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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228화 (228/260)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입질이었다고 생각하며 그레모리 여제는 꽤나 쌓인 눈을 부드럽게 짓밟았다.

벌써 엘리알타 협곡의 반절을 지나 진격하고 있는 에르네스 제국의 기세는 가히 무서울 정도.

하지만 그들의 앞을 가로 막으며 자신의 검을 빼내든 그레모리는 제법 여유로운 모습을 선보이며 신호를 주었다.

자신의 가설이 맞든, 틀리든.

본질적으로 페르젠이 보유하고 있는 재화의 양은 한정적일 터.

더군다나 그 재화를 소모시키기 위해 이쪽에서 지불하는 대가는 대등한 수준이라 할 수 없었기에, 펼쳐지는 소모전은 조금씩 승기를 잡아다 줄 뿐이다.

라고……

‘그레모리, 너는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확한 속내는 모르겠으나, 지금까지 치루었던 교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에 페르젠은 엘마르크 제국이 노골적으로 무엇을 노리는지 눈치를 챘다.

흑마법사들을 내세워 명계의 문을 연 뒤, 다수의 괴이를 불러내는 엘마르크 제국.

저것은 틀림없이 브뤼테인의 전대 가주들을 사역하는 자신에게 훨씬 많은 부하를 안겨다주어 마력의 소모를 가속화 시킨 뒤, 명계의 문을 여는 시점을 강제로 앞당기기 위함이리라.

첫날의 교전을 제외하면, 자신이 한 전 투에 두 차례 이상 명계의 문을 연 적이 없으니.

퇴로가 있는 탓에 안그래도 불합리한 등가교환을 더욱 불합리하게 만들 속셈일 터.

“아, 아……”

인간이 아닌 이형의 생물을 마주하는 탓에 수차례 전투를 치뤘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병사들은 내면의 공포를 적나라하게 표출하기 시작했다.

승산이 있는 적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것.

승산이 없는 적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것.

그것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으니, 이런 반응을 보여주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으리라.

“……”

이대로 에르네스 제국의 원소 마법사들과 흑마법사들에게 대응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안 중 하나겠지.

그들은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었으니까.

스륵.

하지만 페르젠은 손을 들어 맞대응을 하려고 하는 아군에게 정지 신호를 내린 뒤, 자신의 제단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명계의 문을 열었다.

그레모리가 유추하고 있는 방안과, 그 유추를 토대로 내보이는 전술은 합리적이었고.

거기에 자신 또한 정석으로 대응 하는게 가장 손해가 적은 편이리라.

그러나 그렇게 했다가는 적에게 강력한 확신을 쥐어줄 뿐이고, 상대적으로 이쪽이 끌려 다니는 모양새를 치울 수 없겠지.

늑대는 상처를 입더라도.

자신이 나약해 보이지 않게끔, 그것을 티내지 않는 법이다.

끼긱.

이윽고 페르젠의 제단안에 들어 있는 재화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더니, 명계의 문이 3층으로 고정된다.

그것을 확인하며 페르젠은 여유를 선보이는 그레모리를 따라하듯, 연초 하나를 꺼내들어 자신의 입에 꼬나문 뒤 불을 지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얗게 눈덮힌 엘리알타 협곡의 중심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니, 그것이 그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고로 그림자라고 하면 빛이 물체를 만나 투과하지 못한 탓에, 그 뒤로 상이 맺히는 것.

그렇다면 자신들 엘마르크 제국군 말고도, 에르네스 제국군 발 아래에도 동일한 그림자가 생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애당초, 지금 하늘의 구름은 태양을 가리지 않았다.

“산개……!”

그 차이점을 깨닫는 즉시, 엘마르크 제국의 수뇌들은 최전선 앞에 있는 병사들에게 산개를 명령하려 했으나……

콰득──!

그보다 빠르게, 아무런 위화감 없이 새하얀 눈밭 위로 둥글게 자리 잡은 무언가는 자신의 입을 벌려 그들을 집어 삼켰다.

명계의 1층.

명계의 2층.

그곳에 서식하는 괴이들 조차, 그 폭력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었고.

꼬옥 다물린 거대한 주둥이는 최전선에 서있던 일개 병사들과 그레모리 여제 또한 한 번에 집어 삼킨 채 허공으로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내 그 커다란 구체 가운데로 떠지는 외눈은 처절하다 싶을 만큼의 피눈물을 쏟아내며 새하얀 눈밭을 붉게 물들여 나갔다.

에르네스 제국이든.

엘마르크 제국이든.

페르젠이 강림 시킨 저 3층의 괴이가, 정말 단순하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외눈 사이로 끼는 눈곱 같은 것은, 누가 봐도 조각난 인간의 신체와 짓눌린 장기들이었으니.

“……”

저 광경을 보고 환호를 내질러야만 하는 것일까.

극도의 공포는 아군이 이득을 보는 상황이었음에도, 고작 침만을 꿀꺽 삼키는 침묵을 불러 일으켰다.

다만, 유일하게 레이몬드 황자만큼은 옅은 침음을 흘리며 옆의 페르젠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현재 명계의 문을 열어버린 이 행동이 어디까지나 심리전에서 밀리지 않기 위한 방편인 걸 알았기에.

오오오……!

이내 맴도는 전장의 침묵 가운데,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건 에르네스 제국이 아니라 엘마르크 제국 쪽이었다.

부욱!

피칠갑이 된 상태로 괴이의 밑을 가르며 그 안에서 투욱 튀어나오는 그레모리 여제.

