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5일.
엘리알타 협곡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곳에서, 에르네스 제국은 본격적으로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
조금 있으면 비가 오려는 걸까.
저무는 석양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게 내려 깔린 먹구름은 불쾌한 습기를 유발한다.
뚝.
투둑.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는 빗줄기가 바닥을 두드리더니……
쏴아아!
엄청나게 거센 비가 쏟아져 내렸다.
──잠시 작업을 멈추고 몸을 추스르도록!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진지 구축을 이어 나가기에는 지장이 생길 만큼 굵은 빗줄기였던터라, 제 2황자 레이몬드는 그렇게 명령을 내리며 각 구역별로 지어진 움막 안에 병사들을 피신 시켰다.
페르젠 또한 자신의 부대원들을 이끌고 지어진 움막 안으로 들어가, 황폐한 황무지가 물드는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단 기간에 그칠 것 같지는 않군요.”
“그래 보이는 군.”
“너머의 상류쪽에는 크게 흐르는 강이 있는데, 그것이 불어나 엘마르크 제국의 본대를 덮쳤으면 좋겠습니다.”
“그쪽 마법사들이 단체로 놀고 먹고 있지는 않을 테니, 아마 그럴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그렇겠지요.”
도란도란, 부대원들과 대화를 나누던 페르젠은 점차 말수를 줄이며 조용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는 먼발치에 떨어져 있는 리지를 향해 가까이 다가간다.
“리지.”
“……”
“잠시 장소를 옮기도록 하자꾸나.”
자신의 말에 대답을 할리가 만무했기에, 페르젠은 아공간에서 우산을 꺼내들며 그녀의 뒤에 서있는 시신을 탈취해 휠체어를 이끌었다.
투두둑!
밖으로 나오니 우산에 맞닿는 빗소리가 굉장히 요란스럽다.
시야를 가리는 빗줄기 또한 무척이나 거칠었기에, 페르젠과 리지의 제복은 짧은 거리를 이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축축히 젖어 들었다.
끼릭.
이내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자그마한 움막 안으로 들어서자 페르젠은 우산을 접으며 말했다.
“네 막사다.”
“……제 막사요? 정확히는 당신의 유희 공간이 아닐까요.”
페르젠의 말에 비웃음을 머금는 리지가 옷깃을 끌어 올려 가리고 있던, 선명한 그의 손자국을 드러낸다.
그도 그럴 게, 그런 의도가 아니고서야 자신의 공간을 따로 분리 시켜주는 것은 이상해보였으니까.
“당신은…… 이제 여기서 어떤 식으로 나를 학대 할 건가요.”
“……”
“제복으로 가려지는 이 몸뚱이에 화상을 입히려 들까.”
그게 아니라면.
“또, 내 목을 조를 거예요?”
웃지 않는 눈으로 그를 보며,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짓는 리지가 페르젠의 커다란 손을 붙잡아 자신의 목으로 가져다댄다.
힘을 주어 꺾으면 그대로 부러질것만 같은 가녀린 목.
“왜 가만히 있어요?”
“……”
“조금만 힘을 주면, 그때처럼 나는 처절하게 바둥거리며 볼썽사나운 표정을 지은 채 눈물을 흘릴 텐데.”
“……”
“밖에는 비도 많이 와요. 비참하게 흘러 나오는 제 신음소리 조차도 온전히 가려지겠죠.”
“……”
“양을 사냥할 시간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 아닌가요.”
겁도 없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내밀며, 늑대에게 본인을 먹도록 강요하는 어린 양.
피식자가 포식자로부터 주도권을 쥐고 있는, 너무나도 모순된 상황이었으나……
페르젠은 그것에 개의치 않고, 리지의 목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그녀의 옷깃을 바르게 정돈해주었다.
“리지.”
“……”
“날씨가 많이 춥다.”
“웃기지도 않아.”
