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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203화 (203/260)

출진하는 3만 2천명의 군대는, 첫 목표지점인 엘리알타 협곡으로 나아갔다.

그곳을 넘어서는 순간, 세 왕국과 엘마르크 제국으로 향할 수 있는 가장 최단 거리를 점지할 수 있기에.

아마 여제──그레모리가 이끄는 본대 또한 그곳에 상주하여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진군 속도는, 나쁘지 않다.’

나아가는 과정에서 수도로 합류하지 못했던 병력들이 붙게 된다면, 지금 보다는 속도는 느려지게 되겠으나……

그래도 12월의 끝자락에 도착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 상태였다.

‘크리스마스인가.’

이 세계에는 없지만, 이서진의 기억에는 선명히 남아 있는 성탄절이라는 것을 떠올리며 페르젠은 피식 웃었다.

‘만약……’

이 세계에도, 산타라는 것이 있다면.

전쟁의 승리라는 것을 선물로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텐데.

하지만 우는 아이와 나쁜 아이에게는 산타가 선물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저 떠올리며, 페르젠은 말의 고삐를 단단히 붙들었다.

어차피 어릴적부터 자신은, 가지고 싶은 것을 선물 받아 본적이 없었다.

절박하고.

간절하게 염원했던 것은 언제나 스스로의 손으로 쟁취하고, 또 강탈해왔다.

그리고 성공과 승리라는 것을 타인이 선사하는 게 가능했다면, 어찌 그것을 성공과 승리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단순한 ‘이득’에 지나지 않을 터.

그렇기에 언제나 그랬듯.

24년.

8760일.

210,240시간.

줄곧 걸어왔던 삶의 길이자, 그 방식대로.

자신은 악당의 죽음을 바라는 이 세계로부터, 승리를 강탈해낼 것이다.

* * * * *

출진 이후, 2주가 경과한 12월 22일.

저 너머의 지평선으로 엘리알타 협곡의 풍경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제는 빠르면 5일, 늦어도 일주일이면 엘마르크 제국의 본대와 마주치게 되겠지.

저 곳으로 들어갈 병력의 수는 3만 5천.

나머지 4만 가량의 병력은 이미 5일 전부터 나뉘어져 각자의 방향으로 진군을 하는 중이었다.

콜레오네 웨인 바레타 알프레드가 이끄는 병력은 로벨리움 왕국의 본대와 합류해 오베른 왕국으로 향할 것이고.

제 1 황자와 엘리자베스 황녀가 속한 쪽은 시엘렌 왕국으로 향하리라.

얼핏 보면 본대의 체급을 너무 줄인 것이 아닌가 싶겠지만, 협곡의 지형상 10만이 있든 100만이 있든 전선에 기용될 수 있는 수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단순하게 창과 칼을 들고 치루는 전쟁이 아닌 만큼.

폰(Pawn)에 불과한 병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터무늬없을 만큼 작았기에, 이것은 체급을 줄였다기 보다는 가장 효율적으로 압축을 했다고 보는 게 맞으리라.

실제로 오러 나이트와 원소 마법사, 흑마법사의 경우 본대 쪽에 배정된 비율이 가장 높았으니까.

“정지!”

선두에서 호위를 받으며 나아가던 제 2 황자, 레이몬드가 고삐를 붙잡아 말을 멈춰 세운다.

코앞으로 다가온 겨울을 따라, 낮의 길이도 확연히 짧아 졌기에.

머잖아 밤이 찾아오는 만큼, 오늘은 여기까지만 진군을 하려는 것이겠지.

정지!

정지……!

뒤로 황자의 명을 전달 하듯, 똑같은 단어가 메아리처럼 반복되며 울려 퍼진다.

그 끝에 장엄하고 기나긴 병사들의 행렬이 멈추어 서고, 대지에 간섭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원소 마법사들은 능숙하게 임시 막사를 지어 나갔다.

황무지나 다름 없는 땅이 치솟아 올라 벽과 지붕을 형성하는 광경은 일반 병사들 입장에서는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묘기이겠지.

“백작님. 막사가 완성 되었습니다.”

“그래. 가지.”

이들을 보고 마음 편히 쉬라고 한들, 자신이 그러지 않는다면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분위기일 터.

