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 명을 내려주십시오.”
초상을 치르는 사내처럼 힘없이 등을 내보인 채 서있는 페르젠을 보며 그레모리는 자신을 부르는 기사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칠게 몰아치는 눈보라에도 가려지지 않는, 명계의 3층에 서식하는 괴이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존재감.
그탓에 혹여나 눈밭에 숨어 매복 하고 있을 적군의 기척을 탐지하는데 애를 먹기는 했으나, 인간의 육체를 초월한 그녀의 육신은 기어코 이 근방 전체를 샅샅히 훑어낸다.
‘없군.’
그렇다면 그는 혼자 이곳에 있다는 말이 될 터.
아니, 정말로 그러할까.
사실은 혼자 이곳에 있는 게 아니라.
혼자 이곳에 남은 것이 아니련지.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응하는, 에르네스 제국의 키 카드는 틀림없이 페르젠.
그것을 본인도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굳이, 여기까지 와서 자신들을 불러 들이고.
재화를 소모해 명계의 문을 열었다는 건, 노리고 있는 다른 수가 있다는 것이리라.
‘흐음……’
이 세계는 전술이 전략을 웃도는 곳이다.
그렇기에 그 뜻을 다르게 치환하자면.
결국, 사용할 수 있는 전략이라는 건 한정되어 있기에 유추하는 것이 어려운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예컨대 자신이라는 존재를 탐스럽게 드러내면서까지 이 설원을 통과시켜야 할 아군이 있었다거나.
그게 아니라면 치루었던 전투의 연장선으로, 한번더 보유하고 있는 재화의 양이 넉넉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
“드뤼앙.”
“예.”
“너는 진지로 돌아가 인원을 간추린 뒤, 곧장 루벨타 강으로 향해 보거라.”
“알겠습니다.”
페르젠의 의중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그 가짓수가 많지 않다면 전부 대응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자신들 제국의 저력이 그 정도도 안되는 건 아니었으니까.
“자. 그러면……”
검을 빼내드는 그레모리가 설원의 눈밭을 조심스레 즈려 밟으며 눈보라 너머에 웅장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괴이를 향해 칼끝을 겨눈다.
“남은 우리는 이곳에서 제 역할을 다 해보록 하자꾸나.”
담담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그녀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나, 그것은 즐거움 보다 명확한 비웃음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계속해서 보유하고 있는 재화가 많다고 강조하는 듯한 이 수작들은, 궁지에 몰린 고양이가 날카롭게 털을 곤두세우고 이빨을 드러내는 것 같았기에.
‘페르젠. 네 놈도 알지 않느냐.’
우리 같은 존재가 강한척을 하는 것 만큼, 약해 보일 때가 없다는 걸.
‘작구나.’
호적수로 인정하고 있었던 사내의 등.
그것이 어느덧 아이처럼 자그맣게 보이자, 그녀는 몰려드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 * * * *
“……”
쌓이는 눈에 완전히 파묻혀 더 이상은 보이지 않는 리지의 흔적들을 쫓다, 페르젠은 새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 영원히 맞출 수 없는 대칭. 」
그것에 울부짖는 자신의 강박증세가 몰아치는 무수한 상념을 짓밟으며 자신의 뇌리를 잠식해나간다.
결단코 달갑지 않은 감각이었으나, 페르젠은 차마 그것을 뿌리치지 못했다.
눈을 깜빡일 때 마다 찾아오는 잠깐의 어둠, 그 너머로 리지의 마지막 순간이 선명히 비추어지는 것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새겨 넣은 주박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증거일 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젠은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왜냐하면 별동대를 루벨타 강으로 올려보내는 것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에르네스 제국의 진지로 안전히 귀환하는 것──거기까지가 이번 작전의 골자였으니까.
개인의 욕심은 이미 충분히 우선했다.
그렇기에 그를 이끄는 건, 브뤼테인의 혈통이자 제국의 기둥으로써 가지는 사명감.
저벅.
“끄아아악!”
눈밭을 걷는 페르젠의 모습은 패잔병처럼 나약하고 추해보였으나, 그런 그를 보호하고 있는──108개의 머리를 가진 명계의 괴이를 넘어서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좀처럼 쉬운일이 아니라고 표현하는 것 또한 낙엽처럼 바스라지는 인간들에게 동정심이라는 최소한의 선의를 품고 해준 포장이리라.
현재 마주보고 있는 괴이에게 대항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신화 앞에 보잘것 없는 인간의 역사를 들이미는 격이었으니.
털썩!
“끄…… 커, 커헉……”
허리 아래로 신체가 모두 뜯겨져 나간 적군의 기사가 포물선을 그리며 자신의 앞으로 떨어진다.
새하얀 눈밭을 붉게 물들이다 못해, 그것을 녹여나가는 뜨거운 피의 향연.
그리고 거기에 뒤섞여 흘러 나오는 내장들과 장기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대번에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큼 참혹한 광경이었으나, 페르젠은 무덤덤하게 그 곁을 지나쳤다.
쿠웅!
기사들을 희생양으로 밀어 넣고 자신의 목을 노릴 법도 한데, 그레모리는 순수하게 자신이 강림시킨 괴이와의 전투를 이어 나간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젠은 전열을 늘어 트리며 자신의 퇴로를 막는 적군의 마도 부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역시 그녀가 자신을 간단히 놓아 줄리는 없을 터.
