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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220화 (220/260)

페르젠.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

이 남자가 처음으로 자신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리지는 벅차오르는 희열에 기뻐서 미칠 것 같았다.

항상 무채색으로만 그려낼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감정이었는데.

갑작스레 형형색의 물감을 쥐어주니, 도저히 어떤 색부터 골라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자……”

그전에 가장 먼저, 어미새가 아기새에게 먹이를 물려다 주듯.

리지는 자신의 오른손을 밑으로 뻗어 페르젠의 손등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붉은 입술을 그의 귀에 가져다대고는, 키득키득 비웃으며 편안히 품으로 안겨 든다.

“뭐하고 있어요? 당신의 강박증은 내 오른손 중지를 당장이라도 꺾어 버리고 싶어 하잖아.”

분산 되었던 정신이 그녀의 속삭임을 통해 잠시 흐트러진 강박 증세를 다시금 인지하자, 페르젠은 마치 인간이 공기를 들이키는 본능처럼.

꽈악!

그 자그마한 손을 붙잡고, 가냘픈 중지를 움켜쥐었다.

“아핫……!”

이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니, 괴로움에 찌푸려진 표정이 너무나도 선명히 자신의 두 눈에 스며든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워도 페르젠은 피해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8년전의 그날, 페르젠 스스로가 선택했던 결과의 연장선이었으니까.

뚝.

뚜둑!

그래서일까.

처음과 다르게, 자신의 오른손 중지가 기괴하게 꺾이는 과정에서도.

리지는 아픔이 서린 신음을 입밖으로 흘리지 않고, 조용히 희열 섞인 뜨거운 숨을 내쉬며 페르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고통조차 이겨내는 쾌락이라는 게 있다면, 분명 이러하겠지.

“너무 걱정하지는 마요.”

“……”

“유리엘 언니는, 아마 뻐근하다는 느낌을 받는 선에서 그쳤을 테니까.”

뒤로 꺾인 채 파르르 떨리는 자신의 오른손 중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손을 뻗은 리지가 페르젠의 얼굴을 더듬거리며 입꼬리를 슬그머니 말아 올렸다.

“괴로워요?”

“……”

“괜찮아요. 내가…… 당신은 원래 그럼 사람이었다는 것처럼 만들어 줄 테니까.”

스륵.

그의 얼굴을 더듬거리던 두 손을 내리고, 다소곤히 자세를 고쳐 앉는 리지가 페르젠을 보며 아름다운 눈웃음을 짓는다.

그 자태는 마치 초야를 치루는 날, 침실에서 수줍은 마음으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같았으나……

“그 손으로, 제 뺨을 때리도록 해요.”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온 한 마디는, 아니 그 명령은.

일말의 로맨틱함도 머금고 있지 않았다.

“손바닥이 아니어도 좋아요. 주먹을 쥐어도 상관없어요.”

“……”

“무얼 망설이고 있어요? 멀쩡하던 다리를 분지르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텐데.”

그게 아니라면.

“사실 당신의 천칭에…… 유리엘 언니는 얹혀 지지도 않았던 걸까.”

극독을 머금고 있는 벌레가 위치한, 자신의 목 부근을 슬며시 매만지며 리지는 페르젠에게 형태가 없는 칼날을 내밀어 협박했다.

짜악!

그것이 효과가 없지는 않았던 건지.

리지는 그 직후, 얼얼한 통증이 왼쪽뺨을 강타함과 동시에 시선이 강제로 돌아가자 자신도 모르게 오금이 저려오는 감각을 느꼈다.

엄연히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자신이라도, 몸 깊숙히 새겨진 트라우마는 이 우악스런 폭력에 자연스레 두려움을 머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어떻게 제어해야 하는지,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지.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찢어진 입술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핥으며 페르젠을 쳐다보았다.

짜악!

그러나 곧바로 자신의 오른뺨을 후려치는 페르젠의 손길에 기어코 리지는 처연히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하…… 아하하……!”

실성이라도 한듯.

옅은 실소와 함께 비틀거리는 상체를 일으키는 리지가 찢어진 입술과 멍이든 얼굴을 페르젠에게 선보이며 웃는다.

그에 페르젠은 그녀의 뺨을 후려친 촉감이 선명히 남아 있는 자신의 손을 꽈악 말아쥐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네 몸을 자해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

“글…… 쎄요? 하지만 당신이 나를 이해시켜주지 않았듯. 나 또한 당신을 이해시켜줄 필요는 없잖아요?”

