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강림시킨 괴이와 전투를 하는 그레모리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것을 보아하니, 상당히 기나긴 거리를 걸어 왔다고 페르젠은 생각했다.
“사…… 사…… 살려, 사, 살려 주세요……”
그리고 자신에게 꼬리가 밟혀 사지로 몰린 적군의 마법사가 짧은 상념을 깨트리는 비참한 구걸을 해오자, 페르젠은 무감정한 붉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지체할 여유 따위는 없으니, 대번에 이사벨을 통해 그녀의 머리통을 터트리고 지나갈 생각이었으나……
툭.
몰아치는 눈보라에 그녀가 입고 있던 로브가 벗겨지며, 리지와 똑닮은 듯한 붉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는 순간 페르젠은 자신도 모르게 호흡을 멈추었다.
‘그래……’
내가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악!”
눈밭 위에 고개를 조아리며 목숨을 구걸하는 그녀의 머리채를 쥐어들어 품평하듯 훑어내리던 페르젠은, 곧이어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의 제단을 쓰다듬어 명계의 문을 열었다.
고정되는 층수는 3층이 아니라 1층.
그리고 거래를 하는 대상은 흉내쟁이.
“제, 제발……!”
소모되는 재화의 양은 비교적 그리 많지 않았기에 본체를 강림시켜, 눈앞의 여인에게 리지의 모습을 완전히 덮어 씌운다.
자신의 강박증을 이것으로 완화 시킬 수 있을지.
명확한 확신은 없었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걸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그 대가가 얼마 되지 않는 재화를 비롯해 적군의 목숨이라면, 저울질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아, 아……”
로브를 풀어내고, 제복을 살짝 젖혀 드러나는 그녀의 쇄골에 고개를 묻는다.
능력을 빌려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본체를 강림시켜 겉모습을 바꾼 것이기에 그 완성도는 상당히 높았다.
땀냄새에 뒤섞여 풍겨오는 체취는 명확히 리지의 것이었고.
그날밤 선명히 각인된 그녀의 체형 또한, 자신의 품안에서 선명히 그려진다.
그렇게 페르젠은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이 “리지” 라고 스스로에게 강렬히 속삭이며……
푸욱.
“흐, 아……?”
그녀의 오른쪽 귀를 잘라냈다.
“아…… 악! 아아아악!”
흠잡을데없는 리지의 목소리로 익숙한 비명을 내지르는 적군의 마법사.
그러나 페르젠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자신의 양 무릎으로 어깨 부근을 단단히 짓누르며 가냘픈 턱을 커다란 손으로 움켜 쥐었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공포에 떨고 있는 우측의 보랏빛 눈동자로 손을 뻗어 눈꺼풀을 위로 끌어 올린 뒤……
뜨득!
“흐…… 끄흐윽! 아……! 아아악!”
단숨에 안구를 적출해낸다.
그러자 푹 파인 눈가를 눈꺼풀이 덮어버리고.
눈물을 대신하여 흘러내리는 피가 그녀의 뺨을 처절하게 물들여나갔다.
“……”
하지만 페르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지가 새겨 넣은 영원히 맞출 수 없는 대칭이라는 주박이 풀리지 않는 것을 느꼈다.
애당초 눈앞에 있는 여인이 리지가 아니고.
단순히 껍데기만을 뒤집어 쓰고 있을 가짜라는 건, 그 누구보다 자신이 똑똑히 알고 있으니.
이것은 처음부터, 정해진 결말을 향해 발버둥치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남은 것은 손끝에 남는 불쾌한 감각과, 자신의 옷자락을 물들여나가는 애처로운 핏자국 뿐.
그에 페르젠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킨 뒤,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적군의 마법사를 곱게 죽여주고서 힘없는 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고약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구나.”
“……”
사박.
눈보라 너머로 인기척을 감추지도 않고,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그레모리.
“고상하다고 불리우는 사람일수록, 그 속내는 언제나 썩어 문드러진 법이지.”
“……”
“어찌, 지금의 본녀를 보고서 그대는 오히려 욕정을 할까.”
뜯겨져 나간 오른발에 철심을 박은 뒤 마력을 둘러 조잡한 의족을 달고 있는 그레모리가 특유의 푸른 머리카락을 만지작 거리며 조소를 머금는다.
‘욕정이라……’
그런 감정은 일체 들지 않으나, 왼팔이 없는 그녀에게는 제법 어울리는 대칭이라는 생각 정도는 들었다.
애초에 중요한 건, 빈틈을 노리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자신의 무력을 믿는 오만함인지.
아니면 생각하는 다른 수가 있는 것인지.
물론, 그레모리 입장에서는 자신이 세운 가설을 완전히 철회한 건 아니었기에 의도적으로 페르젠의 목숨을 노리지 않았을 뿐이다.
현재 남아 있는 마력은 고작해야 5%.
그 정도 마력 수치를 가지고 저번처럼 회피가 불가능한 거리에서 괴이에게 붙들리면 손해를 보는 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당연히 그 점을 고려하더라도, 조금전 페르젠이 보였던 빈틈은 너무나도 먹음직스러웠으나.
목숨을 판돈삼아 도박을 하기에는, 이미 겪었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러지 않았다.
목표로 하는 건 압박만을 가해 명계의 문을 열게 만들고 깔끔히 퇴각을 하는 것.
