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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233화 (233/260)

제 1 황자와 엘리자베스 황녀가 이끄는 군대가 시엘렌 왕국의 국경으로 도달한다.

로벨리움 왕국과 더불어 오랜 세월 자신들의 종속국이었던 곳이지만, 굳게 닫힌 성문은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개방되지 않았다.

“이상하군. 아무리 봐도 수성전을 펼칠 생각은 없어 보이는데.”

높다란 성벽 위로 도열한 병사들은 전투를 앞두고 긴장과 각오를 머금고 있기 보다, 오히려 자신들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애당초 이번 전쟁에 있어서 그들에게 물을 것은 없었고, 오히려 협력을 통해 엘마르크 제국 쪽으로 군대의 기수를 돌려 보급을 막는 것이 목적인데……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시엘렌 왕국의 국경을 지키는 사령관과 자리만을 만들어 주세요. 오라버니.”

“그러마.”

상대방의 의중을 알 수 없다면, 그 의중을 캐내면 그만이었기에.

제 1 황자는 병사들의 진군을 멈춰 세우고 진지를 짓도록 명령한 뒤, 커다란 성문 너머로 자신들의 사자(使者)를 보내 사령관을 초청했다.

국경의 성벽을 지키는 사령관을 보고서 직접 밖으로 걸어 나오라는 것은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무례이기는 했으나.

애초에 이것에 응하지 않는다면 수성전을 펼칠 것이라고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다른 바가 있다면 얌전히 초청에 응하려 들 터.

‘어이가 없군.’

하지만 막사 안에서 이곳의 국경을 지키는 시엘렌 왕국의 변경백을 기다리면서도, 제 1 황자는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흘러 나왔다.

저들이 저런 스탠스를 취해야 할 이유도 없었거니와, 설령 있다고 한들.

이것은 엄연히 자신들 에르네스 제국을 업신 여기는 행동이 아니던가.

저벅.

곧이어 성벽 너머로 보냈던 사자들이 막사 안으로 들어오자, 제 1 황자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그들의 곁에는 이곳의 국경을 지키는 시엘렌 왕국의 변경백이 함께 따라오지 않았기에.

“한시가 급한데. 저들은 우리가 무척이나 여유가 있어 보인다고 느끼는 것 같군.”

“오라버니.”

“……엘리자베스. 너는 내가 너무 지나치게 감정적이라고 생각하느냐?”

“그것이 아니오라, 시엘렌 왕국의 변경백은 저희들의 초청에 응했습니다.”

“뭐?”

의아함을 머금는 제 1 황자가 돌아온 사자들을 훝어 보기 무섭게, 한 사내가 앞으로 걸어나오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극진한 예의를 취했다.

“……소인이, 에르네스 제국의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보냈던 사자와 옷을 바꿔 입고, 타인들의 눈을 피해 이곳으로 온 것에는 이유가 있겠지요. 펠크리엘 변경백.”

“예. 실례가 안된다면, 이 늙은 변경백의 말을 들어주시렵니까.”

또각.

이곳의 총사령관은 엄연히 자신의 오라버니, 제 1 황자였기에 엘리자베스 황녀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 그에게 선택권을 맡겼다.

“주변 사람들을 밖으로 물러주길 원하나.”

“그래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전하!”

“이견은 받지 않겠다. 이것은 총사령관으로 내리는 명령이니, 그대들은 막사 밖에서 대기를 하도록.”

안색이 시퍼래진 가신들이 재고를 간청했으나, 결국 명령을 거두어 들이지 않는 제 1 황자의 모습에 하나 둘 막사 밖으로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그렇게 제 1 황자와 엘리자베스 황녀만이 막사 안에 남게 되었을 때, 펠크리엘 변경백은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저…… 펠크리엘은, 에르네스 제국의 길을 막을 생각이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성문을 개방하지 않았지?”

“막을 생각은 없사오나, 길을 터줄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변경백. 나는 그대와 농을 주고 받을 만큼 한가하지 않아.”

“전하.”

주어진 작위에 걸맞지 않게, 늙고 주름진 얼굴로 자신을 마주하는 펠크리엘 변경백을 보며 제 1 황자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하나, 손해를 보고 싶지 않은 겐가.”

“그렇습니다.”

감정에 치우치는 면이 자주 있으나, 그도 엄연히 황실의 혈통.

지혜의 신에게 축복을 받은 엘리자베스 황녀와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어도, 펠크리엘 변경백이 내뱉은 말을 통해 시엘렌 왕국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눈치를 챌 수 있었다.

