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4일.
이른 아침, 자신의 침실에서 시녀들에게 시중을 받고 있던 유리엘은 슬그머니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주기를 계산해보면 진작 달거리가 찾아 왔어야 했을 텐데.
자신의 몸은 그 신호를 알려오지 않았다.
저번 가임기 때, 황궁에서 페르젠과 몸을 섞은 것을 고려한다면…… 공교롭게도 시기가 일치하니 어쩌면 임신일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으리라.
그러나 유리엘은 그 사실을 굳이 페르젠에게 알리지 않았다.
수도와 수도 근방에서의 징집은 모두 끝이 났고.
오늘 일정이 소화된다면 황제는 엘마르크 제국에게 선전 포고를 할 것이다.
그러한 전쟁이 시작되려는 가운데, 이 사실을 페르젠에게 알려봤자 득 될 것은 없겠지.
오히려 그의 어깨만을 더욱 무겁게 할 터.
특히, 정말 임신이라면 유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었다.
후방으로 배치가 되었다고 한들, 불규칙적인 생활을 보내게 되는 건 피할 수가 없을 테고.
전장이 가져다주는 스트레스는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리라.
극초기의 태아가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온전히 자신의 자궁에 자리잡아 성장하길 바라는 건 욕심일지도 모르겠지.
‘아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엘은 그 욕심을 부리고자 했다.
왜냐하면 자식을 잃고 싶지도.
사랑하는 남편인 페르젠을 잃고 싶지도 않았기에.
‘미안해…… 그래도, 부디 엄마랑 같이 힘을 내주지 않겠니……’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으며 살아가는 인생이란 참으로 힘들다는 걸, 유리엘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소중한 자식과, 사랑하는 남편을 저울대 위에 올려놓고 가늠하는 것 만큼은 결코 하고 싶지가 않았다.
“다 끝났습니다. 마님.”
“고생했어.”
손질을 마친 시녀들을 뒤로하고, 몸을 일으키는 유리엘이 옷을 갈아 입는다.
그리고는 모든 준비를 마친 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또렷이 마주보았다.
아내로서 남편을 지키기 위한 싸움.
엄마로서 자식을 지키기 위한 싸움.
……그 어느 쪽에도, 자신은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 * * * *
똑똑.
짧은 노크소리와 함께, 자신의 침실로 유리엘이 들어서자 페르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준비, 다했어요?”
“……”
치장이라기 보다는, 나름대로의 무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유리엘의 옷차림을 보고 있으니 그러한 감상이 들어 페르젠은 그녀의 색다른 매력을 발견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노출 하나 없이 차려 입은 옷임에도 불구하고 도드라지는 커다란 가슴은 역시 별로 탐탁치가 않다.
베이스가 되는 건전한 제복 차림 조차도 어찌 이러한지.
“걱정마요. 다른 사람들이 내 몸을 힐끔 거리지 않도록 어차피 로브를 입을 거니까.”
왼손에 쥐고 있던 로브를 팔랑이며 유리엘이 배시시 웃는다.
“병사들이 내 몸을 상상하며 성적으로 스트레스를 풀 여지는 주지 않을게요.”
“나는……”
“그런 의도로 인상을 찌푸린거면서.”
“……”
“이렇게 나를 독점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후방으로 보내버렸어요?”
남편이 아내에게 대화로 이길 수가 없는 건 시대를 막론하고 유구한 전통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가 자신을 옭아매는 말재간이 점점 늘어나는 기분이 든다.
“농담이에요.”
샐쭉 웃음을 머금고, 로브를 걸친 뒤 곁으로 다가온 유리엘이 살포시 안겨들자 이제는 일종의 버릇처럼 페르젠은 그녀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리고 별다른 의도가 없는, 그러한 신체의 접촉일 뿐인데도.
이리 그녀를 안고 있으니 조금더 어루만지고 싶다는 욕망이 드는 건, 정말 수컷을 매료하는 강력한 마성이 아닐까 싶었다.
“준비가 끝났으면 나가도록 해요. 라우라도 밖에서 대기 중이니까.”
“그래…… 그러지.”
자연스레 자신의 허리춤으로 내려온 그의 손길이 야릇한 기색을 머금고 있다는 걸 알아 차렸기에, 조금만 욕심을 냈다면 짧게 그와 몸이라도 섞을 수 있었으리라.
다만, 그의 가학적인 욕구를 끌어내며 관계를 이어 나가던 자신이 갑자기 그 방식을 꺼려하게 된다면 틀림없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에 유리엘은 아쉬워하면서도 페르젠의 품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정말 태내에 아이를 품고 있다면, 극초기의 과격한 섹스는 절대 좋지 않을 테니.
