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225화 (225/260)

회의가 끝나고, 다른 귀족들이 막사를 나섰으나.

페르젠과 레이몬드 황자는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남아 있었다.

이내 둘만이 남은 곳에서 적막한 침묵이 맴도는 가운데, 레이몬드 황자는 고개를 숙였다.

“전하…… 고개를 드십시오.”

“황실은 그대들 앞에서 고개를 들고 있을 자격이 없네.”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이 그렇지 않단 말인가──!”

쿠웅!

자신의 머리를 탁상에 내려찍는 레이몬드 황자가 분을 토해내듯 두 손을 바르르 떤다.

“오랜 시간이 흘렀네. 많은 것이 바뀌었네. 하지만 그대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우리들은 여전히 그대로이지 않은가?”

“……”

“우리는 변함없는 겁쟁이였던 것이야. 그대들을 편애해주지 않는다면 그 충의를 거두어들일까봐 다른 이들을 품으려 하지 않았네.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의심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없을 텐데 우리는 은연중에 그것과 비슷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던 게지.”

“……”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아무리 충성심을 보여도. 브뤼테인만큼 대우해줘서는 안되고, 브뤼테인만큼 신뢰해서는 안된다는…… 그러한 선을 정하고 있었던 것이네. 정작 그대들은 아무 신경을 쓰지도 않을 텐데. 우리는 멋대로 그렇게 재단하고 행동하였어.”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한가.

결국, 가장 위험한 순간에.

의지해야만 하고.

희생되어야 하는 것은.

브뤼테인이었다.

제 2의 브뤼테인이 나오고.

제 3의 브뤼테인이 나오는.

그러한 그림을 그렸더라면, 이 전쟁에서 가장 많은 짐을 짊어져야 하는 것은 페르젠이 아니었으리라.

“굼벵이처럼 느려터져서는…… 깨닫는 것도 늦지 않나. 하하……”

탁상에 머리를 박은 채, 실소만을 흘리며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레이몬드 황자를 보고 페르젠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전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전쟁은 간접적으로나마 제가 자초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

“상세한 내막은 모르시더라도, 클로디아 가문과 저 사이에 악연이 있다는 것쯤이야 알고 계시겠지요.”

“……”

“저로부터 시작된 일이니, 제가 감당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전하가 부담감을 가지실 필요도 없으시고, 자책할 필요도 없으십니다.”

“명백히 그대의 잘못이어도,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하지 않은 그 당시의 황실 또한 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나.”

“관점을 그리 돌리신다면,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것에 대한 탁상공론을 해보았자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백작……”

“전하. 이것을 말씀드린다고 전하의 마음이 편해지실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

“그럼에도 저는 전하에게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경청하겠네.”

“제가 이 위험부담을 짊어지려는 것은 브뤼테인의 핏줄이고, 제관이라는 자부심과 충성심보다…… 제 개인의 욕심이 더욱 우선된 결과입니다.”

“……”

“적어도 별동대를 편성해 떠나게 될 저라는 인물은 개인의 욕심을 위해 움직이는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으니, 황자 전하께서는 지나친 자책감과 부담감을 느끼지 마십시오. 욕심이 그득할 뿐인 평범한 사내가 위험을 자처한다고 해서 황실의 황자가 걱정 해주는 것도 우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페르젠의 말에 고개를 들어 올린 레이몬드 황자는 실소를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본인을 깎아 내리면 그대를 의지했던 나와 이곳의 다른 이들이 뭐가 되겠나.”

“전하…… 사실 저는 황실과 백성들이 의지를 할 만큼 청렴결백하고 올곧은 사람이 아닙니다.”

“……”

“하지만 그런 제게 품는 기대감과 바라보는 시선이 싫은 건 아니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번 위험부담을 짊어지려는 건…… 제 개인의 욕심이 우선되었다고 했지요.”

“그렇네.”

“그 욕심은 별 게 없습니다.”