“넌 자주 목이 아팠으니, 이럴 때 일수록 관리를 잘해야 한 단다.”
“……”
평소와 지나치게 다른, 훨씬 더 어울리지 않는 가면을 쓰고 있는 듯한 그의 말투.
거기서 리지는 오묘한 기시감을 받아 미간을 슬며시 찌푸렸다.
“다른 사람과 너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여전히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냐는 질문을 받고 싶지.”
“……”
“건강하냐는 질문을 받고 싶지는 않구나.”
그리고 페르젠이 말을 끝마쳤을 때, 그 기시감은 확연한 익숙함으로 바뀌었고.
“──!”
그것을 자각한 리지는, 전신에 돋는 소름을 느끼며 자신의 옷깃을 정돈해주고 있는 그의 손을 거칠게 처냈다.
아니, 휘두르는 손이 닿기도 전에 페르젠이 손을 뒤로 물린 탓에 작고 여린 손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지 마.”
“언제 숙녀가 되련지, 여전히 조신함이 없는 소녀 같구나.”
“내 오빠를 흉내 내지 마──!”
더이상 쌓을 수도 없는, 오로직 간직해야만 하는 추억을 처참하게 더럽히는 페르젠의 행동에 리지는 절규하듯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페르젠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오히려 비바람에 나부끼는 천막의 끈을 단단히 엮어 잠군 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어둠이 내려 깔린 움막 안에서, 세자르와 로에르의 시신을 피드백 하는 과정에서 읽어낸 기억들을 토대로 이제는 이 세상에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그녀의 가족들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을 단순한 흉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어폐가 있을 만큼, 지나치게 높은 완성도.
단순히 시각이 차단되었을 뿐인데, 리지의 청각과 촉각이 받아 들이는 그의 손길과 목소리는 너무나도 그리운 로에르와 세자르였다.
“그만…… 그, 그만……”
채 10분도 흐르지 않았을 터인데.
이미 조각난 그녀의 마음은 더욱 처참하게 깨지고 부수어져, 한줌의 먼지가 되어 흩날린다.
분명 머리로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는데.
벼랑 끝에 내몰린 몸뚱이는, 비참하게도 그것을 진실로 받아 들이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오빠들을 죽여버린 건 다름아닌 페르젠인데.
그러한 페르젠에게 도리어 자신의 오빠들을 투영하게 되는 건, 너무나도 잔인하지 않은가.
“자, 잘못했어요……”
가문도, 가족도 모두 잃었다.
더 이상 잃고 싶어도, 무엇 하나 가진 것이 없는 자신이기에.
이제는 페르젠이 자신을 괴롭게 만들 수단 따위 남아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분명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순전히 자신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가식적인 위선을 부리는 그의 행동은, 토악질이 나올 만큼의 역겨움을 선사하기는 했지만.
이토록 절망적인 절규를 뱉어내게 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조금씩 자포자기한 체념으로부터 받아 들이는 두려움과 공포를 마주하며, 그의 위선적인 가면을 벗겨 보았으나.
그 너머로 드러나는 건 추악하고 음습한 사람의 내면이 아닌, 끔찍한 괴물의 모습이었다.
철퍼덕!
이윽고 휠체어에서 굴러 떨어지는 리지가 더듬더듬 땅을 짚으며, 비참하게 그에게로 기어가 두발을 꼬옥 끌어 안는다.
흐끅……!
끄흑!
거칠게 쏟아지는 빗소리에도 좀처럼 가려지지 않는, 애처로운 울음소리.
허리를 숙여 그런 그녀의 몸을 안아 줄법도 한데, 지금의 페르젠은 그녀가 그토록 벗기고 싶어 했던 위선적인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다, 다시는…… 아, 아, 아…… 안 그럴게요……”
반면, 리지는 다시금 그에게 그 위선적인 가면을 씌우고자 했다.
처음처럼, 죄책감을 일부나마 해소하기 위한 용도로 자신을 다루어주기를 바랐다.
