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윽! 아……! 아악!”
“빌어먹을 년!”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버릴 것만 같은 살내음과 거기에 뒤섞인 술냄새는 이곳이 얼마나 퇴폐적인 장소인지를 적나라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오베른 왕국의 귀족들은 자신들 밑에 내려 깔린, 왕실의 왕녀들을 범하며 불안함과 초조함을 마음껏 배설해냈다.
현재 상황상 오베른 왕국은 에르네스 제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베른 왕국의 귀족들 전부가 엘마르크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황족 시해를 명분 삼아 전쟁을 일으킨 에르네스 제국 입장에서 자신들은 반드시 목을 베어야 할 대상──이것에 의심의 여지는 없으리라.
더군다나 에르네스 제국의 수도에 위치한, 아카데미 습격 당시 사람을 가사상태로 만드는 약물의 개발 지역도 자신들 왕국에 위치해 있었고.
그것을 자살해버린 자신의 왕이 모두 실토해버렸기에, 엘마르크 제국의 도움을 받는 것도 불가능했다.
엘마르크 제국은 해당 사안을 전부 시인하고 있는 상태인데, 자신들을 도와주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라 이실직고 하는 꼴이지 않은가.
게다가 고작 왕국 하나, 그것쯤은 얼마든지 되찾을 수 있는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에르네스 제국은 명분상 자신들을 반드시 엄벌하여야 하기에 이리로 진군하고 있는 것이고.
그러니 엘마르크 제국 입장에서는 굳이 쓸데없는 곳에 병력을 할애하는 에르네스 제국을 상대해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죽기 싫어 발악하는 자신들이 그들의 병력을 갉아 먹어준다면 좋아라 하겠지.
……마음 같아서는 깔끔히 투항하고 엘마르크 제국 쪽으로 함께 화살을 겨누고 싶으나.
오베른 왕국의 귀족들은, 결코 그 선택지를 고를 수 없었다.
에르네스 제국의 검을 피할 수 있을 만큼, 깨끗한 손을 가진 귀족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으니.
때문에 그들이 살 수 있는 방안이란, 엘마르크 제국의 승전보가 들려오기 전 까지.
이곳에서 에르네스 제국의 군대를 막으며 생존하는 길 뿐이었다.
“허울 뿐인, 무늬만 가지고 있을 왕족 주제에! 무슨 영웅심리가 발동하여 그런 구차한 짓을 하셨습니까!”
“끄흑!”
근처에 있는 둔탁한 몽둥이를 들어 내려 깔린 왕녀의 머리를 후려치는 귀족이 추레한 뱃살을 흔드며 그녀의 속살을 헤집는다.
가벼운 뇌진탕으로 인해 부르르 몸을 떨며 입가에 거품을 무는 그녀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치밀어 오르는 불안함과 초조함을 해소해내는데 급박한 귀족들 입장에서 왕손들의 안위는 고려해줄 대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썩을 때로 썩어 문드러진 오베른 왕국 입장에서, 왕실의 방계도 아닌──피 한점 섞이지 않은 다른 귀족을 왕으로 추대해도 이상할 게 없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왕족이라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엘마르크 제국의 편의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꼭두각시에 불과한 왕족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단두대 코앞까지 내밀게 만들었으니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오래토록 이어지는 추잡한 시간은, 에르네스 제국의 군대가 국경 앞으로 도달했을 때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 * * * *
오베른 왕국의 국경, 그리고 그곳을 막아서는 라비에타 성벽은 천해의 요새로 불리운다.
엘마르크 제국이 굳이 오베른 왕국을 선택했던 이유는 이 때문이기도 했다.
양 옆으로 높게 우거진 가파른 절벽과, 그 좁은 사이만을 메꾸듯 세워진 성벽.
성벽을 두드린다면 양 옆에 높게 우거진 가파른 절벽에 마력으로 간섭하여 균열을 일으킬 테고.
그렇게 산사태처럼 덮쳐올 잔해들은 병사들을 수없이 죽일 것이다.
특히 이곳의 지하에는 상당한 수맥이 흐르고 있어, 그 시점에서는 후퇴도 상당히 버거운 일.
위에서는 절벽의 잔해가 쏟아지고.
