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명이 밝지도 않은 이른 새벽.
잠을 잔다고 해도 편히 잘 수가 없는 환경이었기에, 페르젠은 해소되지 않은 피로함이 짙게 맴도는 몸을 억지로 간이 침대에서 일으켰다.
그리고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올곧게 정돈을 하고는 겉옷을 걸친 채 움막을 나선다.
그러자 교대로 불침번을 서고 있던 병사들이 꾸벅 허리를 숙여오자, 페르젠은 가볍게 그 인사를 받아주고는 리지의 움막 근처로 걸어가 연초 한대를 꺼내들었다.
폭우는 그쳤지만, 그 여파를 그대로 머금고 있는 땅.
질척거리는 흙바닥의 촉감이 별로 달갑지는 않다.
──오, 빠……
불을 붙인 연초를 깊게 빨아 들이며 숨을 내쉬자, 움막 안에서 악몽에 시달리는 리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그것을 들으며 페르젠은 조용히 연초를 피워 나갔다.
‘사는 것 보다는 죽는 것이 더 편할 텐데……’
무엇을 이루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아득바득 살아가려는 것인지.
아마 제 3자가 이러한 자신의 속내를 들여다보았다면, 기겁한 얼굴로 신랄한 비난을 퍼부을까.
하지만 페르젠은 그것이 잘못된 방식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장 합리적이고 올바른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조금씩 각인된 트라우마가 선사하는 두려움과 공포에 익숙해진 리지는, 스스로의 불행을 초래하는 광경을 통해 자신을 자극하려 들었고.
나아가 그 자해의 방식이, 그때처럼 타인에 의한 우연이 아니라 자의에 의한 물리적 수단으로 바뀌게 된다면……
틀림없이, 감추고 있던 강박 장애의 비밀이 그녀에게 들키고 말 것이다.
거부하고 싶어도, 거부할 수가 없고.
인내하고 싶어도, 결코 인내할 수가 없는.
이 저주와도 같은 족쇄 때문에, 자신은 얽힌 악연을 끊어낼 수 있는 확실한 보장이 되지 않는 한……
꿋꿋이 이 길을 걸어 가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 이겠지만, 저울 위에 자신의 삶이 올려져 있다면.
그 건너편에 가족이 실리지 않는 한, 저울이 기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고작 한 가문과.
고작 한 가족과.
고작, 한 여인에게 악마이고 괴물이 되어 자신의 행복을 거머쥘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럴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죄라 부르고, 또 업보라 칭하겠지.
하지만 자신은 그것을 현생에서 청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 부채는……’
나중에 자신이 죽어, 명계에 발을 딛게 되었을 때.
‘거기서 모조리 청산하도록 하마.’
그러니 리지, 그때 가서야.
네 오빠들과 함께, 명계의 불에 타들어가며 고통에 몸부림치는 나를 보며 축배를 들도록 하거라.
지금은 내 손으로 너를 죽이는, 그 최선의 자비조차……
죄책감을 품기가 싫어 베풀 수가 없구나.
저벅.
이내 다 태운 연초를 바닥에 버리며, 등을 돌린 페르젠은 그 자리를 유유히 떠나갔다.
* * * * *
12월 27일.
폭우에 젖어든 땅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삭막한 황무지로 바뀌고.
광활한 엘리알타 협곡의 장경만이, 드리운 태양을 머금은 채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입구 앞에서, 진지 구축을 끝낸 에르네스 제국의 군대는 그 어느때보다 조용한 침묵으로 사로 잡힌 대열을 유지하며 전진의 명령을 기다렸다.
“……”
3만 5천명의 선두, 그 자리에 서서 엘리알타 협곡을 바라보고 있는 레이몬드 황자는 격동하는 자신의 심장 부근을 꾸욱 움켜쥐었다.
자연의 장엄함을 나타내는 눈앞의 풍경이, 오늘 만큼은 거대한 뱀의 아가리 같아 그간 애써 외면하고 있던 두려움이 송글송글 피어 올랐다.
이제는 자신의 명령 하나에, 뒤에 도열해있는 백성들은 전장으로 나아가게 되겠지.
전술은 존재할 수 있어도, 전략의 가치는 무의미한 것이 이 시대의 전쟁.
하늘이 내린 군사가 내세운 계획도.
하늘이 내린 전사가 내지르는 창과 칼에 무너진다.
이곳에서의 전쟁은, 엘마르크 제국이 자신들을 뚫고 협곡을 빠져 나오느냐.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들이 엘마르크 제국을 뚫고 협곡을 빠져 나가느냐.
……둘중 하나 뿐이리라.
“가서 루에르그 백작을 불러오게. 시간이 되었군.”
“예!”
