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230화 (230/260)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는 기괴한 광경이다.

아무런 무장조차 하지 않고 적진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마주친 적군들이 그 어떤 창과 칼도 들이밀지 않는 격이 아닌가.

그렇기에 리지는 굳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수단을 활용하는 것에만 집중을 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밀려드는 불안감에 그의 모습을 본따만든 봉제인형을 꾸욱 움켜쥐게 된다.

“리지.”

“……”

“죄로 얼룩진 삶이더라도, 나는 그 삶에 한점의 후회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그 인생에 새겨진 후회와 미련이 있다면.

“그 날, 너를 죽이지 않은 것이다.”

감추고 있던 오점을 일부나마 드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욕심을 부려야했고, 고집을 써야 했다.

하지만 아내들에게 좋은 남편이 되어주고 싶다는 소망과.

형님에게 떳떳한 동생이 되어주고 싶다는 바람과.

자랑스러운 황실의 기둥이 되고 싶다는 염원에 그러지 못했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아마 자신은 억울했던 것이리라.

이서진과 페르젠의 자아가 뒤섞인 지금, 자신은 엄연한 제 3의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 날 리지를 죽이지 않은 것은 이 몸뚱이에 짊어진 업보를 왜 자신이 감내해야만 하냐는──그런 유치하고 위선적인 토로의 편린이었으리라.

물론 가문도, 가족도, 모든 인생이 망가진 그녀이니.

감히 자신에게 그 어떤 해코지도 할 수 없을 거라 믿고, 스스로의 행복을 읽어 나가려 했던 그 날의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날의 자신이 간과한 것이 있다면,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이라는 인물은 언제나 타인의 불행을 촛대 삼아 자신의 행복이라는 책을 읽어 왔다는 것이다.

스스로 촛대에 불을 밝혀 행복이라는 책을 읽어낼 수도 없는 주제에, 그 날의 자신은 왜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

‘……성경을 읽기 위해 촛대를 훔치지 말라고 했던가.’

이서진의 기억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한 구절을 떠올리며 페르젠은 이내 설원의 한 가운데서 걸음을 멈추었다.

성경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해당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양심을 더럽히는 행동을 하면서까지, 본인의 욕심이나 대의를 충족시키지 말라는 뜻일 터.

그러나 오직 그러한 인생을 살아왔고, 쥐어진 수단이 그 길 밖에 없는 것이라면.

매번 호소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 채, 어둠속에 가려진 행복을 읽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그래, 애당초 그러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시엘 미드포드를 죽이고 유페미아를 손에 넣지도 않았으리라.

스륵.

이윽고 페르젠이 자신의 제단을 매만지며 품안에 안겨 있는 리지를 내려다본다.

쿠웅!

그러자 눈이 가득 쌓인 설원 위로 명계의 문이 열리더니, 그 너머로 희미하게 명계의 풍경이 비추어지며……

끼긱!

좁디 좁은 문 사이로, 너무나도 커다란 솜뭉치 하나가 튀어 나온다.

파삭!

그 솜뭉치가 위치한 지역에 새겨진 적군의 진은 당연히 산산이 조각났고.

곧이어 그 솜뭉치가 스르륵 풀리더니, 뱀처럼 생긴 108개의 머리를 드러내며 설원을 누비기 시작한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느껴지는 격렬한 진동음이었기에, 머나먼 곳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별동대들은 그 즉시 움직임을 취해 이 지역을 직선으로 가로질렀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페르젠은 짧은 시간 동안 느껴졌던 다수의 인기척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품안에 안겨 있는 리지를 설원 바닥에 조용히 내려 놓았다.

“리지. 나는 네 가족을 죽였다.”

“……”

“나는 네 가문을 멸문시켰다.”

“……”

“그리고 나는, 네 인생을 망쳐 놓았다.”

그 사실로 부터 눈을 돌리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완연한 악당의 모습으로.

“이제, 나는 너를 죽일 것이다.”

“……”

“우리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보도록 하자꾸나.”

건네 받았던 레이몬드 황자의 검을 빼내드는 페르젠이, 그 끝을 리지에게 겨눈다.

이 방법 밖에 모르고.

이 수단 밖에 없으니.

‘나는……’

촛대를 훔쳐서라도, 기꺼이 나의 행복을 읽어 나가겠다.

* * * * *

잘 관리된 서늘한 칼끝이 자신을 겨누자, 그것을 바라보던 리지는 고개를 치켜들어 페르젠의 붉은 눈을 마주보았다.

“25년간 옭아맸던 강박증이 자신을 향했을 때, 당신은 그것을 버텨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걸까.”

“아마 그러지 못하겠지.”

스스로 배를 갈라 그 안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칼끝을 내게 겨눈 건, 그 무모한 도박을 해보겠다는 것이련지.”

곧 죽임을 당할 상황임에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리지는 페르젠에게 또박또박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 말은 모두 들은 페르젠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너는 지금 내가 도박을 하고 있다고 생각 하느냐.”