밑에서는 폭포수처럼 솟구치는 지하수가 병사들의 걸음을 붙잡으니, 정공법으로 뚫는 것이란 적잖은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
또각.
하지만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알프레드 가문의 노괴──콜레오네의 얼굴에는 곤란하다는 기색이 한점도 서리지 않았다.
“어떠하더냐.”
“예. 이 지도에 표기된, 국경에서 머지 않은 곳의 마을에 오베른 왕국의 주민들이 버젓이 남아 있더군요.”
“어지간히도 허겁지겁 병사들을 징집하여 모였나보군.”
천해의 요새라 불리운다 한들, 힘으로 저곳을 뚫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국의 위상이 그리 허접할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정직한 손해를 보고서 저곳을 뚫어내는 건, 엄연히 실책이라 할 수 있을 터.
“병사들을 추리거라.”
“예!”
“알프레드 후작,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약탈하고 학살해보았자 이 전장의 승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소국의 왕자께서는 이 늙은이가 황명으로 금지된 일을 할 것 같습니까?”
콜레오네의 대답에 로벨리움 왕국의 왕자, 이나스는 오히려 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성들의 민심, 그리고 명분까지 무엇하나 저들이 이득을 보는 건 없기에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지 않나. 겁을 먹은 백성들이 도망쳐 저 성벽으로 들어가는 순간 오히려 꺼진 불씨를 살려주는 꼴이……”
“반드시 받아 들인다는, 그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
“간자를 통해 확인한 바, 저 성벽 너머에는 식량이 얼마 없더군요. 그러니 주변의 백성들을 싸그리 모아 저 성문 안으로 들여보내 자멸을 하게 만들 것입니다. 소국의 왕자께서 말하신대로,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 저희들에게 겁을 먹은 백성들은 저들 입장에서 좋은 기름 일 테니 장기전을 바라보기 힘든 시점에서 마실 수 밖에 없는 독이지요.”
그의 계책은 얼핏 보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고작 자그마한 마을 몇군데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저 안으로 들여보낸다고 한들, 그 성과를 거두어 들일 수 있을까.
의문이 목끝까지 차올랐으나, 이나스 왕자는 더이상 콜레오네에게 딴죽을 걸지 않았다.
만약, 정공법으로 저곳을 뚫어낸다고 했을 때.
가장 앞장서야 할 선두는 자신의 백성들일테니.
* * * * *
근처의 마을들을 습격하여 오베른 왕국의 백성들을 라비에타 성벽 너머로 들여 보낸 뒤, 어느덧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과정에서 한 번의 보급을 추가적으로 받은 콜레오네의 군대는, 가벼운 노크를 하듯 적의 성벽을 교대로 두드리기만 할 뿐이었다.
눈이 내릴 만큼 추워지는 날씨, 이런 식으로 적군의 피로감을 누적시키려는 속셈을 이나스 왕자는 어렵지 않게 이해했으나……
이래서는 결정타를 먹일 수 없었기에, 도대체 콜레오네가 궁극적으로 노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 번은 막사 안에 회의를 위해 모였을 때, 그에게 넌지시 운을 터보고 싶었으나.
종속국의 왕자에 불과한 자신이, 총사령관인 그의 지시에 반복적으로 의문을 품는 것도 좋은 그림은 아니기에 입을 닫았다.
그렇게 의문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어둑한 밤.
이나스는 채비를 마친 뒤,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앞전의 부대와 교대하여 라비에타 성벽 앞으로 나아갔다.
미리 수면을 취했어도, 밤낮이 바뀐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몸에 적잖은 피로감을 쌓이게 만들었기에 찌뿌둥한 감각이 달갑지 않다.
하지만 이나스는 그것에 불만을 품지 않고,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지시를 받은 병사들이 전열을 올려 성벽을 두드리려던 순간……
퍼걱!
은은하게 내려비추는 달빛 아래, 성벽 위에 있던 적군의 병사가 아래로 추락하여 작게 쌓인 눈밭을 핏빛으로 물들여나간다.
순간 눈먼 공격에 맞은 건 아닐까 싶었으나, 이나스 자신은 공격 지시를 내린 적이 없었기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유독 달빛이 밝은 날이었어도, 그림자가 크게 지는 성벽 위를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한계가 벌써 찾아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오베른 왕국의 주요 귀족들이 각자의 병사와 백성들을 징집하여 저 너머에 모여 있을 텐데.
