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가 머무르고 있는 저택을 나온 페르젠은, 천천히 자신의 제단을 쓸어 내렸다.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거기서 전대 가주들 중 한 명의 시신을 사역하여 일으키고는, 눈앞에 가득한 쓰레기더미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린다.
화륵!
순식간에 피어오르는 연기가 근처의 풍경을 덮어버릴만큼 자욱하게 퍼져 나가나, 그것을 간단히 흩어낸 페르젠은 이내 깔끔하게 텅비어버린 정원의 광경을 훑은 뒤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유리엘과 라우라가 기다리고 있을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오니, 정문 앞에 정차 되어 있는 황실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보인다.
지금 이 시기에 황실에서 사람을 보내 자신에게 알려야 하는 정보가 있다면……
그것은 틀림 없이, 이번의 전쟁과 연관이 있으리라.
또각.
그리 정문을 넘어 저택 안으로 들어서니, 시녀들과 함께 모여 있는 유리엘과 라우라가 눈에 들어온다.
“아……! 왔어……?”
“황실에서 사람이 온 듯 한데.”
“으, 응…… 황녀님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바로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애써 덤덤하게 말을 하고 있어도, 유리엘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무렴 이 시기에 엘리자베스 황녀가 직접 행차할 정도라면, 결코 좋은 정보를 가지고 온게 아니라는 것쯤은 그녀도 알고 있을 테니 당연한 것이겠지.
“그래. 알겠다. 올라가서 쉬고 있도록 해라. 대화를 마치고, 들리도록 하마.”
“응……”
충분히 단정한 옷차림이나, 한번더 손을 보고서 페르젠은 응접실의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차를 마시고 있던 엘리자베스 황녀가 찻잔을 내려 놓고는 자신을 바라본다.
“본녀는 아직 아무런 말을 하지도 않았거늘…… 벌써부터 표정이 그리도 어두운가.”
“죄송합니다. 부담을 주려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되었니라. 실제로 가지고 온 소식은 그대가 반길만한 것이 아니니.”
맞은 편에 앉는 자신을 보며, 쓰게 웃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찻잔의 손잡이를 엄지로 천천히 쓸어내리더니 운을 튼다.
“새벽에…… 엘마르크 제국으로 보냈던 사절단들이 돌아왔느니라.”
“그렇습니까.”
“그들이 받아온 엘마르크 제국의 답변은, 오직 거울 하나 뿐이었다.”
“……”
거울.
생각보다 직관적인 그 물건이 가지는 의미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되비추는 대상이 에르네스 제국의 황제일테니, 품고 있는 속뜻은 “네 놈들이 원하는대로 하거라.” 일 터.
그래, 전쟁을 일으키고 싶다면 일으키고.
덮고 싶다면, 그대로 덮어 버리라는 전언(傳言).
“참으로 발칙하고, 고약한 대답이지 않느냐.”
한탄을 하는 듯한 어투로, 한숨을 내쉬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피로함이 가득 서린 눈가를 문지른다.
“백작.”
“예.”
“……나라의 존망이 걸린 일은 아니다.”
“……”
“회피한다고 해서, 적어도 제국이 주저 앉는 일은 없겠지.”
그저 황실의 위상이 곤두박질치고.
세간에서는 겁쟁이라고 놀림 받을 뿐이리라.
다만, 그렇게 해서 소중한 백성들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건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국가를 우선해야 하는 황실로서 올바른 선택이 아니던가.
“그 점에서 비추어 볼 때, 이것은 해야만 하는 전쟁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전쟁일 것이다.”
“황녀 전하.”
“그러나 본녀를 비롯해,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수많은 시간과 피를 흘리며 쌓아온, 황실의 역사가 무너지게 되었을 때.
틀림없이 그 틈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귀족들은 이를 드러내어 자신들의 배를 불릴 것이고.
엘마르크 제국은 더욱 오만방자하게 활개를 치리라.
