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움막 안으로 돌아온 페르젠은 조용히 간이 침대 위로 쓰러진 채 눈을 감았다.
악당의 굴레를 고집한 자신에게 있어서 이번 전쟁은 아마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산이 될 것이다.
그걸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고되고, 힘이 들것이라는 건 직감을 했지만.
외부적인 사안이 아니라, 내부적인 사안으로 이렇게나 숨이 막힐 줄 누가 알았던가.
‘나는……’
그때, 고집을 부렸어야 했나.
로에르와 세자르가 간신히 살려 놓은 리지 폴 리아나 클로디아라는 여인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였어야만 했나.
“……”
이제 와서는 의미 없는 후회였다.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그 당시 자신의 선택은 올바른 게 아니었으니까.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그 시점만을 두고 봤을 때 자신의 선택 자체에 문제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에르와 세자르가 마련한 안배를 부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틀림없이 자신의 희생이었기에.
쌓아온 평판과 감춰온 오점을 드러내면서까지, 고작 리지라는 여인을 억지로 죽이는데 투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구심점이 되어줄 시엘 미드포드라는 주인공은 자신의 손에 사망했으며.
굽히지 않던 적개심을 품고 있던 로에르와 세자르 또한 세상을 떠났고, 악연의 시발점이었던 클로디아 가(家)는 멸문 당했으니.
세상에 홀로 남겨져 자신이라는 존재에게 굴복당한 그녀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이 조금만 주어진다면, 또 그 시간 속에서 등을 살짝 떠밀기만한다면.
자신은 아무런 대가도 치루지 않은 채, 굳이 더 이상의 죄책감과 죄를 쌓지도 않은 채 모든 일이 끝날것이라 믿었다.
적어도 그녀가 주어진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다는 그림만큼은, 확고하다고 판단을 했었다.
결국, 결과론적으로는 잘못되었을지라도.
그 당시의 상황에서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고, 어떻게 확연히 단정 지을 수 있겠는가.
「 페르젠. 」
「 내 아이 뿐만이 아니라, 내게도 좋은 남편이 되어주세요…… 」
“……”
「 페르젠. 」
「 당신이 어떤 추악한 짓을 저질렀든. 또 추악한 짓을 저지르든…… 나는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당신 곁에 있을 거야. 」
“……”
「 페르젠. 」
「 사랑하는 나의 동생아. 나는 너의 형이자 유일한 가족으로써, 세상의 모든 풍파로부터 너를 지켜주는 성벽이 될 것이란다. 」
“……”
「 백작. 」
「 이제는 우리도, 혼자 일어나 걷는 법을 배울 대도 되지 않았더냐. 」
「 보살핌을 받는 아이가 아니라, 합당한 군신의 관계로서 전장에서는 그대의 동반자가 되어 설 것이다. 」
「 절대로 이 전쟁 조차 그대들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의지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
「 이런 우리의 곁에서, 다가올 겨울을 넘어 함께 봄을 맞이 해주겠느냐. 」
“……”
여기에는 없을.
이제는 자신의 돌아갈 보금자리라고 말할 수 있는 곳에, 또는 다른 전장에 서있는 소중한 이들의 목소리를 뇌리에 떠올리며 페르젠은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그래……’
나는 안일했고.
또, 욕심을 냈던 것이다.
무엇이 가진바를 더 잃기 싫다는 발악이었단 말인가.
무엇이 굳이 쌓을 필요가 없는 죄책감과 업보였단 말인가.
사실 그것들은 표면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았고.
‘나는 그저……’
유페미아와 유리엘에게 좋은 남편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가족인 제레미아에게 떳떳한 동생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제관의 핏줄로서 황실에게 자랑스러운 기둥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악당의 굴레에 완전한 마침표를 찍지 않고 그것을 움켜쥐려 했던 건, 과욕이었던 것이리라.
“잠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
조잡한 천막 하나를 두고 들려오는 아스텔의 목소리.
그에 페르젠은 상체를 일으켜 간이 침대에 걸터 앉은 뒤 들어올 것을 허락해주었다.
“황자 전하께서 부르시던가.”
“아닙니다. 단지, 제 조의 소속인 리지가 거처를 옮기겠다고 하여 부대원들과 상의를 마친 뒤 보고를 하러 왔습니다.”
“다시금 이곳으로 돌아와 부대원들과 같이 지내보겠다고 하였나?”
“예? 예! 그렇습니다.”
전말을 상세히 전해 듣지 않고도, 리지가 옮기려는 거처가 어디인지는 곧바로 짐작이 갔기에 페르젠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은 뒤 손을 저었다.
