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신의 침실에서 기나긴 숙면을 취했던 페르젠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여전히 가시지 않은 피로와 오랜만에 느껴보는 근육통이 상당히 낯설다.
‘오후 4시인가……’
아침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잠을 잔 건지, 피곤한 눈가를 꾸욱꾸욱 지압하며 침대에서 내려온 페르젠은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불어오는 쌀쌀한 바람에 수마의 기운이 날아가며 몽롱했던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하루 내내 자신의 침실에 갇혀 있던 유리엘은 몸을 추스리고 나왔을까.
라우라와 밤내내 몸을 섞으며 나약하고 추악했던 자신의 감정을 일부나마 해소한 페르젠은, 그제야 생긴 여유에 부스스한 자신의 머리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 복도로 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노크를 하고 문고리를 잡아 돌린 그 너머에 유리엘은 보이지 않는다.
혹여나 저택의 정원 쪽에 있는 걸까 싶어 발코니로 나아가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여전히 그녀가 보이지 않자, 페르젠은 자신의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뒤 조용히 저택을 돌아다녔다.
또각.
“……”
그러자 3층, 피아노가 놓여 있는 거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조촐한 다과를 즐기고 있는 유리엘이 보인다.
쏟아지는 화사한 햇살에 검은 머리카락이 은하수처럼 반짝이며 빛나는 아름다운 자태.
고작 차를 마실 뿐인데도 흠잡을 곳 없는 기품은 새삼스레 그녀가 어떠한 여인인지 깨닫게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한폭의 그림처럼 지나치리만큼 평온해 보이는 저 모습은, 오히려 억지로 연출된 듯한 위화감을 페르젠에게 선사한다.
그래, 저 광경은 자연스럽다기보다는 그런 식으로 보이게끔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리엘.”
그에 페르젠은 그녀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일어, 났어요……?”
그러자 움찔, 어깨를 떨며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는 유리엘이 화사하게 웃어 온다.
“……”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곁으로 다가선 페르젠은 고운 턱선을 따라 흘러내린 흑발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왜, 그래요……?”
약간의 어색함이 묻어 나오는, 떨떠름한 되물음을 내뱉으며 자신을 올려다 보는 유리엘.
그리고 그런 그녀의 고운 뺨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 안은 페르젠은 침묵을 깨트리며 대답했다.
“네가 나약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해서…… 그것이 내게 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가, 갑자기 무슨 소리를……”
“네 나약함을 직시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한심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
가난하고, 여유가 없는 가정이 으레 그러하다.
품고 있는 걱정과 고민들은 어차피 해결 되지 못할 것들이니, 괜히 가족들의 어깨를 무겁게 하지 않기 위해 풀어 놓지 않는다.
동시에 그것을 자신 뿐만이 아니라 다른 가족들도 그러해주기를 바란다.
어차피 품고 있는 걱정과 고민들을 자신에게 털어 놓는다 해도 해결 해줄 수가 없었으니까.
혹여나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털어 놓으려 한다면, 자신은 이리도 꾹 눌러 참고 있는데 어째서 그러는 것이냐고 속으로 원망을 품는다.
탐스러운 외관과 반대되게, 그 속이 썩어 문드러진 과일들처럼……
일부러 어둠을 등지고, 억지로 밝은 면만 내비추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가정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식으로 서로가 곪아가는 상황을 바랐다면, 그 날 진솔한 속내를 털어 놓지도 않았으리라.
때가 되면, 감추고 있는 비밀을 고백하겠다고 결의 또한 하지 않았겠지.
“전쟁을 두려워하는 네 모습을 보고, 그것을 해결할 수 없는 자신의 한심함과 무력함에 속앓이를 하는 내가 어쨌다는 말이냐.”
“……”
“그 때문에 너를 이해심 얕은 여자라고 원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다면 그 날 네게 속내를 털어 놓았던 나는 비겁한 놈이 되는 것이겠지.”
“……”
“유리엘.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면만 보여주기에는……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화장도, 화려한 옷을 걸치지도 않은 수수한 너의 모습을 알고 있으며.
기품이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욕망을 부채질 하는 음란한 모습도 알고 있다.
그리고 너는 아내가 죽을까봐 두려움에 벌벌떠는 겁쟁이 같은 나의 모습을 알고 있으며.
가학적인 성관계를 통해 쾌락을 탐하는 변태 같은 모습도 알고 있지 않나.
“그러니 이제와서…… 전쟁이 무섭다고 벌벌 떠는 너를 직시하는 것쯤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것이다.”
누군가는 평범한 남자를 왕자님처럼, 평범한 여자를 공주님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고 일컫는다.
아마 크게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 그 대상의 차이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이야 말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페르젠은 그 차이를 만드는 간극이, 상대방이 보여주지 않았던 나약하고 추악한 모습을 알게되는 점이라고 생각했다.
왕자님처럼 보이던 사내가 사실은 평범한 남자이고.
공주님처럼 보이던 여인이 사실은 평범한 여자라는……
그 점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야 말로, 사랑의 본질이라 할 수 있을 터.
“무서우면 무섭다고 내게 말해도 괜찮다. 아내가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남편이 아니면…… 그 누구에게 보여준단 말이냐.”
오히려 남편이기에 그러한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이기적인 헌신은 바라지 않는다고.
……그렇게, 페르젠이 말하자 유리엘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끄…… 흑……!”