주륵.

투두둑.

그러자 바닥에 안착하는 그녀를 따라 인간의 살점과 무수한 피들이 마치 잔에 따르는 와인처럼 진득히 흘러내리며 새하얀 눈밭 위에 고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페르젠은 레이몬드 황자와 조용히 시선을 주고 받았다.

그 직후, 돌격 명령이 떨어지고.

혼잡해지는 전선 가운데,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그레모리의 눈동자를 먼발치에서 마주하고 있던 페르젠은 연초를 바닥에 버린 뒤 이사벨을 자신의 곁으로 가까이 옮겼다.

‘어쩔 것이냐. 여제.’

이른 시점에, 명계의 문을 열게끔 하여 재화를 소모시키게 만든 건 바라던 바였을 텐데.

너는 늘 하던대로, 고작 병사들 몇천을 내주고 후퇴를 하련지.

생각해보면 첫 교전을 할 때도 이러 했었다.

일부러 자신과 겹치지 않는 반대편의 전선으로 옮겨가 유치한 기싸움을 벌였던 그녀.

하지만 이번에는 그 기싸움에서 자신이 이겼다는 걸 보여주듯, 검을 빼내드는 그레모리가 다시금 형태를 뒤바꾸려는 괴이에게로 순식간에 달라 붙는다.

과연, 엘마르크 제국군의 눈에는 저것이 마왕에게 달려드는 용사처럼 보일까.

하기야 그러니 저렇게도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는 것이리라.

그러나 페르젠 자신의 눈에는 마치 내던진 장난감을 뒤쫓는 강아지처럼 보여, 그들이 내지르는 환호성을 뒤로한 채 입가에 옅은 비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 * * * *

어느덧 오랜 시간이 흘러 전장에 쌓인 눈은 말끔히 녹아 삭막한 협곡의 절벽과 바닥을 깔끔하게 드러낸다.

그만큼 전장의 열기가 뜨거웠다는 소리겠으나, 그 열기조차 서서히 식어 간다는 것을 알려주듯 떠오른 해는 서쪽으로 지며 붉은 노을을 물들였다.

쿠우웅!

그리고 그레모리 여제는 지금까지 줄곧 하늘 위에 두개의 태양처럼 군림하고 있던 괴이의 외눈을 내리찍어 지상으로 격추시킨 뒤, 자신의 왼발에 우악스런 힘을 주어 그 몸통을 단숨에 짓이겼다.

푸확!

그러자 터져나가는 괴이의 몸뚱이로부터 대량의 핏물이 터져 나오더니 엘리알타 협곡 내부에 짧은 시간이지만 선홍빛 강물을 흐르게 해주었다.

“……”

그리고 그 핏빛 물결이 메말라버린 협곡의 바닥에 완전히 스며들었을 때……

내리찍은 왼발이 기과한 각도로 꺾여, 부러진 대퇴골이 살점을 뚫고 나와 있는──만신창이가 된 그리모레 여제의 모습을 선명히 드러낸다.

물론, 페르젠도 모든 마력을 탕진 했기에 자신의 옆에서 실풀린 인형처럼 쓰러지는 이사벨의 시신을 부드럽게 품안으로 안아들었다.

동시에 그렇게 무방비해진 페르젠의 곁을 레이몬드 황자가, 수많은 기사들이, 수많은 마법사들이 애워싸며 든든한 벽이 되어주기 시작했다.

“핫.”

……자고로 늑대란, 언제나 고독함을 머금은 채 무리를 짓지 않는 법이거늘.

눈꼴시려울 정도로 옹기종기 모여든 그들의 가운데서 자신을 바라보는 페르젠의 모습에 그레모리는 순간적으로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여전히 쓰러지지 않고 서있는 자신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기 급급한──오합지졸처럼 모여 있는 수뇌들과 병사들.

‘그래……’

저런 것들이 의지가 된다면 얼마나 되겠냐고.

오히려 작금의 페르젠은 양들의 무리에 숨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는 늑대,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비웃음을 머금어준 그레모리는 자신의 검을 박살낸 왼발에 가져다 댄 뒤 노끈으로 묶어 임시 부목 처리를 하였다.

그렇게 너무나도 자연스레 접어든 소강상태에서,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고고하게 서있는 그레모리 여제를 보며 페르젠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어찌……’

마력이 닳아 없어 졌어도.

신체가 곧 무기인 오러 나이트이니, 자신의 몸뚱이를 내던져 다시금 명계의 문을 열도록 재촉을 할까.

아무리 그녀가 극의에 올랐어도, 저 왼발은 빠르게 조취를 취하지 않으면 절단 당한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명계의 문을 열어 3층의 괴이를 불러낼 수 있는, 그 재화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래, 여기서 그녀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겠지.

“하아……”

하지만 직후, 후퇴를 명하는 그레모리가 등을 돌리자 페르젠은 한숨과 함께 비틀거리는 레이몬드 황자의 등을 받쳐주었다.

“……고맙네. 백작.”

“아닙니다. 전하.”

적어도 이 결과는, 그레모리가 자신과 힘 겨루기를 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등가교환에 불확신이 생겼다는 증거일 것이다.

추가적인 접전이 더 이루어지면, 그것이 허세에 불과했다는 걸 눈치챌지 몰라도.

페르젠은 적들이 움츠려드는 그 잠깐의 시간만으로도 만족했다.

그 잠깐의 시간이면……

이 몸뚱이에 얽힌 마지막 악연은, 완전한 끝을 맺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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