“그 청은 들어줄 수 없네.”

이들이 바라는 것은 그저 지속되기만 할 뿐인 대치──한 마디로, 자신들의 중립 표방을 존중해달라는 것이리라.

그리고 제 1 황자는 펠크리엘 변경백의 요구 사항을 “간청”으로 표현했으나, 엄연히 따지자면 “협박”에 가까웠다.

중립 표방을 존중 해주지 않는다면, 엘마르크 제국의 편을 들것이라는 중의적 표현이기도 했으니.

“변경백.”

“예.”

“여기서 내가 그대의 목을 쳐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나.”

“……예. 충분히 인지를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위협을 가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닐세.”

몸을 일으키는 제 1 황자가 검을 빼내들어 그 서슬퍼런 칼날을 펠크리엘 변경백의 목에 들이민다.

“여기까지 와서 할 말이 그것이 전부라면, 그대의 목을 베고 저 성벽을 넘겠네.”

날카롭게 조여드는 분위기 속에, 뒤로 한걸음 물러나 있던 엘리자베스 황녀는 자신의 오빠인 제 1 황자와 다르게 옅은 연민을 품고 펠크리엘 변경백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는 눈치 채지 못하신듯 하나……’

펠크리엘 변경백은 입을 열었을 때, 그 주어를 “저희”라 하지 않고 “저”라고 했다.

그 말은, 지금 이 상황 전부가 오롯이 그의 독단이라는 뜻.

그리고 펠크리엘 변경백은 자신의 목에 들이밀어진 칼날을 보며, 늙고 주름진 얼굴을 들어 올려 제 1 황자와 시선을 올곧게 마주했다.

그런 그의 표정에는 많은 것을 체념한듯한 기색이 서려 있어, 마치 자신의 죽음을 각오한 사람 같아 제 1 황자는 자신도 모르게 검을 쥐고 있는 손을 움찔 떨었다.

“전하께서는…… 왕실의 일원으로써 가져야 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주군을 모시는 가신의 심정이 어떠한지 아십니까.”

“……”

“소인이 자랑 할 것이라고는 오래 살았다는 것 밖에 없사오나, 오히려 그탓에 왕실의 완연한 몰락을 곁에서 지켜보게 되었기에 통탄을 머금치 못하겠더군요……”

“……”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저희의 왕과 휘하의 왕자들은 깊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어느때처럼 에르네스 제국에 의존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 하였습니다.”

“그대들은 우리의 오랜 종속국이다. 그 판단이 이상하다고 할 수는 없을 터.”

“하하…… 이상한 것입니다. 전하. 그것은 약자가 약자로써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라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강자의 발등을 핥으며 그 굴욕적인 평화에 기생을 하려 했던 것이라면.

아직 대륙의 패자가 정해지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벌써부터 고개를 숙이려 한단 말인가.

“만약, 이 전쟁의 승자가 엘마르크 제국이라면…… 그 판단을 취했을 때 저희 왕국은 말로 이루지 못할 배상금과 보복을 받아야 하겠지요.”

“불쾌하군.”

“불쾌하십니까. 하지만 이것이 약자의 삶입니다.”

“……”

“그리고 저희의 왕실은…… 그런 약자의 삶 속에 담겨 있는 희생과 대가, 굴욕으로 점칠된 역사를 하나도 체감하지 못하고 있지요. 마치 아직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지 못한 아이처럼 말을 잘 듣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 믿는 철부지 같습니다.”

“변경백. 어설픈 동정론으로는 나를 설득 할 수 없다.”

“예. 여기까지는 하찮은 노인의 푸념이었고…… 앞서 말했다시피 저는 에르네스 제국의 길을 막을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길을 터줄 수도 없다고 하였지.”

“굳이 따진다면 길을 터주지 않은 모양새로 충분합니다.”

“무슨 뜻이지?”

의문을 제기하는 제 1 황자를 보며 펠크리엘 변경백은 품안에서 서류 한장을 꺼내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것을 펼쳐 읽은 제 1 황자는 아무 말 없이 펠크리엘 변경백을 내려다보았다.

“저 성벽 너머, 현재 제가 보유하고 있는 물자의 총체적인 양입니다. 못해도 서너번의 보급보다는 많은 수준이겠지요.”

“……”

“제 휘하 가신들을 통해 괴이와 거래하여 엘마르크 제국 간자들의 눈을 피해 황자 전하의 군대를 성벽 안으로 이송하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줄어든 군대가 티나지 않도록 영지민들을 보내어 변장 시킬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이렇게 되면 엘마르크 제국은 여전히 에르네스 제국이 이곳에서 대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 테니 그들의 보급부대를 섬멸하기에는 더욱 효과적일 것입니다.”

