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 깊었던 재회의 시간이 지나가고.
페르젠과 유리엘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다시금 옷을 차려 입은 뒤 천천히 지하를 빠져 나왔다.
그러자 바깥은 마치 기나긴 시간이 흘러갔다는 듯, 화창했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어둑하게 물들어 곧 비가 올것만 같은 흐린 날씨를 자아낸다.
분명 체감상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은데.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데 집중을 했던 터라, 각자의 육체가 전해주는 시간적 감각을 온전히 믿지 못했다.
특히 유리엘은 차라리, 모종의 힘이 작용해 훌쩍 시간이 지나버렸으면 어땠을까하고……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생각을 머금게 되었다.
이미 엘마르크 제국군의 군대가 이곳을 휩쓸고 지나간 뒤, 에르네스 제국을 함락 시키고.
그로부터 수십, 수백년의 시간이 지났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이것은 이기적인 생각이다.
그의 아이를 품고 있는 유페미아도.
그의 유일한 혈육이라 할 수 있는 제레미아 후작도.
대대손손, 충성을 바쳐왔던 황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이니까.
분명, 그런 세상이 갑자기 눈앞으로 닥친다면 아무리 페르젠이라도 헤어나올 수 없는 슬픔에 빠지겠지.
하지만 그런 페르젠에게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게 자신일테니, 유리엘은 은연중에 그 망상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와의 관계가 보다 깊어질수록.
커져가는 사랑에 비례하여, 지독하리만큼 추잡한 독점욕 또한 덩치를 부풀려나갔다.
꾸욱!
이것만큼은 그에게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의 속내.
그리고 머잖아 그 이기적인 망상을 깨트리듯, 에르네스 제국의 진지가 드러나고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에 페르젠과 유리엘은 각자 다른 의미가 담긴 옅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 * * * *
스륵.
오늘 하루간 머무를, 자신의 움막을 정돈하며 유리엘은 올곧게 허리를 폈다.
다음 번 이곳에 도착할 때는 언제일까.
쏴아아아!
바깥에서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빗줄기가 굵지는 않은 걸 보아하니, 상당히 오랜 시간 쏟아질 겨울비일까.
끼릭.
그렇게 조용히 홀로 감상에 빠져있던 유리엘은, 문득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소음에 고개를 돌렸다.
“……”
“……”
그러자 우산하나 쓰지 않고, 자신의 시신을 사역해 휠체어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서는 리지가 보인다.
정돈되지 않은, 산발이 된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리는 흙먼지와 피.
꿉꿉한 습기가 내려앉아 있기 때문인지, 그녀로부터는 희미한 악취가 더더욱 짙게 풍겨왔다.
“……무슨 일이니.”
“미안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어서요……”
“……”
툭 치면 쓰러질것만 같은, 그런 초췌한 안색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리지의 보랏빛 눈동자를 마주하며 유리엘은 잠시 두 눈을 감았다.
그녀가 사과하고 싶다는 건, 반은 진심일테고 반은 자신을 떠보기 위함이리라.
자신들 가문이 권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페르젠에게 팔려나간 모양새가 된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주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페르젠과 사이가 좋아 보였던 그 광경이, 단순 연기에 지나지 않았다고.
그러한 두 마리의 토끼를 모조리 잡고 싶은 것일터.
……만약, 자신이 눈앞에 있는 리지를 조금이라도 위한다면.
그것에 어울려 주는 것이 맞을 것이다.
페르젠에게 겪은 아픔, 그것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벼랑 끝에 서있는 리지에게는 자그마한 위로가 될 테니.
하지만 유리엘은 리지의 그 간절한 바람에 화답해 줄 수가 없었다.
한 가문을 멸하고.
한 가족을 죽이고.
한 여인을 핍박했던 그를 사랑한 것은, 결코 타의가 아닌 자의였으니까.
때문에 유리엘은 페르젠을 향해 품고 있는 이 감정이, 단 한사람에게라도 왜곡된 방향으로 해석되는 걸 원치 않았다.
설령, 그것이 리지에게는 잔혹한 폭력일지라도.
“리지.”
그렇게 마음을 먹고, 결단을 내린 끝에 유리엘은 두 눈을 뜨고서 리지를 마주본 채 입을 열었다.
“내게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 하지만……”
“나는 그에게 팔려 간 것도 아니고, 불행하게 지내지도 않아.”
“여, 여기는!”
“……”
“보, 보는 눈이 없으니까……”
휠체어의 팔걸이를 붙든 그녀의 손이 애처롭게 떨리고.
일그러지는 얼굴이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내려 든다.
어떻게든 자신의 입에서 흘러 나올, 가장 듣기 싫은 사실을 외면하고 싶다는 처절한 몸부림.
그러나 망설임은 이미 마음 한 구석으로 치워놓았기에, 유리엘은……
“리지. 나는 그이를 사랑하고 있어.”
한 여인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한 마디를 건네었다.
“거, 짓말……”
“……”
“흐, 끄흑……! 거, 거, 거짓말……”
“……”
“언니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잖아……”
“……”
“내, 내 가문을…… 내 가족을…… 그리고 나의 인생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송두리째 짓밟은 사람인데──!”
“그 이유 때문에, 내가 내 행복을 포기해야만 하는 거니.”
“아……”
“너는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이를 사랑하는 것에 화가 난 게 아니라, 지금 자신의 처지에 공감해줄 수 있는…… 너와 똑같은 불행으로 얼룩진 나를 원하고 있는게 아닐까.”
“그, 그런 건……”
“네 처지에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로하기에, 나또한 불행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는 너야말로…… 잔인하고, 이기적이다는 생각을 해본적은 없니.”