레이몬드 황자의 명을 받은 병사가, 군기 잡힌 목소리로 대답하며 빠르게 페르젠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부대원들이 지냈던 움막 안에서 조용히 향을 피우고 있던 페르젠은, 너머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숙이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직후, 레이몬드 황자의 명을 받고 안으로 들어선 병사는……
“……”
두 눈으로 머금게 된 광경에 차마 페르젠을 부르지 못하고, 꿀꺽 침을 삼킨 채 가늘게 떨리는 숨을 뱉어낼 뿐이었다.
중앙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는 향을 토대로 나열된 12개의 관.
그 관에서 일어나는, 천칭의 문양이 새겨진 제복을 차려 입고 있는 12구의 시신들.
아니, 저것을 감히 시신이라 칭할 수 있을까.
또각.
저벅.
입구로 걸어 나오는, 현재의 시간을 살아나가는 페르젠을 따라.
과거에 새겨진 에르네스 제국의 기둥들이 걸음을 내딛는다.
“무얼하나.”
“예, 예……?”
“앞을 가로 막지 말고, 그대의 자리로 돌아가도록 하게.”
“아…… 아…… 예! 알겠습니다!”
어느새 지척까지 도달한 페르젠의 목소리에, 멍하니 서있던 병사는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페르젠은 자신의 마력이 스며들어 있는, 브뤼테인의 전대 가주들과 함께 도열한 병사들을 지나쳐 가장 선두에 있는──레이몬드 황자의 곁으로 도달했다.
“……”
그리고 그런 페르젠의 모습을 보며, 레이몬드 황자는 놀랍게도 자신의 몸을 조금씩 집어 삼키고 있던 두려움과 공포가 말끔히 자취를 감춘 것을 깨달았다.
“전하.”
“아아……”
“가시지요.”
닥쳐온 악재를, 지붕이 드리워 막을 것이고.
“저희가 기둥과 들보가 되어…… 그것을 지탱하겠습니다.”
펄럭!
협곡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람이, 페르젠과 전대 가주들의 옷자락을 나부끼게 만든다.
그에 크게 심호흡을 하며 엘리알타 협곡의 장경을 두 눈에 머금은 레이몬드 황자는 손을 들어 올리며 신호를 내렸고.
그 신호를 따라, 웅장하게 퍼져 나가는 나팔의 소리가 3만 5천명의 군대에게 진군을 개시 시켰다.
* * * * *
“호……”
에르네스 제국의 진군 소식을 전해 듣고, 그것에 맞추어 군대를 이동 시킨 그레모리 여제는 협곡의 중앙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적군을 보며 작은 감탄을 뱉었다.
가장 선두에 머무르고 있는, 인간을 초월한 시력으로 선명히 보이는 천칭의 문양이 새겨진 이들.
‘저것이……’
에르네스 제국이 그렇게나 자랑스러워하는, 브뤼테인이라는 가문의 역사인가.
확실히 이미 산자가 아닌, 죽어버린 시신이 되어 통제를 당하는 입장일지어도.
거세게 몰아치는 협곡의 바람을 타고 피부로 와닿는 그들의 기백은 남다르게 느껴졌다.
“적어도, 킹을 잡는 것은 체크메이트가 아니겠구나.”
피식 웃는 그레모리 여제가 입꼬리를 말아 올린다.
주어진 생에, 몇년만에 느껴보는 짜릿한 긴장감이란 말인가.
그것에 움츠려들기는커녕, 오히려 전율하는 즐거움을 느끼며 그녀는 대치 상태로 접어든 구도에서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었다.
“준비는 끝났더냐.”
“예. 그러하옵니다. 폐하.”
그리고는 준비를 끝마친 마법사들을 보며, 프리기아 후작이 적어 주었던 문서의 내용을 뇌리로 되짚은 채 입을 연다.
──비록 적이 되어 그대들을 마주하게 되었으나, 가여운 마음에 본녀가 감히 질문 하나를 그대들에게 던져보도록 하겠다.
──그대들의 황실은 부정한 평화보다는, 올바른 전쟁을 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해야만 하는 전쟁이라고 포장을 하였다.
──하지만 이 세상에 감히, 「 나쁜 평화 」 와 「 좋은 전쟁 」 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느냐?
* * * * *
눈에 들어오는 특유의 푸른 머리카락.
오러 나이트의 극의에 도달한 존재답게, 편안한 차림으로 고작 검 하나를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어찌보면 오만방자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저것은 분명, 그녀에게 있어서 최선이자 최고의 무장이겠지.
그리고 그 감상과 함께, 그레모리 여제의 목소리가 엘리알타 협곡 안에 울려 퍼지자 페르젠은 피식 웃었다.
전쟁을 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한 그녀가 저런 시답잖은 연설을 준비해왔을리는 없을 테고.
아마, 로벨리움 왕국에서 마주했던 프리기아 후작이라는 사내가 알려준 것일까.
평화와 전쟁이라는 단어 뒤에 역설된 수식어를 붙이는 것만으로도, 그 모순된 점은 확실히 병사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리라.
