오더니, 바닥을 더욱 어지럽게 물들여 나간다.
“페르젠……!”
그리고 그 모습을 확인한 유리엘은 다급히 몸을 일으켜 페르젠에게 다가가 그를 끌어안은 뒤, 자신의 소매로 입가를 상냥히 닦아 주었다.
“……더럽다. 유리엘……”
그에 페르젠은 그녀의 제복이 얼룩지는 것을 보며 쇳소리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으나, 유리엘은 신경쓰지 말라는 듯 오히려 페르젠의 고개를 돌려 자신의 가슴 부근에 포근히 묻어주었다.
그러자 풍겨오는 도화향이 한층더 짙어지고.
충족되기 시작하는 그리움은, 그의 지친 몸에 안도라는 것을 선사한다.
‘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괜히 그녀가 걱정하지 않게끔, 이 상황에 대한 변명이라든지.
방금 그녀를 밀친 것에 대한 사과라든지.
하지만 그 날 이후, 정말 오랜 만에 “도피”가 아닌 순수한 “안식”으로 찾아오는 졸음을 느끼며 페르젠은 유리엘의 품안에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한참동안 자신의 품을 내어주고 있던 유리엘은, 서글픈 미소를 지은 채 잠이든 페르젠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