“……”

“리지. 눈치를 채는 게 느리구나. 그 저주인형은 너와 연결이 되어 있어도…… 실상은 연결이 되어 있는 게 아니다.”

“무슨, 소리를……”

“설원을 거쳐오는 과정에서 보여주지 않았느냐.”

“……”

“나를 대상으로 하는 괴이의 능력은 하등 효과가 없다는 것을.”

원한다면 기꺼이 증명이라도 해주겠다는 듯, 페르젠은 칼끝을 뻗어 리지의 왼쪽 어깻죽지를 꿰뚫었다.

푸욱.

분명, 내려간 체온이 화끈하게 달아오를만큼 무지막지한 통증이 느껴지나……

“……”

리지는 단 한줌의 비명도 내뱉지 않고, 새하얀 설원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자신의 핏자국을 바라보았다.

“아……”

동시에 페르젠이 로브를 벗고, 자신이 상처 입은 부위와 정확히 대응 되는 곳을 보여주자 리지는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툭.

투둑.

자신의 어깻죽지에 틀어박힌 검이 좌측으로 비틀어지며 벌려진 상처를 더욱 헤집고 있음에도.

미세한 흉터조차 새겨지지 않는 그의 피부.

푸욱!

곧이어 자신의 오른쪽 어깻죽지 또한 올바른 대칭을 맞추듯 검을 찔러 넣자, 리지는 두 팔을 추욱 늘어트린 채 새하얀 설원 위에 쓰러져 조용히 페르젠을 바라보았다.

주륵.

거세게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시야를 어지럽히지만, 붉은 단풍처럼 물들어가는 리지의 주변은 흐트러지려는 시야를 선명하게 붙잡아준다.

“하…… 아하하……”

도대체 무슨 대비책을 세워두었을까.

그렇게 생각한 것이 무색하리만큼,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괴이의 능력을 무력화 시킨다는 그 어처구니 없는 현실에 리지는 자연스레 실소가 터져나왔다.

아무리 아득바득, 악착같이 벽을 타고 기어 올라도.

이 냉혹한 세상은 그 너머를 보여줄 수 없다는 듯, 더욱 높은 벽을 세워 버린다.

도대체 페르젠이라는 저 인간이 무엇이라고.

이 세상은 불합리할만큼 그를 감싸고 도는지.

“……”

그리고 페르젠은 이 지경까지 몰아붙였음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 리지를 보며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을 위협할 수단이 없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이 기나긴 악연의 매듭을 끊는 일 뿐이라 생각하며, 페르젠은 매정하리만큼 높게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곧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듯, 더욱 짙어지는 그녀의 선홍색 피는 새하얀 눈밭을 물들이며 여러송이의 피안화를 피워낸다.

이 정도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발악은 다 해보지 않았는가.

그래, 이만큼이나 했으면 적어도 명계에서 자신의 오빠들과 재회하더라도 한점 부끄럼이 없을 것 같다며 리지는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쥐어든 검을 높게 치켜든 페르젠의 저 모습으로부터, 그 날 단두대에 목이 잘려나간 자신의 오빠──세자르가 겹쳐지자……

역시, 리지는 이대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더이상 자신에게 남은 수단은 없었다.

재화도 전부 소모했기에, 명계의 문 조차 열 수 없는 상황.

‘아……’

아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는 순간, 리지는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수단이 있음을 알아 차리고 사선으로 내려쳐 오는 검을 피해 전신을 옆으로 힘겹게 틀었다.

파삭!

그에 내지른 검이 죄없는 눈밭을 갈라내자, 페르젠은 구차하리만큼 엉금엉금 기어 나가는 리지의 뒤를 느릿하게 쫓았다.

‘비참하게, 고작 몇초라도 그 목숨을 연장하고 싶다는 것이냐.’

그녀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악착같은 삶의 의지일지.

아니면 단순하게 인간이라는 동물이 선보이는 생존본능일지.

……아무렴, 그런 것을 고민해보았자 무얼 한단 말인가.

꽈악!

고작 세걸음으로 좁혀지는 그녀의 발악을 비웃듯, 가느다란 허리에 발을 얹히고.

다시 한 번 검을 치켜드는 페르젠이 리지의 목을 눈에 담는다.

쿠웅!

하지만 그 필사적으로 기어가는 과정에서 제단을 꺼내든 리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명계의 문을 열었다.

움찔!

그 탓에 바닥에 쌓여 있던 눈이 눈보라에 뒤섞여 자욱한 흙먼지처럼 몰아치자, 페르젠은 발악아닌 리지의 발악에 그녀의 등을 짓밟고 있던 발을 치워내야만 했다.