이 전략에 똑같이 부대를 나누어 응수 하지도 못할 만큼, 적은 수의 병사가 있을까?
그것은 결단코 아니리라.
그러면 성벽 위에 있던 병사가 아래로 곤두박질쳐서 죽어나갈 만큼 피로감을 쌓이게 만든 원인이 도대체 무엇일까 싶어 머리를 굴리던 이나스였으나, 지금 자신이 이것을 고민할 처지는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 전열을 올린 병사들에게 공격 지시를 내렸다.
콰앙!
쿵──!
「 ……… 」
하지만 매번 이 공격에 응수를 하던 적들이 고요하기만 하다.
시간을 오래 돌릴 필요도 없이, 오늘 낮까지만 하더라도 응전을 하던 그들이었는데.
‘설마 이곳을 버리고 도주하였나?’
아니다.
그럴 가능성은 없으리라.
지리적 이점으로 가장 확고한 곳을 버려서 얻는 이득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일부러 총공격을 하게끔 만드려는 미끼일까.
하지만 미끼인것치고는 너무나도 성의가 없었다.
낚싯대를 흔들어 바늘 끝에 걸린 미끼를 살아 있는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의심많은 물고기들도 주둥이를 벌리는 법인데.
“일단 공격을 중지하고, 가서 보고를 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곁에서 이 광경을 보고 지시를 받은 병사 또한 의아함을 머금고 진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고를 마친 병사가 돌아왔을 때, 전해받은 명령은 퇴각 후 휴식을 취하라는 것.
그것을 들은 자신의 병사들은 기뻐했으나 이나스는 좀처럼 찝찝한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저것이 만약 연기라면……’
적에게도 똑같이 반나절 가량의 휴식을 취하게 해주는 꼴이 아닌가?
특히나 적이 그것을 노렸을 가능성──그 자체를 완전히 배제한 콜레오네의 판단은, 마치 모종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역시……’
그 날, 그 때.
저 성벽 너머로 들여보낸 오베른 왕국의 백성들에게 알프레드 후작은 무슨 수를 써놓은 것이리라.
마력을 개화한 인간은 똑같이 마력을 개화한 인간이 탐지를 하는 게 가능했기에, 안쪽에서 무력적으로 훼방을 놓았을 확률은 적었다.
그렇다고 그 백성들 사이에 추가적인 간자를 섞어 들여보냈다 한들, 일반인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으랴.
그나마 머리에 떠오르는 가능성 중 제일 높은 것은 식량 창고를 불태우는 데 성공했다는 것인데……
‘모르겠군.’
하기야 자신이 가늠하려는 것은 무려 제국의 저력이다.
견문이 좁은 자신의 머리로 유추하려 해보았자, 제자리 걸음만 될 뿐이겠지.
오래만에 마음 편히 주어진 휴식.
밤낮이 바뀌어버린 생체 시계를 다시금 조율하자고 생각하며, 이나스는 억지로 쪽잠을 청했다.
* * * * *
고요하게 깊어지는 새벽 속, 달빛이 만들어낸 그림자에 뒤덮힌 라비에타 성벽을 바라보며 콜레오네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런 그를 따라 아침을 알리는 여명이 느릿하게 지평선 너머로 떠오른다.
“준비는 되었느냐.’
“예.”
“그럼…… 가보도록 할까.”
병사들에게는 휴식을 취하라 명령을 해놓고, 자신의 수족들과 함께 걸음을 내딛는 콜레오네가 라비에타 성벽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어젯밤 동안 보고 받은 모든 것이 적들의 연기이고 수작이라 한다면, 어둠 속에 가려진 시야가 조금씩 드러나는 이 순간 적들 앞으로 고개를 버젓이 내미는 콜레오네의 행동은 총사령관 답지 않은 실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느릿한 걸음걸이에는 망설임은 없었고, 흘러 나오는 것은 오직 진득한 여유와 은은한 광기 한 줌.
“예상보다 진행 속도가 빨랐어.”
열흘이라는 시간 보다 더 걸릴 것이라 예상을 했건만.