“포장은 잘 했으나, 거기에는 터무늬 없는 허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저 성벽 너머에 엘마르크 제국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고.

자신들을 안으로 불러들여 전멸시키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 저 말을 곧이 고대로 신뢰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말을 마친 제 1 황자는 자신의 뒤에 있는 여동생, 엘리자베스에게 눈짓으로 간결한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앞으로 걸어 나오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고운 목소리로 입을 연다.

“변경백. 당신의 제안은 얼핏 보면 매력적이나 저희가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일겠지요.”

“예…… 하지만 믿어 주시 옵소서. 휘하 가신들은 보는 눈 앞에서 마력에 대한 맹세를 할 것이고. 영지민들은 저를 신뢰하고 있는데다가 에르네스 제국에도 상당히 호의적인 편이라 불상사는 없을 것입니다. 가장 염려하고 있을, 저 성벽 너머에 엘마르크 제국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을 변수는 저를 대신해 성벽 너머에 남은 사자(使者)로부터 전해 들으실 수 있겠지요.”

……그의 속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내뱉은 말과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오빠인 제 1 황자에게 눈짓으로 진실임을 알리고 다시금 뒤로 한 걸음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얼굴에서는 측은지심과 함께 불쾌함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이번 전쟁에서 자신들이 승리한다고 한들, 시엘렌 왕국의 국경──정확히는 펠크리엘 변경백의 관할 지역을 온전히 넘겨 받아야 하리라.

누군가는 합동 작전을 한 것인데, 어찌하여 한 국가의 국경을 좁혀 버리는 벌을 내리는가하고 의문을 품을지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합동 작전”이 아니라 “타협안”이었다.

가장 좋은 수는 전적으로 협력을 받아 엘마르크 제국을 압박하는 것인데.

엘마르크 제국의 편을 들어 줄수도 있다는 협박하에 그러지 못하고 우회한 것이니, 어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있을까.

힘으로 이 성벽을 넘는다 해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독단이기에.

수도에 있을 시엘렌 왕국의 왕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뻔한 것이었다.

엘마르크 제국이 조금만 바람을 불어 넣어줘도 냉큼 고개를 돌리고 말겠지.

더불어 엘마르크 제국이 승리하였을 때도, 그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갑자기 자신들이 나타나 보급로를 끊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그와 협력하였다는 사실을 알아 차릴 터.

다만, 앞서 말했듯 이 모든 것이 그의 독단이기에.

엘마르크 제국 또한 그 책임을 제일 강대하게 묻는 것은 펠크리엘 변경백 뿐이리라.

그래.

눈앞에 있을 저 늙은 노인, 아니 충직한 가신은.

자신의 목숨과, 가문의 명예를 전부 걸고서.

이제는 왕의 소신과 위엄을 전부 잃어버린 자신의 주군과 휘하 왕자들에게 고하고자 하는 것이다.

약자가 강자에게 빌붙어 기생하는 평화는, 부모의 말을 잘 듣기만 하면 잘 지낼 수 있는 아이 같은 삶이 아니라.

그만한 대가와 희생을 치루고서 이루어지는 결과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엘리자베스 황녀가 펠크리엘 변경백을 통해 느낀 측은지심과 불쾌함은.

언젠가 먼 훗날, 자신들 제국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을 때.

브뤼테인이 마주할 최후가 저러지 않을까 하는, 그러한 겹쳐보임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돌아가는 시국이 참으로 웃기기만 하다.

로벨리움 왕국은 왕으로서 가져야 할 소신과 위엄이 있으나, 그런 그들을 지탱해줄 가신이 없었고.

시엘렌 왕국은 지탱해줄 가신이 있으나, 소신과 위엄을 가진 왕이 없었다.

운좋게 자신들 제국은 그 두가지를 모두 붙잡아 황실을 권위를 회복하였지만, 좋은 반면교사가 되어주는 두 왕국을 볼 때 마다 그것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만이 뇌리에 강하게 틀어 박힌다.

‘그러니……’

지지 않는 태양이 될 수는 없어도.

가장 오래 타오르는 태양이 되어 보이겠다고, 그렇게 다짐한 엘리자베스 황녀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더이상 측은지심과 함께 불쾌함은 찾아 볼 수 없었고, 아름다운 백금발처럼 찬란히 빛나는──은은한 위엄과 기백만이 서려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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