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에 아름답게 조형된 야광석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밝은 빛이 욕실의 내부를 비추어 내린다.
고작 환자 한명과 그의 간호인이 함께 들어서는 걸 전제로 설계된 터라 당연히 욕실의 내부는 그리 넓지가 않았기에, 그 엄청난 밀폐감이 리지에게 가져다주는 심적 압박감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일말의 숨이라도 돌릴 수 있게 만들어주는 건, 자그마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푸르른 하늘.
필시 우물 안의 개구리가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이 이러하리라.
“아, 아……”
하지만 이내 그것조차 가려버리듯, 덩그러니 놓인 의자 위로 자신을 앉히는 페르젠이 시야의 앞을 가로 막자 리지는 자연스레 고개를 숙인 채 가냘픈 숨소리를 내쉬었다.
분명 아직 까지는 그가 아무짓도 하지 않았는데, 서서히 발작하는 트라우마가 조금씩 몸을 옭아매오는 느낌이 든다.
“흐, 아……”
그러나 그런 리지를 배려하기는커녕, 커다란 손을 뻗은 페르젠이 나풀거리는 옷의 앞섬을 풀어 헤치자……
리지는 추운 날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온 몸을 덜덜 떨며 애달픈 울음을 머금었다.
이따금 맨살에 와닿는 그의 손길이 어찌 그리 소름 돋을 수가 있는 건지.
하지만 철저하게 각인된 공포심은, 감히 저항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끔 그녀를 짓누르며 한낱 인형으로 전락시켰다.
스륵……
이내 살이 많이 빠져 유독 빈약해 보이는 상반신의 나신이 페르젠 앞에 숨김없이 드러나자, 리지는 자신의 손을 모아 자그마한 가슴을 엉성하게 가렸다.
인간이라면 본능적이로 느끼는 굴욕감과 수치심이, 뇌리의 사고를 거치지 않고 몸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그러나 페르젠은 그리도 빈약하고 비루해진 몸 따위에 하등 관심이 없다는 듯, 벗겨내린 상의를 바닥에 내려두고는 그녀의 치마를 움켜쥐었다.
움찔!
“아……”
그에 리지는 처음으로, 오직 순수한 자신의 의지를 따라 페르젠의 손을 붙들었다.
감히 저항이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을 만큼, 심히도 하찮은 발악.
“……”
그리고 그 여린 손에 자신을 저지할 힘이 없다는 건, 그 누구보다 페르젠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리지.”
“흐, 흐윽……!”
“놓아라.”
그는 굳이 그것을 힘으로 떨쳐내지 않고, 리지가 스스로 물러나게끔 침묵을 깨트리며 한 마디를 읊조렸다.
세상에 가장 비참한 인간의 부류가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굴복이라는 걸 의도적으로 학습당한 사람들이리라.
그렇기에 인간들은 그들을 보고서 노예라 칭하지 않는가.
그리고 어쩌면 그것보다 더욱 비참하게,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수어버린 원수에게 굴복이라는 걸 학습당한 리지는……
감히 분함이라는 감정조차 되새기지 못하고, 덜덜 떠는 손을 페르젠의 팔뚝으로부터 치워냈다.
툭.
그러자 순식간에 벗겨지는 치마가 그녀의 맨다리를 드러내고, 맴도는 싸늘한 공기를 피부 위로 내려 앉힌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라는 듯, 음부를 가리고 있는 새하얀 팬티를 페르젠이 붙잡고 끌어 내리자 리지는 몸을 흠칫하며 두 다리를 꼬옥 오므렸다.
“정말…… 사람을 귀찮게 하는 구나.”
움찔!
분명 무미건조한 그의 목소리가 낮고 잔잔하게 울려 퍼질 뿐인데.
거기에 뒤섞인 희미한 짜증을 읽어낸 리지는, 제멋대로 덩치를 키워나가는 마음 속의 공포심을 감당하지 못하고 가냘픈 두 다리를 천천히 벌리고 말았다.