“알겠다. 십부장인 그대가 부대원들과 상의를 마치고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면 상관이 없겠지.”
“예. 그러면 이만 물러나보도록 하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숙인 뒤 다시금 천막 너머로 사라지는 아스텔을 보고서 페르젠은 지치고 무거운 몸을 침상에서 완전히 일으켰다.
그녀가 굳이 이곳으로 돌아와 부대원들과 최대한 부대끼는 생활을 하려는 것은, 추론할 필요도 없을 만큼 너무나도 적나라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
‘너를 죽이려면……’
나름의 대가를 치루라는 뜻이더냐.
어젯밤과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자신의 목에 들이미는 칼날이 허접해져 페르젠은 그만 입밖으로까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리지. 너는 아느냐.’
이 세계는 더이상 새하얀 화면에 채워진 검은 활자들로만 굴러가는 세계가 아니기에.
꼭, 주인공만이 무언가를 잃지 않고.
모든 것을 손에 넣으리라는 법은 없다.
‘황자 전하에게 건의를 드려야겠구나.’
별동대를 편성하여 나서게 된다면, 보는 눈도 줄어들 것이고.
그녀가 자신에게 저항 할 수 있는 수단 조차 한없이 0에 수렴하게 되겠지.
‘안일하게 욕심을 낸것이 문제라 한다면……’
이 질척한 악보의 피날레를 위해, 기꺼이 도돌이표로 돌아가 다시금 연주를 하겠다.
악(惡)의 끝은 악(惡)으로.
그보다 어울리는 것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리라.
* * * * *
“……”
비가 그치고 난 이후라 그런지, 피부에 맞닿는 바람이 무척이나 차가웠다.
저벅.
그리고 그렇게 바람을 쐬며 레이몬드 황자의 부름을 따라 회의를 위해 막사로 이동하던 페르젠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별동대의 편성에 관해 건의를 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그 편성을 받아낼 수 있는 근거와 목적성이 부실한 건 사실이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우는 것만으로도 전장에 가해지는 압박감은 말로 할 수가 없을 테고.
애초부터 이 세계는 전술을 상회하는 전략이 나올 수가 없는 구조를 이루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그 점을 파고든다면, 별동대를 편성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왔는가.”
막사 안으로 들어서니 좌중에 앉아 있는 귀족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상석에 앉은 레이몬드 황자가 입을 열자 페르젠은 꾸벅 허리를 숙인 뒤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 착석했다.
“그러면…… 현 전선에 대해서 그대들에게 이야기를 들어야 하겠군.”
“저희들의 의견 보다는, 루에르그 백작의 보유 재화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 그 또한 틀린 말은 아닐 터.”
적어도 이곳에 간자는 없을 테니, 안심하고 말을 하라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레이몬드 황자의 말에 페르젠은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앞으로 세 번 정도 남았습니다. 전하.”
“세 번이라……”
“으음.”
“허……”
동시에 그것을 전해들은 레이몬드 황자와 귀족들은 옅은 침음을 흘리며 각자가 불안한 상황에서 선보이는 버릇을 머금기 시작했다.
단순한 재화, 그중에서도 금화 같은 경우라면 얼마든지 조달을 하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흑마법사가 명계의 괴이와 거래를 할 때 지불하는 재화는 이 세계에서 값어치 있게 책정된 “물품” 그 자체였다.
A라는 물건이 있어도, 그 물건이 한 번도 거래가 되지 않은 것이라면 명계와 거래를 할 때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
특히나 그 횟수가 오랜 시간 누적 되어야 하기에, 의도적으로 가치가 없는 물건을 거액에 사들여도 의미가 없었다.
페르젠이 명계의 문을 여는 건, 자신의 마력이 그레모리 여제보다 빠르게 소진되었을 때 그녀를 물리게 하기 위한 용도.
즉, 앞으로 세 번의 전투가 더 일어난다면 페르젠이라 하더라도 그레모리 여제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아니, 상대하는 것은 가능하겠으나 다수의 시신을──그것도 브뤼테인의 전대가주들을 사역하는 만큼 한계는 빠르게 찾아올 터.
물론, 지금까지의 전투로 그레모리 여제의 육신도 상당히 망가진 상태였으나……
오러 나이트는 그런식으로 본인을 갉아 먹는 만큼, 개인이 낼 수 있는 위력은 더욱 높아진다.
때문에 그레모리 여제가 괴물이자 살상병기로써, 가장 최대의 고점을 찍히게 만든 상태로 페르젠이 그녀를 붙잡아 둘수 없게 된다면 끔찍하고 비참한 결말이 드리우리라.
