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이 깊어진다.
그러나 전투의 후유증을 앓는 병사들의 신음을 뒤로한 채, 은밀하게 진지를 벗어난 별동대들은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쌓인 눈을 조심스레 즈려 밟았다.
깃들어 있는 피로감은 전신을 맴도는 긴장감에 집어 삼켜져 어느 때 보다 쾌적한 몸 상태라는 착각이 들게 해주었고.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수많은 잡념들은 고요하게 몰아치는 눈보라에 뒤덮여 백색의 소음만을 맴돌게 할 뿐이다.
사박.
그리고 그들의 앞에서 몸을 돌린 페르젠은 눈보라에 펄럭이는 로브 자락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자신이 버림받은 패라고 생각을 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부정할 것 없다. 완전히 동일한 의미까지는 아니겠으나, 비슷한 의미에서는 버림받은 패라고 할 수 있으니.”
“……”
“최선으로 구성을 한다면, 여기에 모인 인원 중 8할은 새롭게 갈아치워져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구성 되지 못하고.
정적이라는 이유로.
평민이라는 이유로.
아주 유치한 이해 관계가 얽혀 별동대의 8할은 최선이 아닌 차선으로 이루어졌다.
물론, 단순하게 작전을 수행하는 전력상의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최선과 차선의 차이는 그저 성공 확률이 얼마나 더 높은가, 더 낮은가의 차이일 뿐.
애초에 수행에 지장이 갈 만큼 사심을 담아 명단을 제출했다면 자신의 선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선출된 그들이 더욱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있어서 최선이란 언제나 그렇게 믿는 주관에 지나지 않았기에, 객관적 명확함을 가질 수 없었다.
때로는 불가능하다 싶은 것을 성공하는 이들이 존재했고.
그들의 선택은 차선도 아닌 악수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나, 결국에는 최선의 선택으로 탈바꿈을 당한다.
“그러니 나는 그대들이 스스로를 너무 의심하지 않았으면 한다.”
“……”
“그저 이 과정에서 기억을 해줬으면 하는 건, 전장에서 내가 그대들을 지켜왔듯.”
“……”
“이번에는 내가 지킨 그대들이, 이 제국을 지켜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일세.”
“백작님……”
조곤조곤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거친 눈보라를 헤치며 듣는 이들의 마음 속에 따스한 모닥불처럼 자리를 잡았다.
“역사는 들려온 이야기를 받아 적은 것에 불과한 것. 그러니…… 들려주러 가도록 하지. 나와 그대들의 이 순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예!”
그렇게 몰아치는 눈보라 너머로 페르젠이 먼저 걸어나가자, 별동대들은 차근차근 그의 뒤를 따르며 자취를 감추듯 스며들었다.
“……”
하지만 유일하게 속마음이 시커멓게 타버린 붉은 머리의 여인──리지만큼은 그의 말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 차디찬 표정을 그려냈다.
* * * * *
배정 받은 기사들이 원소 마법사들이나 흑마법사들을 품에 안고 달리는 방식이었기에.
1차적인 목적지에 당도하는 건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현재 시각은 새벽 1시경.
두터운 로브를 덮어 쓰고 있지만 한층더 거세진 눈보라는 별동대들의 얼굴을 세차게 할퀴며 혈색을 앗아간다.
휘이잉!
그리고 드넓은 설원에 자리 잡은 수많은 절벽들은 마치 케이크 위에 꽂힌 촛대 같았으나, 그 수가 헤아릴 수가 없는 지경이다보니 마치 미로와도 같은 광경을 자아냈다.
“……예상이라 할 것도 없겠지만, 당연히 진(陣) 이 깔려있습니다.”
“그렇겠지.”
이곳을 돌아가면 그들의 후미를 비롯해 보급을 시도하는 후방 부대를 습격할 수 있게 된다.
적들도 그것을 알기에 명계와의 거래를 통해 괴이의 능력을 빌려 진(陣)의 형태로 함정을 설치해뒀겠지.
함정이라고는 하나, 어디에 깔려 있는지 알아도 피해갈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기에.