그 끝에 음부를 가리는 속옷조차 완전히 벗겨져 적나라한 나체를 그에게 선보이게 되자, 리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인……
“흐…… 끄흑……!”
애달픈 울음을 터트리며, 눈물을 쏟아낼 뿐이었다.
자신의 인생, 자신의 가문, 자신의 가족을 짓밟고 죽여버린 원수 앞에서 거적데기 하나 걸치지 못한 알몸을 선보이고 있다는 게 어찌 그리 치욕적일 수가 있는 건지.
그리고 페르젠은 그러한 리지의 모습을 뒤로한 채, 근처의 바가지를 들어 미적지근하게 데워진 욕실의 물을 퍼서 그녀에게 부어내렸다.
촤아악!
오랜 기간 침실에 틀어 박혀 무기력하게 지냈기 떄문인지, 기름기가 진 푸석푸석한 붉은 머리카락은 무척이나 꼴사납게 흘러내리며 그녀의 시야를 덮어 나갔다.
그 다음, 한 구석에 놓여 있는 비누를 쥐어들었을 때 페르젠은 문득 터져나오는 실소를 참지 못했다.
시대적 배경상 비누라는 건 환자에게 무료로 제공할 만큼 선뜻 보급되기가 힘든 미용품의 일환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라도, 비누라는 물건의 가치가 그리 높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인지.
작가의 설정을 그대로 반영한 세계관은, 이렇게 조잡한 결과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리도 빈약하고, 허술한 세계에서 쥐어진 각자의 운명에 자신들은 그렇게나 악착같이 발버둥을 쳐온걸까.
하기야 이제와서 그러한 감상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아무렴 볼품없고 허술한 세계일지라도, 모든 걸 잃은 패자(敗者) 보다는 모든 걸 거머 쥔 승자(勝者)가 낫다는 걸.
자신과 리지가 대조되며 명확히 증명해주고 있는데.
그리 감상을 접은 페르젠은 리지의 고개를 붙잡아 의자 뒤로 젖혔다.
그러자 내려다보는 페르젠의 붉은 눈과 시선이 마주친 리지는, 덜덜 떨며 황급히 자신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다시금 페르젠의 손길이 자신의 머리를 반듯하게 고쳐 잡자, 결국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린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눈을 감는 행동은 보통 그 감정을 더욱 부풀리기 마련인데……
비누의 거품을 일으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그의 손길은 너무나도 상냥하여, 일순간 공포라는 감정까지 함께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흐…… 아……!”
그에 리지는 발작을 하듯, 억지로 두 눈을 떠서 자신의 보랏빛 눈동자에 페르젠의 붉은 눈을 담았다.
굶주린 사람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허기를 달래기 위해 독버섯을 집어 삼키는 것처럼, 모든 것이 짓밟히고 무너져 내린 세상에서 리지는 설령 그것이 자신을 능욕하는 위선일지라도 페르젠이 자기만족으로 베푸는 거짓된 친절에 의존해버릴까봐 다른 종류의 막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세상에서 가장 증오스러운 원수가, 자신의 유일한 버팀목이 된다는 것만큼 잔인한 결말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게 스스로 트라우마가 가져다주는 공포심에 노출되기로 마음 먹은 리지는, 자신의 눈동자가 조금씩 충혈되는 아픔을 머금어도 꿋꿋이 눈을 감지 않았다.
“그리도 나를 쳐다보고 있으면, 비눗물이 눈에 흘러 들어갈 텐데.”
움찔!
그리고 그런 자신을 조롱하는 건지, 아니면 걱정 하는 건지 모를 미미한 웃음을 머금는 그가.
사근사근,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비눗물을 커다란 손을 이용해 닦아내자 리지는 기어코 절규하듯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 제발……”
이러지 말아 달라고.
오히려 이 자리에서 그가 자신을 잔인하게 학대하거나, 무자비하게 강간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래, 리지는 분명 그리 생각을 했기에.
