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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87화 (187/260)

파리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두리번 거리는 리지가 주변의 풍경을 눈에 담는다.

너머에서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는 의원들과, 그런 의원을 보조하기 위해 뒤따르는 간호원들.

그리고 닫히지 않고 개방된 문과, 열려 있는 수많은 창문들은 다행히 지독할 정도의 트라우마가 그녀의 몸을 잠식하는 불상사는 막아주었다.

“적어도 3일 동안 꾸준한 항생제의 투여가 필요하다고 의원은 진단을 내렸다. 그러니 3일 뒤, 몸이 안정화 되면 나를 따라 사형수의 사형 집행을 하게 될 것이다.”

“……”

무미건조하기 그지 없는 그의 목소리.

아마 여기에 자신을 데려온 건, 틀림없이 페르젠 본인일 터.

그리고 그것을 알아챈 리지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한과 함께 차오르는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뭐하러……”

“……”

“뭐하러 나를 여기로 데려왔어요……?”

세자르와 로에르의 시신으로부터 기억을 읽어낸 리지이기에.

자신이 생존한 결과는, 적어도 페르젠이 원했던 방향이 아니라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누구보다 자신의 죽음을 바래야 했을 그가, 어찌 그 침실에서 고독하게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의원에게 데려온 것일까.

친절이라 하기에는 어폐가 있을 만큼, 그 역겨운 위선에 리지는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이제와서야…… 이제와서야 당신 같은 쓰레기도…… 죄책감이라는 걸 느끼는 걸까……?”

“부대원의 관리는 상관의 의무다. 하지만 너는 이런 뻔하디 뻔한 대답을 내게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니겠지.”

비스듬히 끼고 있던 팔짱을 풀어내고, 페르젠은 리지에게 한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너는 내가 죄의식을 느끼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면──!”

그게, 이상하지 않다고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리지는 역으로 페르젠에게 되묻고 싶어 졌다.

죄책감이라는 걸 느끼는 사람이, 연민이라는 감정을 품을 줄 아는 사람이.

자신의 가문을, 자신의 가족을 이토록 무자비하게 짓밟고 죽여버린단 말인가.

“무릎을 꿇으라 한다면 꿇을 터이고, 공식적인 사과를 바란다면 그랬을 터이고, 물질적인 보상도 원한다면 기꺼이 그러하겠다고 했으나…… 그러한 타협지를 모조리 거부했던 것은 분명 너희 가족이 아니었더냐. 아니면 그것을 알면서도, 호시탐탐 내 목을 물어 뜯기만을 기다리는 너희에게 나는 머리를 조아려야 했나?”

“그 타협지를 당신이 제시하는 것부터가…… 그 전제부터가……!”

“인간은 누구나 불확신과 확신 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한다. 먼저 나서서 너희들에게 지난 날의 과오를 사죄하고, 끝끝내 용서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 최후를 받아들일 만큼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다. 궁지에 몰린 쥐새끼가 얌전히 고양이에게 자신의 몸을 내주는 걸 본적이 있더냐. 평행선을 달리기로 각오를 해놓고 그 결과마저 이제는 나에게 떠넘기는 건가.”

삐걱.

리지의 침상 위로 자신의 손을 올리며, 허리를 숙이는 페르젠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다.

그에 리지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손을 이용해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딱딱한 병실의 벽이 그 애처로운 몸부림을 가로막는다.

“내가 죄의식을 느끼는 게 이상하다고 너는 말했지.”

이윽고 지독하게도 선명히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손이 자신의 턱을 붙잡고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끔 옭아매자……

“흐, 끄흑……!”

리지는 볼품없는 딸꾹질이 뒤섞인 신음을 내뱉으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죄의식을 느끼고 있기에 나는 그 침실에서 너를 방치하지 않은 것이다. 네 예상대로 나는 너의 죽음을 바라고 있지만, 떠나간 네 오라비들처럼 그것이 너의 선택이기를 원한다. 쓸데없이 마음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죄책감이 덩치를 키우지 않는 선에서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한 마디로 나는 네가 자살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너의 의지로, 너의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내가 너희 클로디아 가문에게 품고 있는 소망이며.

고독한 침실에서 앓는 너를 방치하지 않고,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다.

……그렇게, 페르젠이 말을 마치자 리지는 흉하다 싶을 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추하게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그 추하게 일그러진 얼굴로부터 서럽게 쏟아지는 눈물이, 리지의 턱을 움켜쥐고 있는 페르젠의 손등을 적셔나간다.

뻔뻔하게도 그가 자신에게 요구할 게 남았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거니와, 오빠들의 죽음이 그에게는 일말의 감흥조차 안겨다 주지 못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 조차 그에게는 행복으로 한발자국 가까워지는 요소라는 게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자신과, 자신의 가문과, 자신의 가족들은.

어디까지 그의 유흥을 위한 장난감으로 놀아나야 하는 걸까.

“안, 죽어……”

“……”

“절대…… 절대…… 당신이 편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가녀린 두 팔을 뻗어 자신의 턱을 움켜쥐고 있는 페르젠의 손을 붙든 채 리지가 더듬더듬 악에 바친 말을 토해낸다.

분명,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도 다치는 경우가 존재하지 않던가.

그처럼 리지는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페르젠의 유흥을 망쳐놓고 싶었다.

때문에 그녀는 다짐했다.