반드시 발동을 시키거나, 더욱 상위 등급의 괴이를 불러 무력으로 파훼하는 방법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즉, 어느 수단을 취하든.
적들은 이곳에 자신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는 소리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한 걱정이다. 어차피 해야만 하는 일이니, 사사로운 감상에 젖어들지 말도록 해라.”
“예.”
페르젠의 말에 걱정어린 표정을 짓던 별동대 한 명은 진심어린 묵례를 취한 뒤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다른 동료들과 함께 만반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준비가 끝났을 때, 리지를 제외한 별동대들은 페르젠에게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선보이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들의 역할은 페르젠이 자리 잡은 함정을 해체 해주고 이목을 끌어 주었을 때, 족적을 들키지 않고 설원을 건너가 최종 목적지인 루벨타 강에 도착하는 것.
그 과정에서 진(陣)의 여파에 휘말리거나,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하는 적군을 상정하여 멀찍히 거리를 벌려두는 것이다.
“……”
이내 눈보라에 집어 삼켜지듯, 조금씩 거리를 벌려 나가던 별동대들이 자취를 감추자 페르젠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 보았다.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자신의 대척점 삼아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인 눈밖에 존재하지 않는 곳.
사박.
그리고 거기서 유일하게 자신의 곁에 남아 있는 리지를 돌아보며 페르젠은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그녀가 이곳에 홀로 남아 있는 것──그 결정에 의문을 품은 별동대들은 한 명도 없었다.
제대로 걷지 조차 못하는 그녀가 본대에 합류하여 움직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리스크를 짊어지는 것이니.
그렇다면 왜 그녀가 여기에 소속되어 있는지 그 사실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적어도 그 표면상의 이유를 추측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은 자들 또한 없었다.
다만, 그들은 정말로 그 표면상의 이유가 전부 일거라 믿고 있을 뿐이리라.
툭.
이내 자신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어서는 페르젠의 발끝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치켜든 리지는 특유의 보랏빛 눈동자에 그의 모습을 담으며 말했다.
“단 둘이 남았네요.”
“그래. 우리 둘 밖에 남지 않았지.”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세차게 펄럭이는 리지의 로브자락.
그리고 그 안에서부터 길게 늘어지는 얕은 실자락은, 그녀의 자궁 안에 머무르고 있던 페르젠의 정액을 메개체 삼아 그의 모습을 완벽히 본따 만든 봉제인형을 만들어낸다.
과연, 눈썹하나 꿈틀하지 않는 이유는 이 매서운 추위에 얼굴 근육이 굳어서일까.
아니면 애써 태연한 척을 억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 속내가 무척이나 궁금하다는 듯, 페르젠과 똑닮은 봉제 인형을 부드럽게 껴앉으며 리지는 요염히 웃었다.
“신기하지 않나요.”
“무엇이 말이냐.”
“다른 체액은 메개체로 삼을 수 없는 주제에, 유일하게 정액만큼은 메개체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
“한편으로는 내 자궁에 착상하지 않았다는 뜻이니, 당신에게 있어서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지.”
이 상황에서 끝까지 침착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그의 담대함이 한편으로는 놀랍다고 생각하며 리지는 새하얀 입김을 내뱉었다.
그때와 다르게 저주인형의 대상이 유리엘이 아니기에 한결 편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스스로를 향한 지독한 강박증 정도는 참아 볼 각오를 하고서, 이 자리에서 자신을 죽일 결의를 굳힌 것일까.
‘……’
그래, 그러한 결의를 하고서 자신을 죽이려 드는 것이라면.
리지는 얼마든지 여기서 싸늘한 죽음을 맞이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애초에 24년, 아니 한해가 지났으니 25년이겠지.
그 기나긴 시간 동안 그는 자리 잡은 강박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앞에서 이러고 있지 않나.
그러니 틀림없이 발버둥치고 몸부리는 그 끝에.
페르젠은 자신의 강박증에 잡아 먹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리라.
진실은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지는 날이 있다고는 하나.