그것은 단순한 생각이라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차, 차라리…… 나를…… 하, 학대하거나…… 가, 강간 해줘요……”
라는, 비참한 구걸을 스스로의 입에 머금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페르젠은 그것을 듣지 못한 듯, 비누칠을 끝마친 그녀의 머리카락에 물을 부으며 말끔히 헹궈내기 시작한다.
이 잔인한 친절로 포장된 폭력을 받고 싶지 않으면, 바라는 대로 자살이라도 하라는 무언의 압박일까.
하지만 자신의 오빠들의 희생으로 연명된 이 목숨을, 어찌 스스로의 손으로 끊어낼 수가 있단 말인가.
차라리 페르젠이 자신을 죽여주는 것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결코 그럴 일은 존재하지 않겠지.
그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것 또한, 잊닿을 수가 없는 대척점에 서있는 것이다.
이윽고 바들바들 떠는 리지를 내버려둔 채, 깨끗한 천에 비누칠을 하는 그가 아공간에서 꺼내든 향유 몇방울을 떨어트린다.
좁디 좁은 욕실 안에 화사하게 퍼져 나가는 향유의 향.
이것은 틀림없이 그의 취향이 가미된 것일 터.
때문에 그의 흔적 일부가 자신의 몸에 새겨지는 것을 리지는 극도록 거부했으나……
자신의 맨살에 페르젠의 손길이 닿는 순간, 학습된 무기력함은 얌전히 그녀가 굴종하게끔 만들었다.
사륵.
이내 실 풀린 인형을 다루듯, 수액 바늘이 꽂힌 그녀의 손을 들어 올리는 페르젠이 비누 거품을 머금고 있는 새하얀 천을 가져다댄다.
직접 매만져 보니, 어찌 이리도 앙상한 몸일 수가 있는 건지.
긴장으로 빳빳이 솟아오른 분홍빛 유두 아래, 홀쭉 하게 파여들어간 옆구리는 그녀의 늑골을 희미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영양실조의 조짐을 보였으니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상반신에 비누칠을 마친 페르젠이 앞쪽으로 몸을 옮겨 자신의 하반신을 닦으려 들자, 리지는 몸을 움찔하며 자연스레 두 다리를 오므렸다.
하지만 그것은 저항이라 부르기도 시원찮을만큼 가녀린 몸부림이었기에, 허벅지 사이로 파고드는 그의 손길에 의하여 간단히 벌려진다.
“……”
그리고 벌려진 틈새로 파고드는 새하얀 천이 자신의 고간을 부드럽게 닦아 내리자, 리지는 넋나간 표정으로 눈앞의 페르젠을 쳐다보았다.
틀림없이 그에게 이것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세척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겠지.
이 시간이 끝이나게 되면, 자신은 그의 취향에 맞는 옷을 입은 채 다시 한 번 놀아나는 인형이 되기라도 하는 걸까.
아이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품에 안고 자는 애착 인형처럼, 자신은 그의 죄책감을 덜어내는 인형으로……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순간.
리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본능의 이끌림에 따라, 자신의 오른발을 움직여 페르젠의 왼발을 즈려 밟았다.
“아…… 아……”
그래, 그녀는 스스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 자신의 가문을 모두 짓밟게 만들었던.
과거의 그 시발점을, 자신의 머리에 들이밀고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흐…… 아……! 끄…… 아……!”
그에 그 어느 때보다 깊숙히 각인된 트라우마가 발작한다.
8년전의 그 날이 희미하게 뇌리에 떠오르며, 자신의 왼발을 처절하게 망가트리는 잔혹한 페르젠의 모습이 스치고.
그 어린 시절의 페르젠이 곧이어 어엿한 성인이 된 눈앞의 페르젠과 겹쳐지자……
“끄흑……! 하…… 아, 아하하……”
리지는 머잖아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예견이라도 한듯, 처연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오른발이 자신의 왼발을 지그시 즈려밟자, 리지는 비틀린 웃음을 머금었다.
