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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95화 (195/260)

식사 자리로 돌아왔으나, 리지는 더이상 꾸역꾸역 음식을 먹을 생각 조차 하지 못했다.

페르젠 또한 식어버린 음식들을 내려다보며 손을 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에, 얌전히 계산을 마친 뒤 식당을 나와 리지를 저택까지 데려다주었다.

“……”

볼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한점 변화없이──수많은 쓰레기들이 널브러진 정원의 풍경과 거기서 퍼져 나가는 악취는……

과연 이곳이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 맞기는 한 건지, 그러한 의문을 품게 만든다.

“이런 오물 덩어리의 풍경을 감상하는 취미가…… 당신에게 있었나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비꼬듯 자신의 걸음을 재촉하는 리지의 한 마디.

그에 페르젠은 특유의 붉은 눈으로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다, 정문을 넘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또각.

끼릭.

인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적막하고 음침한 내부의 분위기 사이로.

페르젠의 발걸음 소리와, 리지를 태운 휠체어의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진다.

이내 홀의 계단 앞에 다다르자, 페르젠은 뒤 따르던 시신에게 휠체어를 맡긴 뒤 그녀를 품안으로 부드럽게 안아들었다.

움찔!

하찮고, 미약한 저항감이 느껴지기는 했어도.

어차피 자신을 떨쳐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페르젠은 묵묵히 계단을 타고 올랐다.

턱.

“……”

아래층 못지 않게, 삭막한 분위기가 맴도는 복도.

천장을 장식하는 샹들리에의 야광석은 수명을 다한 것인지, 아무런 빛을 뿜어내지 않는다.

아마 밤이 찾아오면, 이곳은 앞을 제대로 내다보기도 힘들 만큼의 어둠이 서리겠지.

‘하지만…… 그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군.’

겉으로는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처럼 보이는 게, 전쟁의 발단이 된 반역의 핏줄을 향한 백성들의 분노가 직접적으로 닿지 않게 해주리라.

또각.

그렇게 짧은 상념을 접고, 그녀가 지내던 침실로 들어선 페르젠은 리지의 가냘픈 몸을 침상 위로 반듯하게 눕혀다 주었다.

그리고는 품안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다 놓는다.

투웅!

요란스레 울려 퍼지는 소리만을 들어 보아도, 그 안에 상당한 양의 무언가가 들어차 있다는 것은 간단히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당분간, 생활에 필요한 돈은 여기서 꺼내다 쓰면 될 것이다.”

“……”

생기 하나 없이, 죽어버린 보랏빛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는 리지.

그 마주침을 끝으로, 등을 돌린 페르젠은 미련없이 그녀의 침실을 벗어 났다.

아니, 문을 열고 벗어 나려던 참이었다.

쿵!

“……”

커다란 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리지가 초라한 행색으로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다.

“……드레스 룸에, 가고 싶어요.”

아직 멀뚱멀뚱 서있는, 본인 소유의 시신을 사역하여 움직이면 될 텐데.

굳이 그녀는 그러지 않고, 자신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단둘이 고립된 이 상황에 벌벌 떨면서도, 비참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고 싶은 것인지.

“도와주기 싫으면…… 그러지 않아도 상관 없어요.”

부스럭.

가녀린 손으로, 청소도 제대로 되지 않은 바닥 위를 기어 자신의 발 옆을 스쳐지나가는 리지.

저번에 둘러 보았던 저택의 구조대로라면, 드레스 룸은 해당 층에 존재하지 않을 텐데.

계단은 어떻게 타고 내려가려고, 이러한 짓을 하는 걸까.

……하등 재미가 없는, 정말 유치한 도발이다.

그러나 차마 무시할 수가 없는 도발이었기에, 허리를 숙인 페르젠은 바닥에서 안간 힘을 쓰며 기어가던 리지를 자신의 품으로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걸음을 내딛어, 아랫층의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 화장대 앞의 의자 위로 그녀를 내려 앉힌다.

“내가…… 어떤 옷을 입으면 좋을 것 같아요?”

당신의 장난감이고.

당신의 인형에 불과하고.

당신이 마련해둔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는데.

그 치장 또한, 당연히 나보다는 당신의 선호도가 반영 되어야 하는 게 옳겠지.

그래, 본인의 주관을 거세 당한 사람처럼.

리지는 억지 웃음을 머금으며 손가락을 뻗었다.

“저걸로 입도록 할까요?”

치맛단이 무척이나 짧은 드레스.

옆트임이 되어 있기에, 가슴이 작은 그녀라면 움직일 때 마다 아담한 가슴이 비추어지리라.

“……이걸로 입지.”

그렇기에 페르젠은 불편할 게 없는, 무난한 평상복을 골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알겠어요. 당신이 그것을 원한다면……”

두 손을 움직이는 리지가 스스럼없이 입고 있는 그의 셔츠를 벗어 도로 반납한다.