“발악을 해보았자, 개미새끼는 개미새끼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성벽 앞으로 떨어져 죽어있는 시신 한 구를 먼발치에서 눈으로 확인하며, 콜레오네는 저것을 깔끔히 불태우라 명령을 내린 뒤 자신의 가문에 속한 오러 나이트들을 앞으로 내세웠다.
그러자 그들은 두 손을 뻗어 묵직한 성문에 두 손을 올린 뒤, 오직 완력으로 거대한 철옹성을 열어 젖히기 시작했다.
드득!
쿵!
피잉──!
여러 오러 나이트들이 달라 붙어 있다고는 하나, 성문이 열리는 속도는 지진부진했다.
하지만 기어코 그 완력을 이기지 못한, 성문의 뒤쪽에 고정되어 있던 도르레가 박살나자 마치 창문을 열듯 손쉽게……
끼이익!
쿠웅!
천해의 요새, 라비에타의 성문이 개방 되었다.
“큭……!”
그러자 콜레오네를 비롯해 그의 곁에 있는 수족들을 반기는 건, 여름철 내장까지 썩어 들어간 죽은 물고기에서나 맡을 수 있는 지독한 악취.
그래, 개방된 성문 너머로 보이는 건……
그야 말로 때죽음을 당한 물고기들처럼, 처절하게 죽어 늘어져 있는 시체의 늪이었다.
* * * * *
움찔!
불편한 쪽잠을 자고 있던 이나스 왕자는 코끝으로 스며드는 희미한 탄내에 비몽사몽한 눈을 떠서 황급히 막사 밖으로 뛰쳐 나왔다.
혹여나 외부로 병력을 돌린 적들이 습격을 한 건 아닐까 싶었으나……
“무슨……”
불어오는 공기에 뒤섞인, 희미한 탄내의 주역은──거대한 라비에타 성벽 너머로 치솟아 오르고 있는 불길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두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성문이 개방되어 있는 것이리라.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이 쪽잠을 자는 그 시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고개를 두리번 거리니 다른 귀족들 또한 자신과 표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
그에 이나스는 채비를 마치고 개방된 라비에타 성벽을 향해 나아가는 귀족들을 뒤따라 황급히 걸음을 내딛었다.
“……”
그 끝에 철옹성과도 같은 라비에타의 성문을 넘어서는 순간 그가 볼 수 있었던 건, 한 겨울의 추위조차 모조리 몰아낼만큼 격렬히 타오르는──라비에타라는 영지 전체를 장작 삼아 일렁이고 있는 압도적인 불길의 세례.
타닥.
동시에 태연자약하게 그 뒤에서, 휘날리는 불씨를 맞으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늙은 노인 한 명이……
“다들 휴식은 편히 취하셨습니까.”
자신들을 맞이한다.
* * * * *
“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참으로 가엾은 일이 있었지요.”
툭툭, 지팡이로 바닥을 짧게 내려치던 콜레오네가 그 끝을 옆으로 뻗는다.
그에 자연스레 지팡이를 따라 고개를 돌린 이나스는, 비교적 멀쩡한 외형으로 타들어가고 있는 시신들을 눈에 새길 수 있었다.
“어떻게 이 성문 너머로 무혈입성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만한 학살을 벌이게 되면 여파가……!”
“소국의 왕자께서는 잊으셨습니까. 소인은 황명으로 금지된 일을 하지 않습니다.”
“……”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는 말고, 유심히 저 시신들을 살펴 보시지요.”
콜레오네의 대답에 이나스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불길이 무척이나 거칠었기에 아지랑이처럼 왜곡되는 주변의 풍경이 어지러움을 유발한다.
그래도 집중을 하니, 확실히 조금전과는 명백히 다른 차이점이 두 눈에 들어왔다.
‘이건……’
살점이 움푹 파여 들어간듯한 여러 흉터.
불에 타고 있는 다른 시신들 또한 그 증세가 같았기에, 곧장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 건 “역병”이었다.
확실히 수성을 하는 입장에서 많은 수의 인구가 한 영지에 밀집되어 있으니, 비교적 역병이 돌기 쉬운편이기는 하지만……
오베른 왕국의 귀족들이 아무리 썩어 문드러졌어도, 기본적인 위생 관리조차 하지 못할까?