이제는 그에게 망가질 것이 자신 밖에 남지 않았으니, 무엇이 두려울 게 있으랴.
위선으로 점칠된 그의 친절이 자신의 몸을 상냥하게 어루만지고, 상처 입힌 부위를 치료해주는 척 굴도록 내버려 둘 바에야.
그의 더럽고 추악한 이면에 어울리는대로, 자신을 처절히 망가트리게 만드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
하지만 어째서인지, 페르젠은 자신의 왼발을 짓밟고 있는 발을 치워냈다.
그리고는 무릎을 구부려, 새하얀 다리의 비누칠을 묵묵히 이어 나간다.
“우…… 웃기지…… 웃기지마──!”
그에 리지는 자신의 몸을 잠식하는 트라우마조차 망각한 채, 세상에서 가장 처절한 절규를 페르젠에게 내질렀다.
그 날과 다른 결과를 페르젠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라는 진실은 너무 잔혹하지 않은가.
심지어 그 다른 결과를 어째서, 바로 지금 자신의 두 눈앞에 보란듯이 보여주는 건지.
“밟아……! 밟으라고……! 그날처럼……! 내 오른발을…… 왼발과 똑같이 부수란 말이야──!”
여린 손이 무릎을 구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페르젠의 머리를 힘없이 내려친다.
그러자 잘 정돈된 그의 머리가 산발이 되어가지만, 페르젠은 개의치 않고 그녀의 새하얀 다리에 비누칠을 끝마친 뒤 두 손을 붙잡아 의자에서 일으켰다.
그리고는 리지가 미끄러지지 않게끔 품안으로 상냥히 끌어안은 뒤, 손길이 닿지 못했던 엉덩이를 닦아내리기 시작한다.
비누거품이 뒤섞인 물기가 그의 제복을 서서히 젖게 만드나,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씻겨 주는 자상함은……
숨이 턱 막혀올 만큼, 너무나도 잔인한 폭력이 되어 리지를 옭아맸다.
그래, 언제나 이런식으로.
자신이 걸어가는 길은 항상 가시밭길이었고.
도착하는 곳은, 매번 낭떠러지였는데.
이제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며, 리지는 페르젠의 품안에서 흐느끼는 듯한 실소를 머금었다.
“……”
그렇게 비누칠을 모두 끝낸 페르젠이 리지의 몸을 욕실 바닥에 앉힌 뒤, 물을 떠서 천천히 거품들을 씻겨 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거품들을 모두 씻겨내던 찰나, 희미한 지린내가 욕실 안에 서서히 퍼져 나갔다.
쪼르륵……
민망하다 싶을 정도로, 선명한 소리와 함께.
욕실 바닥을 타고 하수관으로 흐르는 물기를 따라 뒤섞이는 리지의 소변.
고개를 내려 리지의 얼굴을 쳐다보니, 완전히 넋이 나가 초점 하나 맞지 않는 눈동자로 벽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본능적인 두려움에 애처롭게 떨고 있는 모습은, 마치 개장수 앞에 놓인 강아지 같아 페르젠은 얌전히 비누거품이 덕지덕지 묻은 천을 다시금 쥐어들었다.
그리고는 리지의 소변이 멎었을 때……
그녀의 상체를 욕실 바닥에 상냥히 눕힌 뒤, 밑으로 내려가 다리를 붙잡고 한 번 더 비누칠을 이어 나간다.
제 3 자가 본다면, 거동이 불편한 소녀를 위해 성심성의껏 수발을 들어주는 사람으로 보일까.
하지만 페르젠의 그 행동에 더 이상 죽은 시체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리지는, 흐릿한 초점을 맞추어 자그마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눈에 담았다.
“……”
어째서일까.
더 이상은, 저 구름한점 없는 맑은 하늘로부터.
아름답다는 감상이 느껴지지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