어렵고 기나긴 말로 치장하는 것보다, 이토록 간단히 내뱉는 말이 파급력은 더 클 수 밖에 없으니.
다만, 파훼하기에 어려운 논리는 아니었다.
──그 질문에 대하여, 이쪽에서 도리어 묻겠다.
곁에 단란히 서있는 이사벨이 페르젠의 의지를 따라 대기에 간섭하여 그의 목소리를 울려 퍼지게 만든다.
──저항할 수 없는 폭거에 체념한 이들은, 좋은 평화를 이루고 있는 것인가?
──자식들을 위해 남편의 폭력을 참아내며, 멍이든 얼굴로 웃는 어머니와 그럴 때 마다 두려움에 질려 울음을 토해내는 아이들.
──그릇된 대우를 받으면서도,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허리를 굽신 거리며 푼돈이라도 벌어가는 아버지.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출세할 길이 없어 비참한 삶을 연명하는 백성들.
──이들 모두가, 좋은 평화를 이루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들이 저항하는 것은, 과연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가?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죽여, 아버지가 없는 자식들로 만드는 어머니에게 비난을 할 수 있는 자는 앞으로 나오라.
──그릇된 대우를 하는 고용인에게 항거해, 직장을 잃게 된 아버지에게 비난을 할 수 있는 자는 앞으로 나오라.
──썩고 고여버린 기득권들을 고발하는 백성들에게 비난을 할 수 있는 자는 앞으로 나오라.
잠시 침묵을 유지하는 페르젠이 전선을 훑으나, 감히 걸어나오는 자는 없었다.
──부정한 평화는 어디에나 있고, 대다수는 그것을 바꾸기 위한 올바른 저항을 하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 그 저항이 국가와 국가간의 관계로 발전했을 때, 비로소 전쟁이라고 일컫는다.
──그대들 엘마르크 제국은 오베른 왕국을 앞세워 에르네스 제국의 아카데미를 습격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황족을 시해하는 죄까지 저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오른발을 내민 채 이 자리에 당도해있지.
──이번에는 이쪽에서 그대들에게 질문을 하도록 하겠다.
그레모리 여제와 똑같이, 한걸음을 내딛어 앞으로 나오는 페르젠이 불어오는 엘리알타 협곡의 거친 바람을 맞이하며 말을 잇는다.
──우리는 그 죗값을 묻게 하기 위한, 부정한 평화를 바꿀 올바른 전쟁을 위해 창과 칼을 쥐어들고 이곳에 있다.
──국가의 부름에 응하여 전장에 선 엘마르크 제국의 백성들이여, 그대들은 무엇을 위해 창과 칼을 쥐어 들고 있는가?
──사람을 죽여야만 하고,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전장에 서있는 그대들의 창과 칼에는 흔들림 없는 이유가 담겨 있는가?
* * * * *
흐음.
기나긴 페르젠의 연설을 듣고, 고개를 뒤로 돌린 그레모리 여제는 올라오는 짜증에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이래서 이딴 자질구레한 겉치레는 필요 없다고 했건만.”
귀찮게도 달라 붙어, 필요한 일이라고 했던 프리기아 후작의 능글맞은 얼굴을 떠올리며 그녀는 허리춤의 검을 빼들었다.
‘타고난 네 놈의 세치혀도 어쩔 수 없을 때가 있구나.’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레모레 여제는 입을 열었다.
“여봐라. 저 간사한 입놀림에 반론할 수 있는 자가 있느냐.”
“……”
그러나 그레모리 여제의 말에, 당당히 앞으로 걸어나오는 가신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훑듯 지나가는 그녀의 눈동자를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죄다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뭐, 되었다. 어차피 전쟁이 입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눈앞에 드리운 적군보다 본녀를 더욱 두려워하는 것은 좋은 게 아니더냐.”
작게 웃는 그레모리 여제가 저벅저벅 걸음을 내딛어 엘리알타 협곡의 거대하고 가파른 절벽 쪽으로 다가간다.
“요동치는 아군의 웅성거림은……”
꾸욱!
“창과 칼의 노래로 뒤덮으면 되는 것이지.”
주먹을 움켜쥐는 피부 너머로 새어나오는 강대한 마력이 갑옷처럼 그녀의 팔을 두르고.
쾅──!
쩌적!
그것을 휘둘러 절벽을 후려치자, 움푹 파여 들어간 그녀의 손 부근부터 퍼져 나가는 균열이……
쿠웅!
크고 두터운 절벽을 허물어, 에르네스 제국의 머리 위로 마치 산사태와도 같은 흙과 돌의 세례를 범람시킨다.
그래, 전쟁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부정한 평화보다는, 올바른 저항을 선택하였으나.
그 무엇도 얻지 못한 채, 불행으로 얼룩진 여인 또한.
아무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이 전장에서, 달려 나오는 적군들을 마주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