“백성들에게는 가엾은 일이나, 어찌보면 하늘에서 천벌이 내렸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
이나스를 비롯한, 여타 귀족들은 콜레오네의 말에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차마 “당신이 의도적으로 퍼트린 것이 아니냐는” 목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입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으니까.
애당초 심증은 있어도, 물증은 없는 상태인데.
누가 감히, 알프레드 가문의 노괴를 눈 앞에 두고 그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으랴.
……사실 굳이 따진다면, 이곳에 모여든 귀족들은 눈앞의 결과가 우연의 일치이기를 바라는지도 몰랐다.
시대에 걸맞지 않게 의술이 발전해 있어도.
질병에 걸맞는 백신을 연구하여 개발할 수 있을 만큼 지식과 기술이 깊지는 않았다.
위협적인 역병이 발발한다면, 역학조사를 통해 지역을 구분하고 그 일대를 전부 불사지르는 것이 최선의 수단.
그렇기에 해당 역병의 샘플을 보관하여, 원하는 때에 그것을 병기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건.
흑마법사나, 원소 마법사, 오러 나이트라는 마력 개화자를 제외했을 때 이 시대 최강의 무기라고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것은 분명 양날의 검이다.
이 무기를 감추지 않고 드러낸 시점부터, 불필요한 의혹에 휘말릴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진다.
만약 황손이 병으로 인한 쇠약사를 한다면 알프레드 가문이 의심 받을 것이고.
역병이 돌아도 똑같이 알프레드 가문이 의심 받을 것이며.
그의 가문이 약해지는 순간, 다른 귀족들이 명분 삼아 물어 뜯기 제일 좋은 먹잇감이 되리라.
굳이 그것이 아니어도 종전이 되고 난 후, 안정을 찾은 황실의 힘이 지금보다 더욱 강력해진다면 이것은 도리어 그들의 목을 옥죄는 강력한 목줄이 될 터.
그도 그럴 것이 황실 입장에서 의도적으로 역병을 발생시킨 후, 그것이 알프레드 가문의 소행이라 뒤집어 씌운 뒤 멸문 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나.
‘설마…… 저 노괴는, 일부러 그것을 노리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일까.’
브뤼테인과 황실의 관계가 유독 특이할 뿐.
본디 왕과 귀족의 관계에 맹목적인 충성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었다.
왕의 입지가 강력해진다는 것은, 귀족들의 힘이 약해 진다는 것이고.
왕의 입지가 약해진다는 것은, 귀족들의 힘이 강해진다는 것이니까.
그러니 이것은 어쩌면 매우 현실적인 측면에서 귀족이 자신의 군주에게 보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충성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강력한 권력과 확고한 입지를 다질 수만 있다면, 그 기간 동안 심장에 비수를 꽂을 수 있는 목줄을 쥐어주는 것이니.
“……”
양지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브뤼테인.
음지에서 가장 추악한 알프레드.
각자 방식은 다르더라도.
자신들의 군주에게 보내는 저 충성의 형태가……
이나스는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우물을 벗어나 품고 있는 덧없는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저러한 이들이 떠받들고 있는 제국이라는 거인의 무게를 감당 해야한다는 뜻일 터.
그리고 한걸음만 삐끗하더라도.
눈앞에 보이는 이 학살의 장관이 자신의 왕국에도 펼쳐지리라.
덧없는 꿈은 언제나 처절한 현실의 벽 앞에 가로 막혀 바스라지지만, 이나스는 그 덧없는 꿈을 고이 접지 않았다.
설령 덧없는 꿈을 꾸는 덧없는 왕자로써 생을 마감하더라도, 자신의 왕국이 나아가야 할 미래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기에.
저벅.
흔들리는 결의를 다시금 붙잡고 고개를 들자, 오베른 왕국의 귀족들에게 핍박 받고 있던 왕족들이 구출 되어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구석에 주저 앉아, 이 학살의 풍경을 보며 비웃음을 머금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못 볼 것을 봤군……’
이나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오베른 왕국은 어쩌면 부패한 귀족들과, 엘마르크 제국의 뿌리를 뽑아내기 위해 에르네스 제국을 끌어 들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왕국을 모조리 부수고 잿더미로 만들기 위해 그랬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