“……”

아주 잠깐,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만 그의 옷을 입고 있었을 뿐인데.

자신의 몸에 스며든 그의 체취가 어떻게 이리도 역할 수가 있는 건지.

다시금 속이 메스꺼워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리지는 꾸욱 참아 내고는 입고 있는 제복 바지 또한 마저 벗어 내렸다.

힐끔.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으나, 무심하게 창밖을 구경하고 있는 모습만이 보일 뿐이다.

이렇게나 무방비하게 어린 양이 앉아 있는데.

지치고 병이든 것은 사냥할 가치도 없다는 걸까.

“지금.”

“……”

“지금 이 저택에는…… 아무도 없어요.”

“……”

“커튼으로 창가마저 가리게 된다면, 떠오른 태양조차도 감히 이곳을 들여다 보지 못하겠죠.”

“……”

“당신이 내 남은 다리마저 분지르고,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을 퍼부어도…… 제 비명을 듣고 달려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툭.

말을 마친 리지가 들고 있던, 벗은 제복 바지를 옆으로 내려 놓고는 페르젠을 조용히 지켜본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요지부동인 그의 모습에 리지는 처연한 실소를 흘렸다.

더듬지 않고 말을 내뱉기는 했으나, 세차게 떨고 있는 자신의 몸을 보며 응할 필요가 없는 허세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인지.

“……다, 입었어요.”

결국, 주섬주섬 옷을 갈아 입고 힘없는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그제야 페르젠은 창가에 기대어 있던 몸을 움직여 자신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스륵.

그리고는 아무런 말없이 커다란 손을 뻗더니, 엉성하게 올라가 있는 자신의 옷단을 깔끔하게 정돈해준다.

그 손길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있는, 자신을 향한 위선적인 상냥함과 다정함이 얼마나 지독한지.

산 채로 온 몸을 불태우는 것만 같은 고통을 느끼며, 리지는 입을 열었다.

“……새로운, 장난감을 구했나 봐요.”

그러지 않고서야, 당신이 그 추악한 욕망을 이리도 오랜 시간 인내할 수가 있을까.

그 대상이 과연 이름도 모를, 북부의 변방에 살던 여인일지.

문화와 예술의 성지의 영애, 라우라일지.

아니면 한 때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언니, 유리엘일지.

참으로 궁금하다며, 리지는 페르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물음에 그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는 페르젠은 조용히 자신을 품 안으로 안아 들었다.

어차피 제대로 된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리지는 그의 목덜미에 얌전히 두 손을 감고 드레스 룸을 벗어 났다.

삐걱.

그렇게 다시금 돌아온 침실.

자신을 침대 위로 다정하게 눕혀주는 페르젠이 이불을 덮어준 뒤 떠나가자……

그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리지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같이…… 있어주세요.”

멈칫.

“밤이 되면 담벼락을 넘나드는 쓰레기더미들과, 저주에 가까운 욕설들이 저를 깨워요.”

“……”

“저택으로 숨어든 도둑들이 물건을 훔쳐 가는 것 같기도 해요.”

“……”

“어쩌면 그 도둑들이, 재물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반역자의 핏줄인 제게 화풀이를 하기 위해 강간을 할지도 몰라요.”

말은 이리 하면서도.

사실, 페르젠이 이곳에 남아 자신과 함께 밤을 지새우는 것이 가장 무섭고 두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잠시 걸음을 멈추었던 페르젠은 그대로 침실을 빠져 나갔다.

그에 흐리멍텅한 눈동자로 그 자취를 뒤쫓던 리지는, 고개를 돌려 회색빛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그가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거짓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발버둥을 치는 자신을 자근자근 짓밟으며, 추악한 내면의 욕망을 탐하려드는 잔혹한 사탕발림.

그리고 진실이 정말로 그러하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야 말로, 훨씬 나은 것이 아닐까.

“……”

작고, 여린 손으로 스스로의 목을 움켜쥐는 리지가 그대로 힘을 준다.

기도가 짓눌리는 탓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가지만,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은 마치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목숨이 자신의 오빠들의 희생으로 연명된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그녀는 힘없이 두 손을 풀고, 콜록이는 기침을 뱉은 뒤 이불보를 말아 쥐었다.

‘차라리……’

그날, 그 때, 그 순간.

자신의 오빠들과 함께 명을 달리 했다면 좋았을 텐데.

펼쳐진 가시 밭길을 걸어 나가는 것은 고통스러웠고.

이 모습을 지켜보는 그가 괴로워할지, 아니면 좋아할지도 모르는 모호함 속에서.

리지는 약기운이 선사하는 졸음을 자장가 삼아 이른 시간에 잠을 청했다.

꿈속에서라도, 자신의 오빠들과 재회할 수 있으면 하는 자그마한 바람을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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