전쟁을 회피해도 결국, 그 못지 않은 피해를 입게 되겠지.
아무런 의미가 없는 희생만큼, 부질없고 처량한 것은 없었다.
“허름해진 지붕으로 어찌 터를 지킬 수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이것은 하지 않아도 되는 전쟁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전쟁이 될 것이다.”
“……”
“백작.”
“예. 황녀 전하.”
“화살 하나 막아주지 못할 만큼 초라하던 지붕을, 그대들이 증축해주었다.”
“……”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내려앉으려 할 때면, 언제나 그대들이 기둥과 들보가 되어 떠받들어 주었다.”
“……”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보살핌을 잠시 벗어나 전장으로 나아 갈 것이다.”
잔잔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강직한 기백이 서려 오묘한 마성을 이루는 엘리자베스 황녀의 말에 페르젠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묵묵히 경청을 하였다.
“거기서 그대에게 보여주도록 하마.”
“……”
“그대들이 손수 증축하여, 보수하고, 지켜내온 지붕이……”
비가 오면 우산이 되어주고.
햇살이 강하게 내려쬐면 그늘이 되어주고.
화살이 날아오면 막아주는 성벽이 되는 모습을.
“이제는 우리도, 혼자 일어나 걷는 법을 배울 때도 되지 않았더냐.”
“……그렇군요.”
“보살핌 받는 아이가 아니라, 합당한 군신의 관계로서…… 전장에서는 그대의 동반자가 되어 설 것이다.”
힘이 들면 잠시 앉아 쉬어 가리오.
등 뒤가 텅 빈듯한 느낌이 든다면, 그것을 채워 주리오.
최전선 앞에 혼자 있는 듯한 외로움과 고독함을 느낀다면, 옆에서 그 손을 마주 잡아 주리오.
“절대 이 전쟁조차, 그대들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고 의지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
“이런 우리의 곁에서, 다가올 겨울을 넘어…… 함께 봄을 맞이해주겠느냐.”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자신에게로 다가와 오른손을 내민다.
그에 페르젠은 자연스레 무릎을 꿇은 뒤, 그 손을 부드럽게 마주잡고 손등에 입맞춤을 하였다.
“예. 겨울을 넘어 다가올 봄을 함께 맞이 하겠습니다.”
“그러느냐.”
오른손을 거두어 들이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작게 웃는다.
하지만 페르젠은 그 모습을 보며 화사한 아름다움에 도취되기 보다는, 남은 왼손에 입맞춤을 하고 싶다는 강박에 강하게 시달렸다.
꾸욱!
그러나 아무런 이유도, 명분도 없이.
갑작스레 그녀의 왼손을 붙잡아 입맞춤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페르젠은 주먹을 말아쥐며 그 강박 욕구를 힘겹게 찍어 눌렀다.
“……오늘 밤을, 가능한 행복하게 보내도록 하거라. 폐하께서는 바로 내일 선전포고를 하실 터이니.”
“예.”
“그러면 본녀는 이만 물러 나도록 하마.”
또각.
볼일을 전부 마쳤다는 듯, 걸음을 내딛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응접실의 문 쪽으로 다가선다.
이내 그녀의 가냘프고 새하얀 왼손이 문고리를 붙드는 순간, 페르젠은 저것을 낚아 챈 뒤 강제로 입맞춤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 한계까지 치달았다.
하지만 간신히 이를 악물며 그 욕망을 인내한다.
“백작.”
그러나 빠르게 저택을 나가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다르게, 문고리를 붙들고 있던 손을 떼어내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몸을 돌리자 페르젠은 쓰게 웃었다.
“예.”
“……본녀는 아직, 곁에 마음을 터 놓을 사내가 없다.”
“……”
“잠시 나마 기댈곳으로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을 선택하기에는,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가 않구나.”
그녀 답지 않게, 약간의 머뭇거림을 머금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페르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입을 연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본녀에게 심심찮은 위안을 건네줄 수 있겠느냐.”
