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209화 (209/260)

콰앙!

까극!

까가각!

왼쪽, 오른쪽, 앞과 뒤.

그리고 위.

그레모리의 움직임을 놓친다고 한들, 어차피 그녀가 파고들 방향이란 5곳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기에.

페르젠을 지키고 있는, 브뤼테인의 전대 가주들은 능수능란한 합격진으로 그녀의 공격을 깔끔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쿠웅!

이내 주먹과 검이 맞닿아 마찰하는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의 소음 끝에, 브뤼테인의 가주들이 그녀를 밀어내고.

뒤로 튕겨져 날아가는 그레모리는 허공에서 한 바퀴를 돌며 자신의 왼다리를 바닥에 내뻗은 채, 무척이나 우아하게 몸의 중심을 잡았다.

‘지독한 인내심인건지……’

도중도중, 사역하는 시신을 통해 마법을 사용하여 자신의 빈틈을 만들어 보려 할법도 한데.

페르젠은 그러지 않고, 전대 가주들의 보호를 받으며 방어만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최대한 소모되는 마력을 아껴 비장의 한방을 날리겠다는 의도인건지.

아니면 그 의도를 자신에게 각인시켜 눈치를 보게끔 하려는 것인지.

‘어느 쪽이든 하등 상관 없다. 이만하면…… 충분히 그 장단에 놀아 나주지 않았더냐.’

쿠드득!

빙판도 아닐 대지 위에서 미끌리듯 날아가던 그레모리가 자신의 두 다리를 오므리더니, 그대로 펴서 곧장 벌려진 거리를 좁힌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쫓고 있던 브뤼테인의 전대 가주들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반응하여 검을 내질렀고.

피할 사각 따위는 일절 없이 파고드는, 네 방향의 검들 중에서 우선적으로 세개를 막아낸 그레모리는……

꾸욱!

마지막으로 남은 검이 자신의 다리 틈새로 들어오자, 그대로 무릎을 모아 그것을 붙들고는 반시계 방향으로 꺾어 버렸다.

챙──!

그러자 그녀의 완력을 이기지 못한, 마력을 덮어 쓰고 있던 검이 무참히 박살나고.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은 그레모리는, 자신의 두 다리를 뻗어 눈앞에 있는 브뤼테인의 13대 가주──뤼미에의 상체를 자비없이 걷어 차버렸다.

뻐──엉!

아니, 그것을 단순히 걷어 찼다고 설명할 수 있을까.

마력을 두른 신체로 그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한, 13대 가주의 상체는 그대로 발을 딛고 있는 하체와 찢어져 페르젠의 옆을 스쳐지나가더니……

콰아앙!

무너진 절벽의 파편에 부딪쳐 비산하는 돌조각들과 함께 떨어지는 육편 조각이 되어버린다.

콰드득!

쾅!

그에 어디 한 번,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선조의 시신이 박살난 것에 대한 페르젠의 표정이 궁금하였으나.

남은 브뤼테인의 전대 가주들이 힘을 실어 자신을 바닥에 처박고 압박을 해오자, 그레모리는 그것을 부드럽게 막아내며 뒤로 거리를 벌렸다.

“……”

그리고 페르젠은 완전히 연결이 끊겨 버린.

눈앞에 처량하게 남아 있는 브뤼테인의 13대 가주──뤼미에 폰 벨레타 브뤼테인을 바라보다 그 특유의 붉은 눈을 그레모리에게로 옮겼다.

“화가 났느냐?”

바로 곁으로 찾아온 겨울처럼.

페르젠의 얼굴은 무덤덤하고 냉정해 보였다.

하지만 그레모리는 알 수 있었다.

지금의 페르젠은 분노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연설에 반하는, 무척이나 역설적인 모습이구나.”

“……”

“잠시 동안 전선을 휘저으며 그대 제국의 백성들을 죽인 수만 해도, 족히 몇백은 될 텐데. 그 때 분노를 하지 않고. 이제 와서야 이미 죽어버린 자가 또 죽어버렸다고 해서 그것에 분노를 하는 꼴이라니.”

“……”

“그래, 어차피 가식적인 위선을 떨어도. 그대도 나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다뤄본적도 없는 도구가 망가지는 것에 무슨 감정이 들겠느냐?”