도대체 언제부터.

당신과 내가, 알지 못하는 서로의 요소를 이해하려 드는 사이였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불쾌하니까 앞으로 나에게 질문 같은 걸 하지 말아요.”

“……”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들의 목소리는 들은척 하지도 않았던 주제에, 왜 이제와서야 어설프게 귀를 기울이려는 걸까.”

가식적으로 짓고 있던 눈웃음을 치우고, 그 너머에 일렁이는 원한과 증오를 드러내는 리지가 싸늘하게 대답한다.

“그 8년의 시간 동안 반대로 당신은 행복했겠죠? 설령 강박증에 끝없이 시달렸다고 한들, 우리 클로디아 가문 보다는 좋았을 것 아니에요.”

아.

“이제는 상대적인 행복도 아니겠네요. 가족을 꾸리는 행복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얻는 즐거움을…… 당신은 이미 누리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

자신의 가문이 겪은 비극과 불행 위로 쌓아 올려진 것이라 생각 할 때면, 리지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분노와 억울함에 반사적으로 손이 올라 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굳이 유치한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리지는 한 번더 가식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페르젠의 목에 두 손을 둘렀다.

그 모습을 옆에서만 보자면 사랑하는 사내에게 요염하게 아양을 떠는 여인 같았으나, 정작 가까운 거리에서 리지와 대면하고 있는 페르젠은 그녀가 지니고 있는 지독한 독기에 자신도 모르게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어 전신의 피가 바짝 마르는 듯 했다.

쪽.

이윽고 리지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남자이자, 가장 증오하는 원수인 페르젠에게 자신의 첫키스를 바쳤다.

움찔!

도저히 이 행동의 의도가 무엇인지 페르젠 본인도 간파하기가 어려웠으나……

콰득!

“큭!”

곧이어 어설프게 혀를 밀어 넣는 리지가 자신의 혀를 옭아매고는 이빨로 거칠게 짓씹어오자 페르젠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뒤로 내뺐다.

“흐윽!”

아니 그 순간, 페르젠은 발작하는 자신의 강박 증세를 통제하지 못하고 리지의 뒷머리를 거칠게 붙잡아 다시금 짐승처럼 입술을 맞대었다.

그리고는 어설픈 그녀와 다르게 너무나도 능숙한 혀놀림으로 그녀의 설육을 붙들고는, 똑같이 혀를 짓씹어 상처를 낸다.

“……”

“……”

그 끝에 페르젠과 리지는 서로의 입안에 짙게 맴도는 혈향과, 비릿한 피의 맛을 느끼며 입술을 떨어 트렸다.

“아…… 아하하……!”

“……”

“어때요? 유리엘 언니와 나누던 입맞춤과는 달라서 많이 당황했을까?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당신에게 어울려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이……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하잖아.”

평범한 사람처럼 상냥하고.

사랑을 받은 만큼 그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그러한 인간성이 당신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며 리지는 자신의 옷을 천천히 벗어 내렸다.

그러자 적군의 피와 흙먼지로 물들어 있는 제복 너머로 드러나는 것은……

마른 체형 탓에 희미하게 보이는 늑골.

새하얀 피부와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

털하나 없이 꼬옥 다물린 수줍은 음부.

마지막으로, 전장을 구르며 새겨진 “대칭이 맞지 않는 멍자국들” 이었다.

그리고 리지는 예상대로 페르젠의 붉은 눈이 자신의 가슴도 음부도 아니고.

대칭이 맞지 않는 멍자국들을 쫓고 있는 것을 확인하며 편히 주저 앉은 뒤, 두 다리를 음탕하게 벌렸다.

그를 유혹하려는 의도 보다는, 자신의 허벅지와 엉덩이에 새겨진 멍자국 또한 선명히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잘 보이나요? 당신이 또렷하게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미리 깨끗하게 씻어 두었는데.”

적나라한 나신을 선보이며 일말의 수치심도 느끼지 않는 리지가 입가에 조소를 머금고 말을 잇는다.

“이 비루한 몸뚱이로…… 내가 당신에게 다시 알려 줄게요.”