스윽.
하지만 페르젠은 그것이 거슬린다는 듯, 그녀가 부둥켜 안고 있는 자신의 발을 슬그머니 빼서 뒤로 옮겼다.
“아…… 아아……”
그러자 찬바닥에 걷지도 못할 몸을 처량히 붙이고 있던 리지는, 다시금 그것을 쫓아 엉금엉금 기어갔다.
“싫어……”
잡힐듯, 잡혀주지 않을 듯.
차라리 그렇게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줄다리기라도 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발걸음 소리를 감춘 채, 움박 내부의 어딘가로 걸어가버리는 페르젠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버리자 리지는 자신의 몸을 달팽이처럼 웅크리고는 귀를 막았다.
또, 어디선가 들려올 자신의 오빠들을 흉내내는 그의 목소리를 도저히 듣고 싶지 않았기에.
“죄송…… 죄송해요…… 끄흑! 죄송해요……!”
추적추적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 가운데로, 도대체 무얼 위한 사과 인지도 모를 애달픈 소녀의 절규가 울려 퍼진다.
또각.
그 끝에, 가만히 구석에 서서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그녀의 형체를 바라보고 있던 페르젠은 걸음을 내딛었다.
스륵.
그리고는 허리를 숙여, 앵무새처럼 죄송하다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는 리지의 두 손을 붙잡아 가리고 있던 귀로부터 내린다.
“리지.”
“히끅……! 네…… 네……!”
반사적으로 바들바들 떨며 온 몸에 소름끼치는 긴장을 머금었던 리지였으나, 목소리의 억양과 톤이 전부의 평소의 페르젠의 것이자 그녀는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이것은 네가 바라던 게 아니었나.”
“아, 아니에요……! 그, 그렇지 않아요!”
혹여나 페르젠이 다시금 자신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 채, 오빠들과의 추억을 범해버릴까봐 리지는 그의 팔뚝을 거칠게 붙잡고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하지만, 너는 내가 싫어하는 짓만 골라 하는 나쁜 아이가 되지 않았더냐.”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다, 다시…… 차, 착한 아이가 될게요……!”
“그 말을 믿을 수는 있으련지……”
상냥하게 리지의 뺨을 쓰다듬는 페르젠이……
“나는, 잘 모르겠구나.”
그렇게 귓가에 읊조리자, 리지는 덜덜 떠는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꼬옥 움켜 쥐었다.
페르젠 입장에서, 착한 아이인 자신이란 무엇일까.
고분고분,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한 인형이 되는 것일까.
아니, 아마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리라.
그에게 있어서 착한 아이인 자신은, 페르젠이라는 사내의 존재에게 언제나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며 허덕이는 가녀린 어린 양일 터.
그래, 그가 위선적인 친절을 베푸는 그 행동 행동 하나에……
자신은 익숙해진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굴종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하는 것이다.
쏴아아아.
그렇게 잠시 뒤, 침묵이 맴도는 움막 가운데.
흙이 비에 젖어 들어가는 특유의 냄새 사이로, 옅은 지린내가 뒤섞인다.
“끄…… 흐…… 흐끅……! 흐, 흐하……”
페르젠의 품에 기댄채, 우는 건지 웃는 건지도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스스로 소변을 지린 리지는, 그의 옷자락을 더더욱 거세게 움켜 쥐었다.
“……”
그러자 그제야, 페르젠은 리지의 시신을 통제해 엮어 잠구었던 천막의 끈을 풀어 헤치고는 그녀의 등을 자상하게 토닥여주었다.
펄럭!
비바람에 나부끼는 천막 너머로, 옅게나마 들어오는 바깥의 빛이 내부를 비춘다.
거기서 페르젠의 얼굴을 올려다 본 리지는, 더할 나위 없이 상냥한 표정으로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페르젠을 보고서……
자아 없는 인형처럼 멍청하게 따라 웃고 말았다.