때문에 페르젠은 자신의 부대원들을 이끌고 지어진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사실, 외관을 보자면 막사라고 하기 보다는 움막이라고 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대기에 간섭하여 흙먼지를 깔끔히 날려 보냈나.’

천장에서 흙더미가 떨어지는 광경은 연출 되지 않아, 페르젠은 제법 커다란 내부에 천막이 처져 자신의 공간을 분리시킨 것을 보고는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제야 편히 몸을 앉혀 쉬는 것인지, 묵힌 숨을 내쉬는 부대원들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에 페르젠은 천막으로 어설프게 가려진, 뚫려 있는 뒤편으로 나아가 연초 한대를 꺼내들었다.

……아직, 본격적인 전쟁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여기까지 진군하는 과정에서 쌓인 피로가 생각보다 적지 않아, 페르젠은 뻐근한 몸을 천천히 풀어 주었다.

그 끝에 다 피운 연초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짓이겨 끄니, 커다란 나팔 소리가 배급 시간임을 알려 왔다.

* * * * *

자신이 속한 조의 십부장, 아스텔의 호명을 따라 리지는 시신을 통제해 휠체어를 이끌었다.

무척이나 척박한 땅인 만큼 제대로 다듬어지지가 않아 끼릭 거리며 나아가는 휠체어는 수시로 흔들렸고, 그럴 때 마다 앉아 있는 리지의 몸또한 거세게 들썩 거렸다.

그녀의 허리춤을 붙들고 있는 휠체어의 가죽 벨트가 아니었다면 필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을 터.

그리고 그 불편함을 감내한 끝에 도착한 배급소에서 리지는 자신을 쳐다보는 수많은 시선들을 느낄 수 있었다.

눈에 띄는 적발과, 전장으로 향하는 군대에 휠체어를 타고 있는 여인이란 이목을 집중 시킬 수 밖에 없는 요소.

다만, 보내오는 그 시선에 담겨 있는 감정은 ‘신기함’ 이나 ‘우스움’ 따위가 아니었다.

아직 엘마르크 제국의 본대를 마주하지도 않았는데, 그녀의 몸을 거침없이 훑으며 지나가는 건 적나라한 적의.

그녀가 사전에 반란 사실을 알리려 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있어서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결과론적으로, 자신들은 반역자──로에르로 인하여 지금 이 순간 전쟁을 코앞에 두고 있었기에.

그러니 그 반역의 핏줄에게 어찌 분노와 증오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끼릭.

일반 병사들의 배급줄과 다른, 오러 나이트와 마법사들에게 배식 되는 줄이 점차 줄어든다.

그에 리지는 자신의 휠체어를 움직여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고, 자신의 차례가 다가왔을 때 배식판을 쥐어들고 힘겹게 앞으로 내밀었다.

하지만 앉아 있는 터라, 그대로 올려다봐야만 하는──배식을 담당하는 병사들의 눈빛을 고스란히 마주한 리지는 자신도 모르게 가냘픈 어깨를 움츠렸다.

인간의 원색적인 증오가 담겨 있는 눈동자.

어째서 자신이 이들의 저러한 감정을 받아내야 하는 쓰레기통이 되어야만 하는 건지.

체념을 했어도, 그 체념이란 뚜껑을 열고 치솟아오르는 억울함에 리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나 스프를 뜨는 병사가 일부러 배식판에 올라온 그녀의 손가락에 실수인 척 스프 일부를 부어버리자……

“끄, 끄흣……!”

리지는 볼썽사나운 신음을 흘리며 배식판을 그대로 바닥에 떨구고 말았다.

참고, 인내하고 싶어도.

화상을 입은 엄지가 선사하는 통증에 리지는 그럴 수가 없어 울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향해 동정표를 던져주는 사람은, 이곳에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

그리고 뒤에 서있던 십부장, 아스텔은 속으로 수많은 욕지꺼리를 내뱉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방금 리지에게 실수를 가장하여 자신의 분노를 풀어낸 병사를 향해 짜증이 치미는 것이다.

단순히 리지를 불쌍히 여겨 그녀를 대신해 화를 내는 것이 아니었다.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점에 대한 분노.

그리고 고작 일반 병사에게 모욕을 당하는, 자신이 속한 부대에 대한 치욕감.

아무리 아폴리온 등급의 흑마법사이자, 제국의 기둥인 브뤼테인의 혈통──페르젠을 대장으로 모시고 있으면 무얼 한단 말인가.