진실을 따를 자가 없고.
정의를 이룰 자가 없는 짐승의 세계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
그렇기에 페르젠이라는 악(惡)을 죽일 수 있는 건, 돌려 말하자면 페르젠 본인 뿐일 것이다.
스륵.
“……지금 이 지경까지 와서도, 그 재미없고 구역질나는 위선을 선보이고 싶은 건지.”
상냥하게 두 손을 뻗어 자신을 품안으로 안아드는 페르젠을 보며 리지는 헛웃음을 지었다.
“당신에게는 여유가 없지 않나요. 나를 죽일 생각이라면, 차라리 빠르게 끝내는 게 좋을 텐데.”
“……”
“25년간 당신을 옭아맨 그 강박증이 자기 자신을 물어 뜯으려 할 때, 그것을 얼마나 오래 참아낼 수 있는지. 먼저 명계에 도착해 오빠들과 내기를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힘없는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신랄한 비아냥을 들으며 사박사박 눈밭을 걸어나가던 페르젠은 곧이어 적들의 진(陣)이 내리깔린 설원 앞에서 멈추어섰다.
“리지.”
“……”
“너는 베갯머리송사의 기원이 무엇인지 아느냐.”
단어 그대로의 뜻은 잠자리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바라는 바를 속삭이는 것이나, 실제로는 여인이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사내에게 원하는 것을 받아가는 걸로 쓰인다.
그리고 페르젠이 리지에게 내물은 기원은 당연하게도 전자가 아닌 후자.
“시시한 이야기에 관심은 없어요.”
“마리 엘 로이네라는 여인이다. 그녀 또한 흑마법사였고, 너처럼 저주인형이라는 괴이와 거래를 하였지.”
“……”
“그리고 그녀는 아마 저주인형을 통해 만들어낸 봉제인형의 구현도가 가장 높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움찔!
가장 높은 봉제인형의 구현도와, 베갯머리송사라는 단어의 기원이 된 여인이라 한다면.
틀림없이 페르젠이 알고 있는 그 정보에는 사내의 정액 또한 메개체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의도를 꿰뚫고도, 지금의 이 순간을 준비했다는 말이 된다.
“그래요?”
하지만 리지는 태연자약하게 굴며 그의 말에 짧게 대답했다.
설령 페르젠이 자신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고 한들.
질내에 사정을 한 순간,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자궁을 도려내지 않고서야 대처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고 봐야했다.
“……”
하지만 고개를 치켜들어 마주한 그의 붉은 눈동자는 왜 이리도 고요한지.
사박.
이내 페르젠이 멈추었던 걸음을 내딛자, 리지는 작게 몸을 떨었다.
아무런 방비책도 없이 그저 맨몸으로 적들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영역에 들어간다는 것은, 엄연한 자살행위였으니까.
그리고 자신의 의도를 꿰뚫고 이 자리를 준비한 그가, 함께 자살한다는 그림 따위를 그리지는 않았을 거라 믿으며 리지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틀림없이 무모한 자살행위처럼 보이는 이 가운데, 그가 손을 써올거라 생각했기에.
저벅.
하지만 자신을 품에 안은 채 걸음을 내딛는 페르젠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사박.
정말, 말 그대로.
이 눈덮힌 설원을 천천히 걸어나가기만 할 뿐.
“……”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동하는 적들의 진(陣)은, 감히 페르젠이라는 존재 곁으로 일말의 영향력도 행사하려 들지 않았다.
하나.
둘.
셋.
넷……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발동되어 쌓이는 진(陣)의 갯수는 늘어만 가는데.
정작 그것을 발동시킨 당사자인 페르젠은 그 진(陣)에 새겨진 규칙을 모조리 무시하며 자신을 끌어안은 채, 몰아치는 눈보라를 고요히 헤쳐 나간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무시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알면서도 속아주고.
이길 수 있으나 패배를 해주는, 일종의 접대처럼.
발동된 진(陣)은 마치 페르젠이라는 존재를 억지로 인식하지 않으려 드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