“……”

“저는 제 아내들에게 좋은 남편이 되어주고 싶고, 제레미아 형님에게 떳떳한 동생이 되고 싶고, 자랑스러운 황실의 기둥이 되고 싶습니다. 소중한 이들이 제게 보내오는 기대감을 충족시켜주는 그런 인간이 되기를 원하나…… 그러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매듭지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백작……”

이렇게 까지 페르젠이 속내를 털어 놓으니.

레이몬드 황자도, 페르젠이 별동대를 구성하여 나서는 과정에서 무얼 하려는지 어렴풋하게 눈치를 채고 말았다.

단순한 속죄의 의미로 그가 매듭을 짓는 것이라면 마음이 불편하지 않겠으나, 엄연히 그가 매듭 지으려는 그림은 그런것이 아니리라.

왜냐하면 클로디아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리지에게, 페르젠 개인이 속죄라는 의미로 적합한 대가를 치룰 수 있는 방안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8년전, 상세한 내막을 알지는 못해도 잘못을 범한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실은 감히 그것을 지적하여 바로 잡으려 들지 않았다.

상대는 브뤼테인이다.

오랜 세월 자신들을 위해 희생 해왔고, 충성을 바쳐왔던 가문.

그런 가문이 한 번의 일탈을 하는 것 정도야 눈을 감아 줘야만 하는 것이 아니냐고.

황실은 그렇게 생각을 했기에 사탕발린 말만 내뱉는 간신처럼, 브뤼테인에게 듣기 좋은 말을 들려주었다.

신하의 눈치를 보는 군주였고.

충신의 어긋남을 돌보지 못했던 군주였다.

동시에 시간이 흘러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 지금,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가.

리지 폴 리아나 클로디아.

가문도 가족도 잃고, 세상에 홀로 남은 여인.

하지만 그러한 여인을 반드시 죽야야만 하는 동기가 지금의 페르젠에게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리라.

굳이, 지금 이곳에서.

개인의 욕심을 곁들이려 한다는 게 그 반증이겠지.

애초부터 그녀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라면, 반드시 그리해야만 했던 것이라면.

‘……그 날, 그 처형장에서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말이 나올지라도.

브뤼테인은 얼마든지 그럴 수가 있었으니까.

즉, 지금의 페르젠은 그 당시 자신의 선택을 물러야 할 만큼……

아니, 정확히는 리지 폴 리아나 클로디아라는 여인이 그 선택을 무르게 만들 만큼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참으로 괴로운 선택이구나……’

다시 한 번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는 가운데 레이몬드 황자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과거도 지금도.

공통되는 명확한 하나의 요소가 있다면, 자신들 황실은 페르젠이 분명 그리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으리라 믿고 있는 것이다.

브뤼테인의 핏줄로 태어난 페르젠이라는 사람이.

단순하게 악행을 즐기는 악인이지는 않을 것이라 신뢰하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지금만 해도 그와의 악연으로 얽혀 가문과 가족을 모두 잃은 리지가, 페르젠이 경각심을 느끼게 할 만큼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가정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과거도 지금도, 이점을 교묘히 이용해 일그러진 욕망을 채우려드는 악인 일수도 있다는 추론도 있는데.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자신의 두 눈으로 지켜봐온 페르젠이라는 사내는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정말로 악인이었다면……’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자신의 여동생인 엘리자베스가 그를 연모하지도 않았으리라.

결국, 남게 되는 선택지는 죄를 저지르려 하는 신하를 바로 잡느냐.

아니라면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과거의 일을 다시 한 번 되풀이 하느냐.

……그것 뿐이겠지.

그리고 그 선택지에서 레이몬드 황자가 고를 수 있는 건, 당연히 후자밖에 없었다.

전자를 고른다는 건, 리지라는 여인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것이고.

실제로 그녀가 페르젠을 위협할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끝끝내 그 선택으로 인해 페르젠은 목숨을 잃게 될 지도 모를 터.

‘백작의 죽음은…… 이 전선에 막대한 손해를 불러 일으킨다.’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어느쪽을 저울질을 해봐도, 역시 한 여인의 생애를 꽃지게 하는 것이 더욱 가볍다는 결론에 이르러 레이몬드 황자는 쓰게 웃고 말았다.