오물 덩어리가 제 앞가림도 못하여 똥칠을 하고 있는데.

“이……!”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억지로 다스린 후, 방금 배식을 하였던 병사를 부르려던 찰나……

터억.

아스텔은 자신의 어깨를 짚는 커다란 손에 몸을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루, 루에르그…… 배, 백작 각하……”

그러자 그곳에 서서 자신을 반기는 건, 미리 배급을 받고 걸음을 옮겼던 페르젠.

그에 아스텔은 앞으로 나아가는 페르젠을 뒤로한 채, 울쌍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미친 새끼……’

저 병사는 자신의 분노와 증오심을 풀어낸 만족감과, 3만 5천명의 병사들을 대표해 반역의 핏줄에게 화를 입혔다는 영웅감이라도 느끼고 있을까?

하지만 전반적인 병사들의 통솔권을 쥐고 있는 것은 제 2 황자, 레이몬드이기에.

작금의 이 상황은 사실상 표면적으로 황실과 브뤼테인의 갈등을 조장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네는, 이름이 무엇이지.”

“그, 그…… 저……”

“딱히, 그대를 나무랄 생각은 없다.”

떨고 있는 리지를 힐끔 내려다보며, 바닥에 처량히 뒹굴고 있는 배식판을 쥐어든 페르젠은 그것을 한쪽으로 치워 놓았다.

“레, 레이먼…… 입니다.”

“레이먼.”

“예…… 예!”

“자식이 있나.”

“아, 아들이 한 명 있습니다.”

“그러면 그 아들이 사형에 처해도 마땅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대는 그것을 밀고할 수 있겠나.”

“……”

“지금 그대의 침묵은, 부정으로 봐도 좋겠지.”

무척이나 조곤조곤한 어투로 말을 하고 있으나, 레이먼을 비롯한 그 옆의 병사들은 오히려 그렇기에 엄청난 압박감을 받았다.

“가족이라면 마땅히 안쪽으로 팔이 굽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

“그리고 이 여인은, 그 당연함을 깨트리고 가족들의 반란 사실을 알리려 했다. 그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그대가 모욕해도 된다고 생각 하는가.”

“죄, 죄송합니다……”

“비단 그대가 사과를 해야하는 건, 이 여인 뿐만이 아니다.”

눈앞의 병사, 레이먼을 응시하던 페르젠이 등을 돌린다.

그리고는 배식을 받고 있는 수많은 병사들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제군들.”

“……”

“이것은 그대들을 위하는 말이다.”

그 얄팍한 분노와 증오심은, 그대들을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전장에서 길을 헤메게 만들 것이고, 그 끝에 적의 창과 칼에 목숨을 잃도록 유혹하는 악마의 속삭임이 되겠지.

“부디, 죽음에 너무 관대해지지 말도록 하거라.”

그렇게 페르젠이 말을 끝마치자, 아스텔은 숨막히는 듯한 자신의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후 걸음을 내딛었다.

“……보고하여, 저 병사에게 징계를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강하게는 못하여도, 금식은 가능하겠지요.”

“되었다.”

“……”

“전쟁을 앞둔 병사다. 배를 굶겨 어찌 하겠다는 말이냐.”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

“아스텔.”

“예.”

“방금 그 말은, 너희들에게도 똑같이 전하는 말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면, 부하들의 시신을 묻게 만드는 못난 상관으로 만들지 말아다오.”

“예……!”

우렁차게 대답을 하는 아스텔을 보고, 페르젠은 림벨에게 리지 몫의 식사를 다시금 받아 와달라고 명령을 내린 뒤 그녀의 휠체어를 이끌었다.

그리고 리지는 자신의 비극을 양분 삼아, 본인의 추악함을 덧칠해나가는 페르젠을 보며 처량한 웃음을 흘렸다.

설사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한들, 이 국가에 가망은 있을까.

3만 5천명의 병사들, 저들 모두가……

이토록 우매하고, 우둔한 자들인데.

멍멍 꿀꿀 거리며 치장된 추악함을 찬양하는 저들은 개 돼지에 불과했고.

그들에게 추앙 받는 족속들 또한, 인간의 탈을 쓴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에르네스 제국을 어찌 태양이 지지 않는 국가라 부를 수 있으리오.

이곳은 그저…… 한 점의 의심도 없는, 짐승들의 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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