“아, 아니…… 아, 아……”
아니라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유리엘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너무나도 아플 만큼 자신의 정곡을 찔러 왔기에.
리지는 그대로 말문이 막혀버렸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와 똑같이 페르젠에게 핍박 받고 있을 그녀에게.
쓰레기통을 뒤지는 길고양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듯.
자그마한 위안과, 위로를 받고 싶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을 과욕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니, 하다 못해.
그때 그 시절처럼, 자신의 가장 든든했던 언니로서.
애정 한 조각을 나눠줄 수는 없었던 걸까.
“왜……”
“……”
“왜에……!”
그는 다른 사람을 이렇게 사랑하고 소중히 여길 수 있으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그런 짓을 저질렀던 걸까.
“왜에에……!”
그런 사람이, 이토록 사랑을 받는 걸까.
“흐아아앙……!”
기어코 세상에 홀로 남겨진 사람처럼, 눈물을 쏟아내는 리지가 목놓아 운다.
그리고 그런 리지의 처량한 모습을 바라보며, 유리엘은 아무런 말을 해줄 수 없었다.
이로소 악당인 자신의 남편에게 어울리는……
악녀 같은 아내가 되었을까.
유리엘은 고개를 돌린 채 쓰게 웃었다.
* * * * *
“……”
얼마만의 휴식인지.
물론, 이 또한 서로가 다시금 채비를 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겠으나.
페르젠은 보급된 육류들을 배불리 먹고서 어느정도 활기를 되찾은 병사들을 보며 피고 있던 연초를 젖어든 바닥에 버린 뒤 우산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는 조금씩 찾아오는 밤의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어쩌면 태양보다 더욱 밝게 주변을 밝히는──비에도 꺼지지 않는 원소 마법사들의 불꽃을 길잡이 삼아 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도착한 자신의 움막 안으로 들어섰을 때, 페르젠은 비어있는 간이 침대가 아니라……
“오, 오랜만…… 이, 이네요……”
조신하게 앉아 있는 라우라가 자신을 반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네가 이곳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았을 수도 있는데, 너무 생각 없는 행동이 아니냐.”
“사, 사람들의 눈은…… 추, 충분히 피, 피해서…… 드, 들어 와, 왔어요……”
무얼까.
평소보다 더욱 말을 더듬는 자신을 느끼며 라우라는 가녀린 손으로 주먹을 꼬옥 말아 쥐었다.
설마 자신이 그것도 신경을 쓰지 않았을까.
솔직히 암캐 냄새를 풀풀 흘리며 무작정 뛰어가던 유리엘보다, 자신이 더더욱 배려에 가까운 신경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 그전에.
정말 오랜만에 보는 자신에게 건네는 첫 한 마디가 저것이라는 사실에 라우라는 괜히 울컥하는 마음이 치밀었다.
최전선에서 솔직히 그의 가장 커다란 힘이 되어주었던 건 전생의 자신일 터.
그 사실을 하나도 모르는 눈앞의 페르젠이 자신을 이리도 박대하는 느낌을 주니, 이제는 서럽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
그리고 페르젠은 어딘가 토라진 듯한 라우라의 분위기에, 조금전의 상황을 뇌리에 상기시키고는 곧장 자신이 무얼 실수했는지 깨달았다.
“미안하구나.”
움찔!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라우라.”
갑작스러운 사과와 함께, 곁에 앉는 페르젠이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듣고 싶었던 다정한 말을 건네오자……
라우라는 온 몸을 옅게 떨며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 자신의 속내가 읽힌 것 같아서 부끄러웠고.
혹시나 그 때문에, 자신을 귀찮은 여자로 생각하지는 않을지 그러한 걱정이 앞서게 된다.
‘사내를 좋아하는 여인들이란……’
모두 이처럼 스스로도 진절머리가 날만큼, 복잡한 감정들을 달고 사는 걸까.
하지만 그것이 낯설기는 해도, 싫지는 않아 라우라는 얌전히 그의 품에 스르륵 안겨 들었다.
“주, 준비는…… 다, 다해놨어요……”
“무슨 준비 말이더냐.”
등을 토닥이며 되묻는 페르젠의 말에, 라우라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명계의 제 1층에 서식하는, 부끄럼쟁이의 능력을 빌려온──촉감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차단 시키는 장막이 펼쳐진다.
“……”
하지만 페르젠은 라우라의 그 행동에 그 어떤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숨소리, 풋풋한 체향, 그 모두가 온전히 전해져왔기에.
오히려 라우라가 부끄럼쟁이의 능력을 빌려 그것을 사용했다는 건, 그녀가 보여주는 행동으로 어렴풋하게 깨달을 뿐이었다.
“이, 이걸로…… 드, 들킬 염려는……?”
제 1층이기는 해도, 해당 괴이의 능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건 좋아해야 할 변화일까.
이 변화의 원인을 굳이 꼽자면, 아직도 그 상세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은 자신의 고유 능력이겠지.
「3/5」.
피할 수 없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명계의 괴이를 강제로 강림시키는.
그 데우스 엑스 마키나에 가까운 능력의 남은 횟수는 이제 두 번.
그리고 이것을 소진한다는 건 분명 부정적인 쪽으로 저울이 기울텐데.
그러기는커녕 그 반동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펼쳐졌으니.
페르젠으로서는 참으로 묘한 생각만이 뇌리에 떠돌 뿐이었다.
“아……”
직후, 간신히 그 상념의 파도에서 빠져나왔을 때.
페르젠은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는, 또 한번 토라진 새하얀 토끼를 보고서 쓰게 웃었다.
너무 눈치가 좋아져도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왜 여자들이 괜찮게 생각했던 남자들은 죄다 유부남이라고 하소연을 하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