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
태양이 가장 높게 떠오르는 시간.
하지만 내려쬐는 햇살은 따스하지 않았고, 물감처럼 가득 퍼진 새하얀 구름으로부터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숨을 내쉬면 나오는 입김에 살짝 젖어드는 눈은, 차곡차곡 바닥에 쌓이며 전장의 참상을 가려 나간다.
환경이 더욱 가혹해지는 것이나, 도리어 별동대가 움직이기에는 최적이라 할 수 있었다.
‘나서는 건 앞으로 한 번의 전투를 더 치른 직후이지만……’
그것은 도리어 말하자면, 이쪽에서 먼저 선공을 가하는 것도 부합한다는 뜻이다.
물론, 너무 섣부른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으리라.
똑같이 시간이 흐른다면 이쪽도 추가적인 보급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운이 좋다면 자신의 재화도 보충 할 수 있을 테니.
하지만 페르젠은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아야 하는 건 적군도 물론이거니와, 리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이 교착 상태가 오래 이어졌을 때, 리지가 레이몬드 황자의 신체 부위──머리카락 등을 손에 넣게 된다면.
결국, 이 별동대를 구성한 의미가 없어진다.
솔직히 말하자면 호승심이 강한 그레모리 여제가 왜 이리도 잠잠한 것인지, 페르젠은 그 점이 궁금했다.
하지만 적들도 자신들의 수를 모르고, 자신들도 적들의 수를 모른다면.
자연스레 맞부딪치게 되는 건 각자가 지니고 있는 최선의 패일 터.
사박.
생각을 마치고, 조금이나마 쌓인 눈을 밟으며 페르젠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겨울은 이 몸으로 시작한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는 계절.
그러니 마침표를 찍고, 봄을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순간이다.
* * * * *
늦은 밤.
경계를 서는 병사들을 뒤로하고, 십부장인 아스텔과 함께 불침번을 마친 뒤 움막 안으로 들어선 리지는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자신의 자리에 조용히 누워 모포를 덮었다.
오늘 낮, 그의 부사관인 림벨로부터 별동대의 작전 개요에 대해 들었을 때 리지는 솔직히 속으로 코웃음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전쟁을 위한 다는 목적안에, 자신을 죽이고 말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게 보였으니까.
‘당신은…… 모르고 있겠지.’
그 날 굳이 질내에 사정하도록 강압을 했던 건, 아이를 품어 절망감을 선사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으나.
자궁 안에 최대 5일간 머무를 수 있게 되는 정액이 저주인형의 조건 또한 만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좁은 입구를 비틀어 자궁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는 그의 끈적한 정액은, 자신에게 있어서 최강의 무기이자 방패가 되는 것.
설령 별동대로 나서는 것이 4일 뒤라도 상관 없었다.
그 전에 또 한 번 그와 잠자리를 가지면 되는 것이니까.
물론, 위협 수단으로는 레이몬드 황자의 머리카락 등을 손에 넣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페르젠은 자신의 관심이 본인에게 온전히 쏠리는 것을 더욱 편안해 하겠지.
그보다 이런 상황에 몰리더라도, 무엇하나 잃고 싶어하지 않는 그의 욕심 가득한 계획에 리지는 다른 의미로 실소가 흘러 나왔다.
자신의 이빨 정도야 목덜미를 내주어도 동맥을 찌르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걸까.
스륵.
고개를 옆으로 돌려 천막 하나로 분리된 페르젠의 공간을 바라보며 리지는 특유의 보랏빛 눈동자를 느릿하게 끔뻑거렸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죽이려 들지 않는 페르젠.
악당이 악당으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비추어지기 싫어한다는 것은, 정말 겁쟁이 같은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무언가를 잃어야 한다는 걸 그도 알게 되면 좋을 텐데.
아니, 모른다 해도 상관은 없으리라.
자신이 차근차근, 또 하나하나 알려주면 그만이었으니까.
* * * * *
눈이 내리기 시작한지 3일 째.
교착된 전선의 상황은 여전히 위화감 가득한 평화가 이어진다.
각자의 정찰 부대가 소소한 교전을 일으킨 것을 제외하면, 소꿉놀이에 지나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
하지만 그 탓에 에르네스 제국의 수뇌부들은 옅은 불안감을 머금었다.
구조적으로 전략이 전술보다 뛰어날 수가 없는 세계이고, 대부분의 전략은 전술로 대응이 가능하나……
그 대응을 하는 과정에서 페르젠이 보유하고 있는 재화를 소모해야하는 상황이 온다면 누가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인지는 저울질을 할 필요도 없었다.
이들 입장에서는 명계의 3층을 여는 횟수가 “무려” 세 번이나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고작” 세 번 남아 있다는 인식으로 남아 있었으니까.