아무런 대답이 없는 페르젠이 자신의 소매를 매만진다.

쿵.

그리고는 곁에 있는 이사벨과 함께, 각자의 발을 내딛어 땅을 가볍게 내려 찍더니.

“……!”

쩌저적!

콰앙!

순식간에 주변 반경의 모든 대지가 무너지며, 그 밑으로는 무저갱과도 같은 암흑이 드러났다.

지상에서부터 시작해, 그 밑의 지하에 위치한 지반 전체를 무너트린 것이다.

아무리 그녀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육신을 지니고 있어도, 디딜 곳 없는 허공에서 무슨 수로 거리를 좁힐 수 있겠는가.

반면, 페르젠은 미끄러지지 않도록 형질을 바꾼 얼음으로 길을 만들어 자신의 곁에 남아 있는 브뤼테인의 전대 가주들이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펼쳐 주었다.

그에 그레모리는 너무나도 일차원적인 그 사고 방식에 비웃음을 머금으며 코앞으로 들이닥친 브뤼테인의 전대 가주들의 협공을 막아낸 채 계속해서 유유히 추락했다.

저들이 밟고 있는 얼음을 자신 또한 밟아 보려고는 했으나, 그럴 때 마다 파삭 거리며 사라지는 것을 보아하니.

아무리 분노를 하고 있더라도, 상식적인 생각은 하고 있는 모양일터.

‘그래도 좀처럼 의미를 모르겠구나.’

이만한 규모로 대지에 간섭을 했다는 건, 적지 않은 마력을 소모했다는 뜻일 텐데.

그렇다고 한들, 오러 나이트의 극의에 도달한 인간이 이 정도 높이에서 저 무저갱으로 떨어져봤자……

온 몸이 박살나며 곤죽이 되는 광경이 펼쳐지기는 할까.

자신의 움직임을 제약했다고 해도, 저들의 공격으로는 자신을 죽일 수 없었다.

‘정말……’

순간적인 충동이 불러 일으킨 단순한 화풀이 인건지.

쩌적──!

펼쳐진 무저갱의 반절, 거기서부터 얼음의 길이 멈추더니 더 이상 형성 되지 않는다.

그에 그레모리는 저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페르젠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고고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그 추락에, 그레모리는 자신의 몸을 허공에서 반바퀴 돌려 무저갱의 벽면으로 달라 붙은 뒤 끝없이 가속한 자신의 몸을 서서히 멈춰 세우고는 불규칙 해진 호흡을 고르게 골랐다.

“후우……”

그리고는 그 짧은 휴식 끝에, 곧장 눈앞에 있는.

페르젠이 내딛고 있을 땅의 기둥이 되는──남아 있는 지반을 향해 원심력을 실어 움켜쥔 주먹을 내뻗는다.

콰앙!

쩌저적──!

백조가 하늘로 날아 오르는 듯한, 일말의 군더더기도 없는 우아한 자세였으나.

그 유함과 어울리지 않게, 지반과 맞닿은 그녀의 주먹 부근에서 퍼져나가는 균열은 거대한 거미줄처럼 펼쳐졌다.

쿠궁!

이윽고 우뚝 솟은 지반 전체가 사선으로 넘어지려하자, 두 손으로 그 지반을 짚어 반탄력을 이용해 뒤쪽의 벽몉에 붙은 그레모리는 자신의 두 다리에 힘을 주어……

──!

순식간에 자신이 떨어진, 이 무저갱으로부터 치솟아 지상으로 향했다.

콰직!

아니, 그 전에 품안에서 두 자루의 단검을 꺼내어 들고는 무너지고 있는 지반의 벽면에 거침없이 쑤셔 박는다.

파앙!

동시에 치솟아 오른 그레모리가 푸르른 상공을 마주하자, 뒤늦게 음속을 돌파한 그녀의 움직임을 알리듯 공기가 터져 나가고.

그 영향으로 그녀가 박아 넣은 단검으로부터 이어진, 투명한 실자락 같은 것이 갈대처럼 나풀거린다.

이 혼잡한 상황 속에서, 그것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리라.