꿀꺽!
그 숨막히는 듯한 상상에 좌중에 앉아 있는 귀족들은 냉수를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페르젠은 흘러가는 분위기를 파악한 뒤 넌지시 입을 열었다.
“전술을 상회하는 전략이 나올 수가 없는 전쟁이지만…… 그렇다고 효과 없는 전략은 존재하지 않겠지요.”
“생각이 있는가. 백작?”
“기본적으로 제가 보유한 재화와 그레모리 여제간에 불균등한 등가교환이 발생하는 건, 간단하게 말해서 퇴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명계의 문을 열어, 3층에 서식하는 괴이를 불러내도.
그레모리 여제에게는 맞서 싸운다는 선택지가 아니라 후퇴를 하는 선택지도 존재했다.
그 과정에서 병사들이, 자신의 가신들이 얼마나 죽어 나가든.
결과적으로는 이득을 보는 것이 되기에,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는 것.
“퇴로가 문제라 한다면…… 아! 혹시 너머의 상류쪽에 크게 흐르고 있는 강을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이틀에 걸쳐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으니……”
“그렇습니다.”
애초에 흐르던 강이 메말라 생겨버린 협곡이기에.
주변 지형이 무너졌다고 한들, 상류 쪽에서 대량으로 불어난 강의 흐름을 뒤바꾸면 퇴로를 막는 것이야 어렵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수진을 치고 모든 수를 꺼내들어 부딪치는 것만큼 정직한 총력전은 없겠지.
심지어 방향을 틀면 협곡의 출구 쪽을 가장 먼저 덮치게 되니, 엘마르크 제국 소속 원소 마법사들은 대다수가 후미로 빠져 강의 물살을 틀어 막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엘마르크 제국의 보급 부대가 오는 루트와 겹칠 터. 나름의 대비를 필시 하고 있을 텐데.”
밑그림은 좋으나, 도저히 채색할 방도가 보이지 않는 그림이라며 레이몬드 황자는 고개를 슬며시 저었다.
“그러니 별동대를 편성해야 하겠지요.”
“도중에 끼어 들어서 미안하지만…… 루에르그 백작. 별동대를 편성해서 보내는 건 어렵지 않겠으나, 백작의 보유 재화를 고려 했을 때 그 별동대는 반드시 성공을 해야하오.”
“그렇겠지.”
“허면 도중에 발각 되는 가장 최악의 상황에도 작전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백작이 참가해야만 하네. 하지만 그건……”
이견을 제기하는 귀족이 말끝을 흐리자 페르젠은 옅게 웃었다.
“나는 엘리알타 협곡의 상류에 위치한 강까지 쭈욱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걸세.”
“……”
“오히려 중간에 떨어져 나와 이목을 끌 생각이네. 그 동안 별동대는 위로 올려 보내고, 나는 다시 돌아와야겠지.”
“그대가 소수의 인원을 데리고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그레모리 여제가 인식한 순간, 틀림없이 집요하게 뒤쫓을 걸세. 별동대를 올려보내기 위해 이목을 끄는 건 좋으나, 그대가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은…… 너무나도 낮지 않나? 초치는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적어도 가식을 떨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라네.”
“비난할 생각은 없네. 그렇기에 나는 명계의 문을 열 생각이니까.”
“세, 세 번 밖에 없는 기회라 하지 않았나?”
“간단한 상식을 잠시 잊었는가? 흑마법사는 자신의 목숨 또한……”
“백작──!”
덜컥!
말을 끊으며, 탁상을 내려치는 레이몬드 황자가 가파른 숨을 토해내며 자신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 이상의 말은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입술을 꽈악 깨물며 주먹을 말아쥐기만 할 뿐이었다.
엘리자베스 황녀가 자신에게 말했듯이, 지금의 황실은 브뤼테인의 희생으로 얼룩진 역사를 쌓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을 어떻게 이자리에서 할 수 있을까.
여기에 있는 다른 귀족들 또한, 엄연히 에르네스 제국의 신하들인데.
“전하.”
그에 페르젠은 로벨리움 왕국에서 엘리자베스 황녀에게 했던 말을 그에게도 똑같이 들려주었다.
“저희의 충의를 갚아야 할 빚이라고 여기지 마소서.”
그 때와 다르게 신경이 거슬리는 건, 애당초 위험부담을 짊어지려는 이 작전에.
황실을 향한 충의보다 개인의 욕심을 더욱 짙게 머금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참으로 많은 것이 변했구나 싶어, 페르젠은 고개를 숙인 레이몬드 황자를 보며 쓰게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