신경을 끄고 강림시킨 3층의 괴이와 싸우는데 집중을 한다는 건, 그만큼 그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놓았다는 뜻이겠지.
그에 페르젠은 새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아공간에서 이사벨의 시신을 꺼내들었다.
‘……’
그러나 계속해서 머리를 어지럽히는 극렬한 강박 증세에, 연결된 마력은 불안정했고.
그것이 자연스레 평소보다 저조한 구현율로 이어지자, 페르젠은 억지로 마력을 더욱 소비해 강제적으로 구현율을 끌어 올릴 수 밖에 없었다.
이럴 경우 시신을 사역하는 마력의 소모값이 더욱 높아지나, 선택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신을 사역하지 않고 흑마법사가 가질 수 있는 공격 수단은 명계를 통한 거래 뿐이었으니까.
그리고 대놓고 습격과 후퇴를 반복하며 자신의 발걸음을 늦출 뿐인 잡졸들에게 어찌 명계의 문을 열 수 있으랴.
콰드득!
마력을 원소로 형질 변환 시켜 직접적인 위협을 취하기 보다는, 대기와 대지에 간섭하여 자신의 걸음을 늦추는데 집중하는 적군의 마도 부대.
확실히 “간섭”하는 쪽은 식을 역산하여 무력화 시킬 수 없기에, 격차를 인지하고 있다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쩌적!
하지만 페르젠은 그것을 비웃듯, 크레바스처럼 생겨난 거대한 균열 사이를 얼음으로 메꾸며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적군의 마도 부대는 진작 기사들에게 안겨 멀찍히 거리를 벌려 달아나고 있는 상태.
이런 식으로 자신의 마력을 조금씩 갉아 먹으며 시간을 벌겠다는 속셈이겠지.
그러나 페르젠은 그 재롱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었기에, 자신의 마력을 반절 가량 소모하여 이사벨을 통제했다.
쿠웅!
처음에는 마치 천둥이 울리는 듯한, 거대한 소음이 몰아치는 눈보라를 꿰뚫고 울려 퍼졌을 뿐이다.
쿠우웅!
하지만 곧이어 눈보라에 가려져 희미하게 보이는 지평선 너머부터 시작해, 그 양옆의 대지가 솟구치기 시작하더니……
“마, 말도 안되는……!”
거대한 삼면의 벽을 만들어 달아나고 있는 적군을 통째로 집어 삼키려 들었다.
“빠, 빨리!”
이것이 아폴리온 등급의 마법사가 가지는 위용이란 말인가.
전장에서는 자신의 황제, 그레모리가 그를 철저히 막아섰기에 피부로 와닿는 격차가 확실하지 않았으나.
직접 그의 표적이 되어 보니, 오금이 저려오는 듯 했다.
그러나 여기서 가만히 죽어 줄 수는 없었기에, 원소 마법사들은 핼쑥한 표정으로 재빨리 발판을 만들어 주었고.
그들을 안고 있는 기사들은 그것을 밟아 빠른 속도로 치고 올랐다.
콰앙!
하지만 그 못지 않게 조여오는 벽면의 속도도 빨랐기에, 뒤집어진 삼면의 벽──그 꼭대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건 고작해야 절반의 인원이었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들은 덜덜 떨며 펼쳐진 광경에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아무리 페르젠이 아폴리온 등급의 흑마법사이고, 그 경지와 대등한 원소 마법사의 시신을 사역하고 있다 한들.
대지의 판(板) 자체를 일으켜 세운 건 아니었다.
페르젠이 자신의 마력으로 간섭한 건 어디까지나 지표면의 일부.
그러나 그 넓이와 두께를 생각했을 때, 감히 정면으로 맞선다는 선택지는 깔끔히 지워버리게 만드는 격차가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쿠구궁!
이윽고 도형을 전개시키듯, 일으켜 세운 지표의 삼면이 가라앉기 시작하자 꼭대기에 올라있던 생존자들은 곧 다가올 충격에 대비했다.
페르젠 또한 자신이 만들어낸 광경 앞에 가만히 서있다, 맞부딪친 지표면이 떨어지는 과정에서 쌓여있던 눈들이 눈사태처럼 떨어지기 시작하자 이사벨을 통해 자신의 마력을 물로 형질 변환 시킨 뒤 그 온도를 상당히 높게 끌어 올렸다.
촤악!
허공을 도화지삼아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나가듯.
물의 장벽에 맞닿은 눈들이 수증기를 토해내며 아지랑이처럼 넘실거린다.
그리고 그 사태가 종료 되었을 때, 페르젠은 걸음을 내딛으며 조용히 앞으로 나아갔다.
탈출하지 못했던 이들이 있어도, 아마 숨통은 붙어 있을 것이다.
높디 높게 쌓였던 눈들이 틀림없이 충격의 대부분을 흡수해주었을 테니까.
그래서인지 마치 보물찾기처럼, 눈밭에 쓰러져 질긴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적군을 발견했을 때……
파지직!
페르젠은 일일히 그들의 목숨을 거두며, 에르네스 제국 측의 진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