하기야 그것은 페르젠 못지 않게 그레모리가 전장에서 가지는 압박감 또한 상당하다는 것이니, 그들을 겁쟁이라 탓 할수만은 없는 것이리라.
남은 기회 안에 그레모리를 죽이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그녀를 상처입힌 건 안하느니만 못했던 꼴이 되는 것이니.
‘전쟁이란, 여러 의미에서 참으로 불합리하군……’
아무리 많은 병사들이 죽어 나가고.
아무리 많은 적군들을 죽여도.
결국, 승패의 갈림점은 서로가 지니고 있는 최강의 패가 부러지느냐 그러지 않느냐다.
“선공을 가해보는 것이……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해당 의견에 저또한 동의를 하는 바입니다.”
“저도 찬성을 하지요.”
예상했던대로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페르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해당 주장은 자신이 가장 먼저, 이틀 전에 하고 싶었던 말이다.
하지만 페르젠은 섣부르게 그러지 않았다.
이 그림 자체를 예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더군다나 지금 자신의 입지를 생각한다면, 아무리 리지가 거슬려도.
조급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전장의 분위기에 독이 된다.
“……경들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알겠네. 다들 오늘밤은 만전의 준비를 해두고 눈을 감도록.”
“예. 전하.”
* * * * *
회의 직후, 분주해지는 진지의 분위기에 병사들은 직감적으로 곧 출진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리지 또한 그것을 알아차렸기에 눈덮힌 엘리알타 협곡의 입구를 쳐다보며 로브의 앞섬을 꼬옥 옭아맸다.
긴장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것이다.
하지만 파놓은 덫에 자신이 걸리지 않는다면 페르젠은 과연 어떠한 표정을 지을지, 리지는 그것이 몹시 궁금했다.
페르젠 본인이 짊어지는 위험부담도 적지 않은 작전인데.
그것을 감수한 의미가 없어졌을 때, 그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어쩌면 거기서 추격이 붙은 그레모리 여제에게 함께 죽는 그림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래, 그것은 그것대로 나쁘지 않을 테고.
성공적으로 추격을 뿌리친 뒤 자신을 데리고 함께 귀환하는 것도, 그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결과이리라.
휘이이잉!
눈섞인 바람이 거칠게 몰아치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지럽히지만, 어느때보다도 총명한 보랏빛 눈동자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 * * * *
사박.
늦은 밤, 마지막으로 처리해야 될 일을 마치고 움막 안으로 들어선 페르젠은 타들어가는 모닥불 앞에서 장갑을 벗고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스륵.
이미 눈치를 채고는 있었으나, 굳이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는데.
외면하지 말고 자신을 바라보라는 듯, 대놓고 인기척을 내는 리지의 행동에 페르젠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
“……”
그래도 꼴에 여자라는 것인지.
남자들의 숨소리와 체취가 가득한 이 공간 안에서 희미하지만 달콤한 살내음을 풍겨낸다.
삐걱.
이내 목발을 짚고 침상에서 일어나는 리지가 자신에게로 천천히 거리를 좁혀오자 페르젠은 말없이 타들어가는 모닥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리를 조금 벌려 함께 서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하면 애틋한 연인 사이로 보일만큼의 착각이 든다.
하지만 그것이 무색하리만큼 리지와 페르젠은 그 어떤 한 마디도 서로에게 내뱉지 않았다.
애당초 얽힌 악연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밤.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서있는 것인데, 무슨 대화가 오고 갈 수 있을까.
저벅.
그렇게 침묵 속에서 먼저 자리를 뜨는 건 페르젠이었다.
또각.
“……”
그리고 리지는 굳이 그러한 페르젠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몸을 녹이는 그의 곁에 달라 붙었던 건,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확실하게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지금밖에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쓸데없는 도발을 하는 구나.’
당연히 그 의도를 간단히 읽어냈던 페르젠은 천막 하나로 분리된 자신의 공간 안에서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는 흑마도의 이해가 깊은 자신이 설령 비주류라 하더라도, 저주인형이라는 괴이의 상세한 정보를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기야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미 자신의 씨를 몸에 품고 있으니 상관 없다는 식으로 뻗대는 걸지도 모른다.
……출진의 시기를 조금만 늦추면, 그 수단 자체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으나.
어차피 그런 식으로 대처를 했다면, 그녀는 진작 곤란한 상황을 만들어 한 번더 자신과 몸을 섞으려 들었으리라.
지러니 지금 이 흐름이, 자신에게 있어서 변수가 없는 가장 최적의 상황이었다.
지니고 있는 무기가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다른 것을 준비해오겠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상태라면, 결국 그 무기를 쥐어들고 나선 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겠나.
라우라 덕에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괴이의 능력은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으니, 지금 정도는 안락한 꿈을 꾸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새하얗게 뒤덮힌 눈밭.
어린 양의 무덤으로는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고.
추악한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한 장막으로도 손색이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