“……”

그렇게 주변을 뒤덮던 눈의 세례가 서서히 가라앉았을 때, 페르젠은 열려있는 명계의 문 앞에서 미약하게 숨을 내쉬며 자신을 쳐다보는 리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네게 남은 재화는 없을 텐데.”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흑마법사가 명계와 거래를 할 때 바칠 수 있는 대가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고작 1층에 서식하는 괴이다. 네 목숨을 대가로 삼아 1층에 서식하는 괴이의 본체를 강림시킨다고 한들, 내가 죽을 것 같으냐.”

“그러지 않겠죠.”

굳이 지금 이 설원을 날뛰는 저 괴이가 없더라도.

1층에 서식하는 괴이 정도야, 그가 보유하고 있는 브뤼테인의 전대 가주들이나 에르네스 제국 희대의 마녀──이사벨의 시신으로 처리가 가능하리라.

하지만 애초에 자신이 노리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명계와 거래를 할 때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바치는 순간, 영혼과 육체는 온전히 거래에 응한 괴이의 소유물이 된다.

그 뜻은 이 세계에 자신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것.

정확히는 그가 간섭할 수 없는 범위라는 것이었다.

강박증에 관한 사실을 알고 있는 자신이, 이것을 어떻게 악용할 수 있는지 이제는 그도 눈치를 챘으리라.

아니, 그것쯤이야 시야를 잠시간 어지럽혔던 눈의 세례가 완전히 걷힌 시점에서 진작 알아 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의도를 감추지 않고, 오히려 그가 “인지”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주륵.

명계의 문이 열리고, 그가 자신의 곁을 벗어난 순간부터 품안에 있는 단검으로 왼쪽 귀를 잘라냈으니까.

오히려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태연자약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며 어느덧 불러냈던 3층의 괴이를 이쪽으로 데려온 그의 대처에 반대로 소름이 돋을 뿐이다.

콰앙!

하지만 이미 성사된 거래는 명계의 법칙이었다.

물건은 중력에 이끌려 바닥으로 떨어지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시간의 흐름속에 놓여 있듯.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도, 그것을 비트는 것은 불가능했다.

“리지──!”

그래, 그것을 당신도 알기에.

명계의 3층에 서식하는 괴이로서도 뚫어내지 못한 이 법칙에 분개하며, 그렇게나 추하게 표정을 일그러트린 채 달려드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 필사적인 손놀림도.

쥐고 있는 검을 내뻗는 발악도.

더 이상 이 세계의 소유물이 아닌 자신의 육체에 해를 가하지 못했다.

이 명계의 법칙을 비틀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명계의 법도를 다스리는 그곳의 신 뿐일 터.

그러니 한낮 인간에 불과한 당신이 거기까지 이 세상의 편애를 받을 수는 없겠지.

“영원히 맞출 수 없는 대칭이라는, 그 지독한 난제를 당신이 극복할 수 있을까.”

이것이 당신에게 가족을 잃고, 가문을 잃고, 인생이 망가진 여자가 새겨넣을 수 있는 유일한 주박.

그리고 그것을 자의로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래. 그때 가서는 내 가족들과 가문의 불행으로 쌓아 올린 행복을 마음껏 즐기도록 해.”

이내 잘라냈던 왼쪽 귀와, 거래에서 제외시킨 자신의 왼쪽 눈동자를 파내어 새하얀 눈밭 위로 떨어트리는 리지가 화사하게 웃는다.

이것은 영원히 맞출 수 없는 대칭이라는, 자신이 새겨 넣은 주박에 시달리는 그가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내뱉는 비명과 발버둥을 저승에서도 듣고 보겠다는 그녀의 한(恨 ).

애초에 대칭이 어긋난 자신의 모습을 “인식”한 시점에서, 그가 이 주박을 떨쳐낼 수 있는 건 “망각”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능력을 가진 괴이는 존재 하지도 않았고.

25년이라는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자신이라는 존재를.

그는, 뇌리에서 완전히 지워낼 수 있을까.

아마 하지 못하겠지.

“페르젠.”

당신이 내게 새겨 넣은 그 시간들을,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하듯.

“당신도…… 나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열린 명계의 문을 거슬러오는 괴이가 리지의 육신과 혼을 집어 삼키고 새하얀 눈밭 위에 강림한다.

쩌득!

그리고 그 즉시, 페르젠이 강림시켰던 3층의 괴이가 머리 하나를 내뻗어 단숨에 그 괴이를 물어 뜯어 버리지만 변곡점 따위는 없었다.

명계의 괴이는 애초부터 육신을 가지지 않은 존재.

이승에 강림을 할 때 주어지는 육체는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잠시동안 주어지는 더미에 불과하니.

그것을 없애보았자, 대가로 바쳐진 리지의 육신과 혼이 돌아오는 일은 없는 것이다.

“……”

남은 것은 새하얀 눈밭 위에 파묻혀 가는 그녀의 귀와, 보랏빛 눈동자 뿐.

아니, 그 뿐만이 아니라.

저벅.

어느덧 이곳으로 도착한, 그레모리 휘하의 정예부대가 몰아치는 눈보라 너머에서 페르젠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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