스륵.
이윽고 나부끼는 천막 너머의 시선이 닿지 않을 사각으로 이동하는 페르젠이, 손수 자신의 제복 바지와 팬티를 벗겨 내리고.
아공간에서 내려 놓는 관에서 일으키는 이사벨을 통해, 소변이 묻은 고간을 씻겨주자 리지는 그의 어깨를 붙잡은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외간 남자의 손이 허락도 없이 자신의 음부를 스치고 지나가나, 리지는 일말의 수치심도 느끼지 않는──마치 모든 감정이 거세된 사람처럼 굴었다.
아니, 그러면서도 그를 향한 두려움과 공포심은 선명히 남겨두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그가 다시 한 번 오빠들과의 추억을 짓밟아 버릴 테니.
“……”
그렇게 자신의 고간을 전부 씻긴 그가 손을 털어내자, 리지는 자신의 아공간에서 여분의 제복 바지를 꺼내 페르젠에게 건네주었다.
그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머금고 있어야 할 자신이, 직접 이것을 입는 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아……’
차갑다.
냉수로 씻겨진 고간은 마치 감각이 없는 듯 했고, 그 탓에 빨갛게 부어오른 음부는 애처롭게 움찔 거리며 도톰한 살집을 꼬옥 오므렸다.
끼릭.
이후, 자신을 안아드는 페르젠이 휠체어에 몸을 앉히고 손수 제복 바지를 입히려 들자 리지는 그가 편하게끔 허리를 조금 들어 올렸다.
하지만 자신의 제복 바지를 손에 든 채,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는 그.
“속옷을 주지 않았구나.”
“……”
쓸데없이, 이상하고, 사소한 부분에서.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디테일을 가지고 있는 페르젠의 말에, 리지는 자그마한 실소를 머금고 자신의 아공간에서 새하얀 팬티를 꺼내들었다.
“……”
과연, 그는 무슨 이런 볼품 없는 속옷을 입는 것이냐고 속으로 비웃음을 짓고 있을까.
아니면 어엿한 숙녀가 이리도 소녀 같은 속옷을 입는 다는 것에 풋내가 난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도저히 감정을 읽어낼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자, 어느새 바지와 속옷을 손수 입혀준 그가 몸을 일으킨다.
“예쁜 얼굴이 엉망이로구나.”
다정한 목소리와, 상냥한 손길로 눈물로 얼룩진 자신의 얼굴을 닦아주는 페르젠.
뒤로 자리를 옮겨 산발이 된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는 솜씨는, 또 어찌 그리나 능숙한지.
하지만 리지는 휠체어의 팔걸이를 꽈악 붙든 채, 가늘게 헐떡이며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런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가는,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그리고 그것이 만족스럽다는 듯,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내리는 그가 등을 돌려 움막 내부를 떠나 가자……
“흐, 하……”
리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 흐, 아하하……”
아니, 자신은 지금 웃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스스로 되뇌며, 리지는 울고 있었다.
* * * * *
“……이게 맞기는 한 거겠지.”
리지와 페르젠이 옮겨 간, 건너편의 자그마한 움막을 바라보며 아스텔이 중얼 거리자 그의 곁에 있던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밤마다 자신의 오빠들을 부르짖으며 악몽에 시달리는 신음을 끝없이 뱉어 내는데, 적어도 적군과 마주하기 전까지는 이게 맞는 거지.”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노릇도 아니고, 동시에 우리가 참아야 할 부분도 아니야.”
“아무 경험도 없는 저등급 흑마법사 보다는, 우리 컨디션의 유지가 더 중요하니까.”
“……그래, 그리 말해주니 백작 각하에게 잘 말한 것 같다.”
“너무 신경쓰지 마라. 아스텔.”
“알겠어.”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아스텔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뱉고는 부대원들과 함께 움막 내부를 정돈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