이 쓸모없고 볼품없어진 목숨을 끝까지 연명하여, 영원토록 그를 괴롭게하는 죄의 가시로 남아 살아가겠다고.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페르젠은, 차디차고 냉혹한 웃음을 머금으며 리지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음대로 하거라. 하지만 내가 아내들과 함께 자식을 낳고, 그토록 네가 바라던 행복한 가정을 꾸려 일생을 이어나가는 걸 너는 지켜볼 수가 있을까? 그 생지옥과도 다름 없을 광경을 지켜보며 버텨낼 수가 있느냐 말이다. 반역의 핏줄인 네 곁에는 그 누구도 함께 하려 들지가 않을 텐데. 고독하고 초라하게 구석에 홀로 숨어, 화사하게 빛나는 풍경을 두 눈에 외면하지 않고 담을 수 있으련지.”

정말, 가소롭구나.

리지. 나는 네가 그리 강하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흐…… 끅……!”

가문의 원수.

가족의 원수.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린 원흉.

그런 그가 자신을 조롱하는 비웃음을 머금는데도, 무엇하나 할 수 없는 무력함은 고통스런 좌절감을 리지에게 선사했다.

“더불어 네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면, 이번처럼 나는 네게 위선으로 덧칠된 상냥함을 끊임없이 베풀 것이다.”

본디 그것은 페르젠이 가장 싫어하는 행동 중 하나였으나, 이제와서는 하등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며 리지의 뼘을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그리고 그 끔찍하리만큼 상냥한 손길에 리지는 몸서리를 치며 간신히 호흡을 이어 나갔다.

분명 더할 나위 없이 포근한 감촉이 피부 너머로 전달 되어 오지만, 정작 리지가 체감하는 그의 손길은 날카로운 칼날로 자신의 얼굴을 무자비하게 낭자하는 것 같았다.

“네 의지와는 상관 없이, 오로직 내 만족을 위해서, 네게 친절을 베풀며, 나는 제멋대로의 위안을 얻어 마음 한 구석의 죄책감을 조금씩 지워나갈 것이다.”

그런다면 틀림없이 주변의 사람들은, 반역의 핏줄이더라도 보살펴주는 자애로운 사람이라고 칭송을 하겠지.

“한마디로 리지. 네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살아간다 한들, 너라는 존재는 나의 표리부동함을 표리일체로 바꾸어주는 촉매가 될 뿐이다.”

너라는 뿌리를 내게 억지로 내려, 자리 잡은 죄의식을 양분 삼게 만들고, 끝끝내 시들게 된 너를 바스라 트릴 수 있을 때……

그래, 그때가 오게 된다면.

“감히, 나를 악당이라 부르짖는 자는 이 세상에 없게 되겠지.”

“아…… 흐…… 아…… 아아…… 흐아……!”

보랏빛 눈동자의 초점이 점점 흐트러진다.

누가 자신의 목을 옥죄는 것이 아닌데도, 목구멍이 틀어 막히는 듯한 불규칙한 호흡은 현재 그녀의 애처로움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할 게 어찌하여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어느 하나 명확한 희망이 되어 주지 못하는 것인지.

죄의 가시가 되어 그의 심장에 틀어 박힌다 해도, 그의 말대로 먼저 바스라지는 건 자신이 아닐까 싶을 만큼.

리지는 방금 전의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도 무섭고 두려웠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이 자신의 운명을 체감하고 울음을 토해내는 것은 차라리 편한 축에 속하리라.

이것은 자신의 가족들을 모조리 도살장으로 끌고가 도축하는 광경을 보여준 뒤, 자신 혼자만 그대로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목장에 내버려 두는 격이 아닌가.

발톱과 손톱이 모조리 닳아 없어지고, 핏자국으로 점칠된 자국이 벽을 낭자해도.

결코 탈출 할 수 없는 이 괴물의 목장에서 리지는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 뿐이었다.

“끄흑……! 끄…… 흐…… 우엑……!”

그리고 정신적인 충격으로 찾아온 호흡 곤란에 안색이 파리해지는 리지를 보며, 페르젠은 자신의 손가락을 억지로 그녀의 목구멍에 쑤셔 넣었다.

그러자 터져 나오는 호흡과 함께, 비어버린 속의 위액이 리지의 입가를 타고 새하얀 옷을 추잡하게 더럽혀 나간다.

하지만 페르젠은 그 모습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자신의 손을 스윽 닦아내고는 리지를 품안에 안아 들었다.

“씻어야 겠구나.”

“흐…… 아……”

동시에 앞서 언급 했던 모든 것들이, 결코 말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겠다는 듯.

그녀의 수액걸이를 움켜쥐는 페르젠이 천천히 걸음을 내딛는다.

심지어 환자들이 이용하는 욕실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었던 터라, 페르젠의 발걸음이 멈추어서는 건 금방이었다.

끼익.

이내, 오직 단둘이.

그 누구의 시선도 닿을 수 없는, 욕실 너머의 문이 열리자……

리지는 페르젠의 품에 갇히듯 안긴 채로, 뒤에서 지나치는 의원들과 간호원들을 향해 애타게 손을 뻗었다.

타악!

그러나 그런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아 주는 사람도, 바라보는 사람도 존재하지가 않았기에.

심연 너머의 괴물에게 붙잡혀 끌려가듯, 리지는 페르젠의 품에 안긴채로 욕실에 들어서야만 했다.

그래, 그곳은 아무도 없었고.

동시에 그 누구의 시선도 닿을 수가 없는──페르젠이라는 괴물의 목장.

그리고 그곳에 자신은 있는 것이다.

오직,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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