이내 적군과 아군이 싸우고 있는 그 대지에서부터 연결한 얼음의 길 위에 서있는 페르젠을 마주한 그레모리는……

꾸욱!

그대로 대장장이들에게 명을 내려 제작한 강직한 철사를 각각의 손으로 움켜쥐고는 두 손을 교차시키며 말의 고삐처럼 강하게 끌어 당겼다.

쩌억!

그러자 그녀의 방대한 마력을 머금고 무너지는 대지를 종이처럼 자르며 페르젠을 향해 거리를 좁혀 드는 강직한 철사.

아마, 닿기만 한다면 사선으로 교차된 그 철사에 페르젠의 몸은 4등분으로 조각나리라.

그래.

닿을 수만 있었다면.

쩌저적!

지휘를 하듯, 페르젠의 곁에 서있는 이사벨이 그의 마력을 대량으로 폭식하며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허공을 긋는다.

그러자 저 밑바닥의 무저갱에서부터 시작해 맞닿는 상공의 전부──그 공간 자체를 모조리 얼려 버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얼음의 기둥이 형성되고.

“……”

자연스레 그 안에는 그레모리와, 그녀가 끌어 당기고 있던 강직한 철사가 얼어 붙은채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꿈틀!

아니, 그 안에서 미세하게 움직여지는 자신의 몸을 보며 그레모리는 틀림없이 고유의 형질이 변환된 얼음이라고 생각했다.

고체의 특성을 지니고 있을 얼음치고는, 미묘하게 부드러운 감각이었으니까.

움켜쥐고 있는 철사와, 자신의 몸뚱이를 빈틈없이 가두고 있는 이 얼음은 마치 다방면에서 굉장한 수압이 휘몰아치고 있는 것 같았다.

흐르는 급류면을 타고 올라가려 한다면, 그대로 휩쓸려버리거나 제자리에서 걸음이 멈춰 서듯.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원리처럼, 굉장한 저항력이 마치 이 공간의 모든 것을 얼려버리고 시간을 멈춰 세운듯한 광경을 연출 해낸다.

과연, 이것이 아폴리온 등급의 원소 마법사.

페르젠이 사역하는 이사벨이 어떤 인물인지는, 그녀 또한 알고 있었기에.

그 저력을 눈앞에서 체감하며 새삼스러운 감탄을 속으로 터트렸다.

하지만 이래서 무얼 하겠단 말인가.

단순히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용도로, 이만한 규모의 마법을 펼쳤을리는 없을 터.

그리고 그 예상이 적중이라도 한듯, 얼음 기둥의 내부가 외부와 강렬한 반응을 하기 시작하더니……

치이익!

순식간에 녹아 들며, 막대한 고온의 수증기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경지가 높은 원소 마법사가 되어야지만 할 수 있는, 모순적인 형태의 형질 변환.

내부면의 얼음만 그 온도를 올려 뜨거운 얼음으로 뒤바꾸고, 차디찬 외부의 얼음과 부조화를 일으켜 발생한 그 수증기가 이내 그레모리의 몸을 순식간에 집어 삼킨다.

함께 갇혀 있던, 무너지던 대지조차도.

유황 같은 냄새를 풍기며 그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녹아 들었다.

하지만 그 커다란 얼음 기둥이 서로 상극을 일으켜 녹는 과정에서 발생한 수증기가 옆쪽의 전선을 덮치는 일은 없었다.

자연히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만큼 뚫려 있는, 무저갱과도 같은 그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으니까.

‘……이런 의도였느냐.’

어쩜, 눈앞에 자신이라는 존재를 두고서도.

이토록 아군을 신경쓰는, 상냥한 전투 방식을 펼칠 수 있는 것인지.

혹시나 그 순간 분노했던 분위기 조차 연기였을까 싶어 그레모리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확실히 이 수증기는 마법이 아닌, 그저 부산물에 가까운 단순한 현상일 뿐이었기에.

자신의 몸을 뒤덮고 있는 마력이 막아 내주지는 않는다.

그에 자연스레 노출되는 자신의 몸뚱이가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는 부차적인 것이고.

자칫 숨을 들이키는 순간 기도는 물론이고, 폐부까지 순식간에 익어 버리겠지.