추하게 일그러지는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 고개를 돌리려고 하나, 뺨을 붙잡고 있는 그의 커다란 손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에 유리엘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는 자신의 모습을 페르젠에게 선명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페르젠은 그 모습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가에 입술을 맞대었다.
그러자 애처로운 손길이 자신의 등을 꼬옥 끌어 안는다.
그것에 화답하듯 페르젠 또한 유리엘의 허리를 붙잡고는 자신의 품으로 다정히 끌어 안았다.
분명, 가치를 매길 수가 없는 형태가 없는 것들이 전해질 뿐 인데……
그것을 주고 받을 때 마다, 상대방의 소중함을 조금씩 깨닫게 된다.
‘그러니……’
유리엘.
유페미아.
시작은 페르젠이라는 사내의 삶으로 살아 왔어도.
그 끝은 반드시, 너희들의 남편이라는 삶으로 마감하도록 하마.
* * * * *
“……”
거실로 쏟아지는 햇살이 등지는 복도의 길목, 그곳에 원치 않게 숨어 있던 라우라는 페르젠과 유리엘이 주고 받는 대화를 엿들으며 품안의 토끼 인형을 꾸깃 짓눌렀다.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을 봐버려서 그런지 마음 속 한 구석이 쿡쿡 쑤시는 듯 하다.
이윽고 잠시 뒤, 이야기를 주고 받던 두 사람이 피아노 앞으로 걸어가 다정히 앉은 채 연주를 시작하자 라우라는 자신의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흥……’
페르젠과 다르게, 그의 능숙한 기교를 따라가지 못하는 유리엘의 피아노 음색이 거슬린다.
틀림없이 저 옆에 유리엘이 아닌 자신이 앉아 있었다면, 훨씬 더 좋은 연주를 할 수 있었으리라.
그렇게 음험한 감정을 표출하는 새하얀 토끼 한 마리를 뒤로하고, 페르젠과 유리엘은 애정이 가득한 연주를 이어 나갔다.
* * * * *
12월 8일.
“……”
병실에서 퇴원할 준비를 하는 리지는 자신의 목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지독한 아픔을 선사하던 염증이 말끔히 가라앉았고, 홀쭉 해졌던 몸은 어느새 다시금 살집이 붙어 그녀에게 생기를 선사한다.
하지만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과, 반쯤 죽은 듯한 보랏빛 눈동자는 그 생기를 집어 삼키며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게 만들고 있었다.
끼릭.
이윽고 자신의 휠체어에 앉아, 시신을 사역하여 병실을 나선 리지는 병원비를 계산하기 위해 1층의 로비로 향했다.
“아……”
하지만 수납을 기다리기 위해 서있는 줄, 거기서 자신의 앞으로 끼어드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리지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끼릭……!
그러나 그들은 자신에게 시선조차 보내오지 않는다.
오히려 없는 사람이라는 듯, 발로 휠체어를 밀어 자신을 뒤로 보내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과 돌아다니고 있는 간호원들 조차 아무런 제지를 가하지 않는 풍경.
꾸욱!
문득 밀려오는 서러움이 울컥하고 그녀의 목을 틀어 막으나, 리지는 자신의 치맛단을 거세게 움켜 쥐고는 간신히 울음을 참아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끼어들 사람조차 없이 줄이 전부 사라지고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자 리지는 제단을 쓰다듬어 아공간을 열었다.
“아……”
그러나 그 안에 남아 있는 건 사역할 시신이 담긴 관들과 오빠들의 유품들 뿐이었다.
그에 일순간 시녀들을 시켜 저택에 다녀오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뒤늦게 자신의 곁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되새긴다.
“……”
저택에 다녀오고 나면, 다시금 기나긴 줄이 형성 될 테고.
자신은 차례가 다가오지 않는 맨 뒤에서 그것을 하염없이 기다려야겠지.
그렇다고 오빠들의 유품으로 병원비를 지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리지는 쓰게 웃으며 휠체어를 뒤로 돌렸다.
또각.
그러나 그런 자신의 옆을 지나쳐가는 한 사내의 모습을 보고, 리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거칠게 붙들어맸다.
“기다리고 있거라.”
하지만 그 손길을 가볍게 떨쳐낸 페르젠은 제멋대로 리지의 병원비를 지불했다.
“하…… 으……!”
그에게 받는 위선적인 친절 하나하나가 어찌 이리도 역겨울 수가 있는 건지.
필요 없다고 악에 바친 소리라도 질러 보고 싶었으나, 어째서일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수납을 마친 페르젠이 자신의 곁으로 다가와 사역하는 시신을 강탈하여 휠체어를 이끌자, 리지는 고개를 푹 숙인채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고작 페르젠이라는 사내가 자신의 곁에 서있기만 할 뿐인데, 와닿던 적대적인 시선들이 전부 거두어지는 꼴이 우습기만 하다.
‘당신들은……’
이 사내의 역겹고 추악한 본질을 하나도 모르겠지.
하지만 리지는 굳이, 그것을 알리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 자신은 이미 양치기 소녀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래, 늑대가 나타났다는 그 말을 듣고 달려 와줄 사람들은……
더 이상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끼릭.
이내 바깥으로 나서는 페르젠이 자신의 저택과는 정반대 되는 곳으로 휠체어를 움직인다.
하지만 리지는 그것에 감히 딴죽을 걸지 못했다.
……그 저택 조차, 더 이상은 자신에게 있어서 돌아갈 장소가 아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