“……”

“당신은 반드시 다른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망가트리는 것밖에 할줄 모르는 괴물이라는 것을. 자……”

이내 리지는 페르젠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그의 저주스런 강박증을 재촉하는 마침표를 찍었다.

쿵!

이후, 자그마한 움막 내부에서 펼쳐지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일방적이고 잔혹한 폭력이었다.

“끄윽! 끄……! 아아악!”

리지 또한 자신이 초래한 일이고, 감내 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나.

역시, 육체의 통증을 완전히 무마할 만큼은 아니었던 건지 벌벌 떨며 수시로 몸을 웅크리는 본능적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페르젠은 그것을 억지로 풀어내고, 자신의 붉은 눈을 움직여 대칭이 맞지 않는 멍자국들을 찾아낸 뒤 그것이 올바른 균형을 이루게끔 여린 몸에 폭력을 휘둘렀다.

아둥바둥 거리는 몸을 뒤집고, 그녀의 등허리쪽에도 다른 멍이 없는지를 찾아나서며 지독하리만큼 집요하게 잔인한 고통을 선사해나갔다.

하지만 리지는 죽을 만큼 아팠어도.

반대로, 죽을 만큼 강렬한 쾌락을 느꼈다.

매번 “아픔.” 이라는 것은 페르젠에게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것이었는데.

자신이 아픈 만큼, 그도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하니.

이 쌍방통행으로 이루어진, 어딘가 심각히 비틀리고 어긋난 질척한 교류가 왜 그리도 마음에 드는 것인지.

지금까지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냥한 말과, 사랑한다는 속삭임을 내뱉었을 그의 입술.

지금까지는 다른 누군가에게 포근한 안식처이자, 지친 마음을 달래주었을 그의 커다란 손.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철저히 뒤바꾸고, 더럽히고 있다는 자각이 들자 리지는 자연스레 내뱉는 비명에 웃음을 섞었다.

그렇게 기나긴 폭력의 시간이 지나가자, 리지는 좀처럼 몸을 가누기도 힘든 통증에 숨을 헐떡였다.

그 와중에도 최대한 힘조절을 한 것인지, 뼈가 부러졌다거나 금이 갔다는 느낌은 오지 않는다.

페르젠이라는 이 남자가, 미약하게나마 이성의 끈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툭.

그래, 그것은 널브러진 자신 위에서 거친 숨을 토해내며 본인도 인지하지 못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 페르젠의 처량한 모습이 말해주고 있었다.

유리엘은 거의 아무런 느낌을 받지 않았을 텐데도.

간접적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러한 짓을 했다는 것이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괴로운 것이리라.

“슬…… 퍼요?”

하지만 리지는 페르젠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있자, 피어오르는 통증조차 모조리 잊어버릴 만큼.

아랫배가 욱씬거리는 희열 젖은 쾌락에 물들어나갔다.

“안타깝게도…… 이게, 끝이 아니에요……”

몽롱한 눈빛으로 페르젠을 올려다보던 리지가 그의 얼굴을 더듬거리던 손을 내린다.

그리고는 단 한번도 남성을 경험한적 없는, 그 좁디 좁은 음부를 다친 손으로 슬며시 벌리고는 페르젠을 향해 말했다.

“당신의 입, 당신의 손 뿐만이 아니라…… 당신의 성기 조차도, 분수에 맞지 않는 교류를 나눴잖아요?”

사랑하는 여인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여인이 쾌락을 느낄 수 있도록.

애정을 주고, 애정을 받는.

그러한 섹스는 당신에게 사치라고 말하며, 리지는 멍들고 찢어진 입꼬리를 비틀어 끌어 올렸다.

“그러니…… 이 또한 내가 알려 줄게요.”

남을 다치게하고.

남을 망가트리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당신에게 어울리는 섹스를.

……이것은 분명, 자신에게 있어서 최악의 첫경험이 되겠지.

하지만 분명, 자신의 초야가 최악으로 치닫을수록.

그가 느낄 괴로움 또한 짙어질테니,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하며 리지는 멍든 눈가를 곱게 휘었다.

‘아아……’

하늘에서 이 지상을 굽어다 보고 계실, 나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신이시여.

‘드디어…… 제가 살아 가야 할 이유를, 찾았나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밖에 줄 수 없는, 그러한 운명을 가진 짐승들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쏟아지는 빗소리에 잔잔히 묻혀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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