물론, 동일한 선택을 했던 과거는 지금의 전쟁을 낳았다.

필멸자에 불과한 인간이 고르는 선택에 완벽한 최선은 존재할 수 없기에, 어쩌면 미래에도 이만한 불행이 들이 닥칠 수 있으리라.

‘차라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아무리 강대한 국가라도, 언젠가는 시간 속에 허물어진다.

그리고 그 허물어짐에 억울함을 품지 않을, 죄로 얼룩진 국가라면…… 쇠퇴 끝에 다가오는 멸망이 덤덤하지 않을까.

“……”

이내 감고 있던 두 눈을 뜬 레이몬드 황자는 페르젠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과거와 다시 한 번 동일한 선택을 하지만, 그래도 그 때처럼 자신들이 “방관자”의 위치이지는 않도록.

그는 자신의 검을 뽑아 페르젠에게 내밀었다.

“받도록 하게.”

“전하.”

“이 선택은 그대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네. 하지만 신하의 그릇됨을 바로 잡아야 할 순간에…… 그러지 않기를 택했으니, 나또한 공범이라 할 수 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부정하지 말게. 과거의 그 날은, 이미 일이 발생한 후에 알게 되었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일이 발생하기 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지 않나.”

“……”

“백작. 자신은 생각보다 깨끗하지 않고, 못난 사람이라 말을 했었지.”

“……”

“사실 그러지 않은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이 기나긴 세월간…… 그대들은 때묻지 않은 순수한 충의를 오래 유지해왔네.”

검을 돌려, 손잡이 부분을 그에게 내밀며 레이몬드 황자는 자신의 진심을 담아 마침표를 찍었다.

“써야 할 제관이 죄의 왕관이라 한다면…… 거부하지 않고, 나또한 그것에 적합한 황손이 되어 함께 물들겠다.”

그러니.

가문도.

가족도.

인생도.

모두 꽃지게 될 그 여인의 마지막은, 적어도 자신의 검으로 마무리를 해달라는──레이몬드 황자의 의지.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나의 두 눈으로 보고, 나의 두 귀로 듣고 판단한 선택이네.”

“……”

“페르젠 폰 슈바이크 루에르그.”

“예. 전하……”

“짐의 명을 받들겠는가?”

이 명을, 어찌 거부할 수가 있으리라 생각하시는 건지.

입술을 꽈악 깨물며 의자에서 내려온 페르젠은 극진한 예의를 갖춘 채 레이몬드 황자 앞에서 떨리는 손으로 그의 검을 받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서 페르젠에게 몇 마디를 더 건네주려 했던 레이몬드 황자였으나……

“……”

어깨를 떨고 있는 페르젠과, 받들고 있는 검을 타고 흘러 내리는 눈물을 보고는 조용히 곁을 지나 막사를 빠져 나왔다.

‘백작의 눈물은…… 내 생애 처음 보는 것인가.’

아니, 그 모든 것을 떠나.

브뤼테인이라는 가문이 자신들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 자체가 이례적이라 생각하며, 레이몬드 황자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반면, 홀로 남은 막사 안에서 레이몬드 황자의 검을 쥐어 들고 있던 페르젠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상념에 빠져들었다.

‘리지…… 네 말은 틀린 점이 없을 것이다.’

자신이라는 존재에게는 너무나도 과분한 이들.

그리고 그러한 이들로부터 분수에 맞지 않는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

하지만 자신에게 너무나도 과분하고,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이라 해도……

‘그것을 자진해서 놓으려 하는 것이, 어찌 인간이겠느냐.’

스륵.

그렇게 레이몬드 황자의 검을 자신의 옆구리에 차며 페르젠이 몸을 일으킨다.

남아 있는 것은 이 세계에 악당으로 기록될, 마지막 한 페이지.

동시에 최종장이라는 것은 언제나 악당이라는 존재에게 허락된 최후의 마지노선이기도 했다.

‘그러니……’

자신이 처음으로.

악당이라는 존재로서 에필로그를 보겠노라고, 페르젠은 결의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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