“……”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그녀의 반응이었기에, 페르젠은 일순간 자신을 괴롭게하던 강박 욕구조차 잊어버렸다.
“……아니다. 되었니라. 실언을 하였으니 듣지 못한 것으로 하거라.”
그러나 손사레를 치며 다시금 등을 보이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문고리를 붙잡자, 페르젠은 그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움찔!
아니, 부드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황녀는 자신의 왼손을 모두 머금는 페르젠의 커다란 손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사내의 손이란 전부 이러한 것일까.
“……”
이윽고 자신의 몸을 돌려 세우는 그가 자연스레 왼손의 손등에 입맞춤을 해오자, 엘리자베스 황녀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쪽.
하며 울려 퍼지는 그 소리가, 방금전과 다르게 왜 이리도 민망하게 느껴지는 건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
“다가올 미래에도, 황녀 전하는 지금처럼…… 여전히 제국의 황녀로서 그 자리에 계실 것입니다.”
페르젠 입장에서는, 자신이 적국의 전리품이 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것이겠지만……
“그러하느냐……”
저 말은, 저 나름대로.
조금은 마음이 아프게 느껴져, 엘리자베스 황녀는 치미는 슬픔을 미소로 가리었다.
“백작.”
“예.”
“한 번, 본녀를 안아주겠느냐.”
“……”
“거절해도 괜찮으니라.”
“아닙니다.”
스륵.
왼손을 쥐고 있던 손을 풀어내고, 자신의 허리춤에 손을 올리는 그가 품안으로 다정하게 안아준다.
“……”
그러자 좀처럼 느낄 수 없었던 탄탄한 가슴팍과, 두 손을 올려 마주 끌어 안아보는 등의 널찍함에……
엘리자베스 황녀는 사내의 품이, 이리도 안도가 들 만큼 의지가 되는 것이었던가 하고 자그마한 감상을 품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조금더 오랜 시간 동안 이러고 있고 싶었다.
염치를 불문하고, 페르젠이 이만 떨어지라는 무언의 신호를 줄 때 까지 이러고 있고 싶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황녀는 애써 그 파렴치한 욕구를 흩어내며, 페르젠의 품으로부터 떨어졌다.
왜냐하면 이 사내의 품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또, 자신의 것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니.
“……이제는 정말로 가보겠니라.”
“예. 배웅하겠습니다.”
딸칵.
문을 여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응접실을 나서고, 그 뒤를 페르젠이 뒤따른다.
당연히 엘리자베스 황녀가 돌아간다는 소식을 시녀들에게 전해듣고, 라우라와 유리엘 또한 마중을 하기 위해 각자의 방에서 내려왔다.
“……”
그리고 너무나도 자연스레 페르젠의 곁에 서는 유리엘의 모습을 지켜보며, 엘리자베스 황녀는 자신도 모르게 너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나름 한점 부족할 것 없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페르젠 곁에 저리 서있는 유리엘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찌 이리도 부러움이 치미는지.
물론, 황실과 브뤼테인의 관계는 그 인연의 실이 결코 얕고 가늘지 않았다.
어느 의미로는 부모와 자식보다도 깊고 짙은 관계라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만약, 자신이 황녀가 아니었다면.
다른 형태의, 깊고 짙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터인데.
그래, 어쩌면 저 곁에 서있는 것이 유리엘이 아니라 자신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
“좋은 밤 되도록 하거라.”
하지만 하등 의미가 없는, 부질 없는 가정과 망상에 불과했기에.
엘리자베스 황녀는 그 미련을 털어내듯, 마차에 올라탄 뒤 마지막 인삿말을 건네었다.
다그닥!
그렇게 마차가 움직이며 페르젠의 저택을 떠나가고.
그 마차 안에서 엘리자베스 황녀는, 자신의 몸에 은은하게 묻어 있는 페르젠의 흔적을 조심스레 더듬어나갔다.
역시, 미련이라는 것은 그리도 간단히 털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리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