“……”
그리고 페르젠은 그레모리가 선보이는 필요이상의 경계에 의문점이 들었지만 그 이상을 유추 해내지는 못했다.
적의 오판까지 고려할 여유는 없었으니까.
다만, 그녀가 지금 당장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명료히 알것 같았다.
“꼬라지가 생일날 선물을 기대하는 아이 같구나. 그레모리.”
“……”
“그래…… 원한다면 해주지 못할 것도 없겠지.”
제단을 쓰다듬어 명계의 문을 여는 페르젠이 조용히 그녀를 쳐다본다.
하지만 고정되는 층수는 3층이 아니라 2층.
“본녀를 얕잡아 보는 것이냐?”
“얕잡아 보는 것이 아니라, 네게는 교섭에 대한 재능이 없을 뿐이다.”
“……”
“생각할 것이 많다. 네 유흥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으니, 이것으로 만족하지 그러나.”
제법 발칙한 도발이었지만, 등을 돌려 눈보라 너머로 이사벨과 함께 서서히 사라지는 페르젠을 그레모리는 감히 쫓지 못했다.
콰앙!
아니, 그 망설임을 떨쳐내고.
열리는 명계의 문으로부터 자신에게 달려드는 괴이를 검날로 튕겨낸 뒤, 오른팔을 뒤로 뻗어 페르젠의 등을 겨냥한 그레모리가 그대로 우악스런 힘을 담아 검을 내던진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그레모리는 자신이 세운 가설이 사실이면 어쩌냐는, 옅은 후회를 머금었으나.
이만한 조롱을 받고, 그것을 돌려주지 않는 것 또한 성에 차지 않았다.
파지직!
그러나 그것 정도는 간단히 예상을 했다는 듯, 강렬한 전류 다발이 자신의 검을 불태우며 폭풍처럼 피부를 스치고 지나간다.
따끔따끔한 그 감각 속에서 간신히 눈을 뜨니, 거대한 자기장의 폭풍이 몰아치는 눈보라조차 밀어내며 바닥에 쌓인 눈을 타다닥 태워 나가고 있었다.
“네게 주어진 그 힘이 없었다면……”
“……”
“너는 틀림없이, 상당히 귀찮고 보잘것 없는 계집이었을 것 같구나.”
하.
자신을 제대로 응시하지도 않고, 독설을 내뱉은 페르젠이 느린 속도로 서서히 거리를 벌려 나가자 그레모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맞이하는 것은 곁에서 달려들 준비를 하는, 명계의 2층에서 강림한 괴이 뿐.
‘……그 자신감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 심히 궁금하구나.’
키우는 애완견과 어울려주듯, 달려드는 괴이의 공격을 피하며 시간을 버는 그레모리가 자신의 마력을 채워 나간다.
현재까지 희생된 신체의 부위는 왼팔과 오른발.
그 뜻은 임의적으로 낼 수 있는 마력의 출력이 더욱 높아졌다는 뜻이니.
지금까지 페르젠이 치루었던 대가로는 더이상 자신의 신체를 갉아 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본녀가 그대를 잡아 먹는 것이 더욱 빠를지, 아니면 그대가 본녀를 잡아 먹는 것이 더욱 빠를지……’
심히 기대가 된다며, 이내 시간을 끌며 회복한 마력을 자신의 오른팔에 두른 그레모리가 달려드는 괴이의 머리통을 박살낸다.
* * * * * *
스륵.
고갈된 마력으로 인해 강제로 연결이 풀리자, 눈밭 위로 쓰러지려는 이사벨의 시신을 두 손으로 곤히 안아든 페르젠은 새하얀 입김을 내뱉었다.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기는 했지만, 불안정한 연결을 통해 시신을 사역하는 것은 상상이상으로 마력을 많이 잡아 먹었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다음 번 전투를 치루게 되었을 때, 남아 있는 브뤼테인의 전대 가주들과 그녀를 함께 사역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아니, 사실 지금은 전쟁의 양상 뿐만이 아니라 종전이 되고 난 이후도 문제였다.
“이사벨.”
“……”
“이사벨 론 피에르 제노바.”
시신에 불과한 그녀가 자신의 말에 대답을 해줄리 없다는 건, 스스로가 그 누구보다 더욱 잘 알고 있었으나……
애당초 그런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페르젠은 그녀의 얼굴에 달라 붙은 눈을 치워주며 말을 이었다.
“내게 기다리는 결말 또한…… 너와 별반 다르지 않을까.”
힘없는 목소리에 뒤섞인, 애써 감추고 있는 희미한 절망은 그의 커다란 등을 더욱 왜소하게 만든다.
그리고 뒤늦게 말하지 못하고, 자신을 안아 주지도 못할 시신에게 위로를 받고자 하는 스스로를 자각하며 페르젠은 쓰게 웃었다.
“되었다.”
“……”
“이사벨. 나는 결코…… 너와 같은 결말을 보지는 않을 것이다.”
아공간으로 그녀를 회수한 뒤, 고개를 들어 걸음을 내딛는 페르젠은 얼핏 보면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왜소하게 보이는 그의 등은, 몰아치는 눈보라조차 동정심이 생긴 것인지.
더욱 많은 눈을 머금은 채, 그의 모습을 가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