하지만 이런 것을 염두해두지 않고 전장에 섰을까.

애당초 원소 마법사들이 마법을 이용해, 단순한 자연 현상을 발생시켜 허를 찌르는 방식은……

이제는 허를 찌른다고 표현하기에도 어려울 만큼, 너무나도 일반적인 수단이었다.

때문에 그레모리는 이제서야, 자신들 제국의 흑마법사가 불러냈던 괴이를 드러내며 그 능력을 사용하였다.

파삭!

지금까지 조용히 그녀의 배꼽에 붙어 있던, 마치 번데기와도 같은 그것이.

순식간에 분열을 일으키며 온 몸을 빈틈없이 집어 삼킨다.

1층에 서식하는 괴이답게, 그 능력은 상위 등급의 괴이보다 보잘것이 없었으나.

지니고 있는, 증식이라는 고유 능력은 그레모리의 몸에 불어 닥치는 초고온의 수증기를 깔끔하게 막아주었다.

직후, 본인의 역할을 마친 괴이가 자취를 감추자.

저 밑바닥의 무저갱으로 빨려 들어가는 수증기 너머로,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페르젠을 찾던 그레모리는……

저편의 아군과 적군이 뒤엉켜 싸우고 있는 대지로부터 여전히 이어진 얼음의 길을 확인하고는, 그곳에 사뿐히 안착하였다.

조금더 힘을 주어 안착한 얼음의 길을 부수어 버리는 동시에, 그 반탄력을 토대로 쏘아져 나갈 수도 있었으나.

그녀는 일부러 그러지 않고, 페르젠에게 자신의 존재를 가볍게 알리는 것을 선택했다.

이 얼음의 길이 흔들린, 그 찰나.

페르젠은 분명히 자신의 존재를 인지했겠지.

하지만 고개를 뒤로 돌릴 틈도.

자율 통제가 아닌, 수동으로 브뤼테인의 전대 가주들을 사역할 틈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오만도, 자만도 아닌.

명백한 확신.

이내 그것을 토대로, 이 얼음의 길 너머에 있을 페르젠을 향해.

그레모리는 아주 친절히 직선으로 쏘아져 나갔다.

치이익!

아직 완전히 걷혀지지 않은 초고온의 수증기가 그녀의 피부를 뒤덮으며 살이 익는 소리를 자아내나……

어차피 그 아픔은 한 순간의 것.

뒤덮힌 수증기 덕에, 자율 통제 되고 있는 브뤼테인의 전대 가주들은 자신의 움직임에 반응할 수 없을 것이고.

흑마법사인 페르젠은 더더욱, 이 찰나의 순간에 반응을 할 수가 없으리라.

파앗──!

기어코 수증기로 가려진, 얼음의 길 너머.

투명한 얼음의 장막을 펼쳐 수증기를 막아내고 있던 페르젠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레모리가 당도한 그 시점에서, 페르젠이 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1초전, 얼음의 길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등을 돌리려 하고 있을 뿐.

하지만 그레모리의 눈동자는, 무방비한 페르젠의 뒷모습을 담지 않았다.

지척으로 당도한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호오……”

도대체 어느 순간에 열렸는지도 모를.

제 3층으로 고정된 명계의 문.

그리고 분명 문이 열려 있을 텐데, 그 어떤 괴이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광경이 기이했으나.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육신을 지니고 있는 그녀의 육감은, 명확하게 존재하는 무언가를 감지해냈다.

쿠웅!

이어서 페르젠의 뒤통수, 겨우 1cm 남짓한 그 거리를 남겨두고 그레모리가 내뻗은 손을 멈춰 세운다.

아니, 그녀가 멈춰 세운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멈춰 세워진 것.

파아앗!

그에 자연스레, 채찍으로 벽면을 후려치는 것 같은 소음과 함께.

그녀의 주먹에 담겨 있던 막대한 운동 에너지가 커다란 돌풍을 일으키며, 주변에 안개처럼 서려 있는 초고온의 수증기를 사방으로 밀어낸다.

그 끝에, 그녀는 볼 수 있었다.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할 허공에 넘실 거리는 어두운 그림자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태어나 생전 처음으로 느껴보는.

오싹한 소름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