그렇게 함께 저택을 나와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도착한 페르젠은 유리엘과 라우라가 향하는 방향과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백작님!”
그러자 미리 도착해있었던 부관인 림벨이 헐레벌떡 자신의 곁으로 뛰어온다.
“제가 미리 인원 체크를 해두었습니다.”
“고맙군.”
오늘 황궁으로 걸음을 내딛은 이유, 그것은 통솔하는 부대원들을 모아 사형수들의 사형을 집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사와 마법사들, 흔히 말하는 고급 인력들 중에서 사람을 죽여 본적이 없는 이들은 전쟁에서 강력한 PTSD를 앓을지도 모르니.
그것을 미연에 방지 하기 위해, 사형수들의 목숨을 직접 끊는 과정을 시행한다.
“한 명이 체크가 되어 있지 않군.”
“예, 예……”
분명, 그 날의 통지서에 오늘 날짜가 기입되어져 있었을 텐데.
림벨이 가져온 인원 보고서에, 리지는 체크가 되어 있지가 않았다.
그 때도 말을 했듯, 전시 상황에서의 황명 불복종은 대가가 적지 않을 텐데.
“수도를 벗어 났다는 정황은 없어서 일단 기다려보고는 있는데, 사람을 보내도록 할까요?”
“오늘 일정을 먼저 집행하는 건 기사들 쪽이었지.”
“예. 그렇습니다. 상대적으로 인원수가 적은 축에 속하다 보니.”
“그러면 따로 사람을 보낼 필요는 없다. 내가 직접 갔다 올 테니.”
부대원의 관리 또한 상관의 의무라 할 수 있었기에, 페르젠은 잠시 자신의 빈자리를 림벨에게 맡기고서 리지가 머무르고 있을 저택으로 향했다.
그다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드는 건 착각일까.
전시 상황에서의 불복종은 대상의 지위를 막론하고 사형.
그것을 그녀도 모르지 않을 텐데, 오늘 이 자리에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는 건.
……어쩌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건 아닐까 하는.
그러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이 엄연히 리지가 본인의 의지로 선택한 결과라 한다면, 자신이 무어라 할 여지는 없는 것이겠지.
* * * * *
“……”
브뤼테인으로 올라가기 전, 한 번 들렸을 적과 변함 없는 저택의 풍경이 페르젠의 눈에 들어온다.
굳이 차이점이 있다면, 저번보다 가득 쌓인 쓰레기 더미이리라.
그렇게 정원으로부터 퍼져나가는 불쾌한 악취를 무시하며 저택의 안으로 들어서니, 관리가 되어 있지 않다는 걸 선명히 증명하듯 곳곳에 내려앉은 먼지들이 보인다.
사람이 산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정도로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음침하고 음습한 분위기.
또각.
그 복도를 거닐어 위로 올라간 페르젠은, 리지가 머무르고 있을 가능성이 제일 높은 침실의 문을 노크도 없이 열었다.
툭.
그리고 안쪽으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제일 먼저 자신의 발끝에 곰팡이가 가득 피어 있는 빵조각이 부딪치는 걸 보고 페르젠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택의 정원과 다르게 오랜 시간 환기를 하지 않아 피어오르는 퀘퀘묵은 냄새는, 기관지에 질병이 생기기 딱 좋은 최적의 환경을 구축하고 있었다.
“리지.”
죽은 건지 살아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는.
새하얀 침상 위에 누워, 등을 돌리고 있는 리지.
숨소리조차 제대로 들려오지 않아 일종의 고독사라도 한 걸까 싶어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제야 미약한 숨소리가 들려온다.
정확히는 그 미약한 숨소리에 앓는 신음이 섞여 있었다.
손을 뻗어 이마를 만지니 불덩이가 따로 없었다.
그리고 당시,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그녀의 인적 사항을 보았던 페르젠은 유독 편도염을 자주 앓았다는 내용을 기억하고서 그녀의 몸을 돌려 자그마한 입을 벌렸다.
안쪽을 불빛으로 비추지도 않는데, 편도 근처에 피어오른 새하얀 염증은 지금 그녀의 몸 상태가 많이 좋지 않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또, 얕기는 하나 가지고 있는 의학지식으로 그녀를 진찰 해보니 영양실조의 기미도 보인다.
머리맡에 꾸깃꾸깃 널브러져 있는 건, 당시 자신이 건네주었던 통지서.
그래, 그녀는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지 못했던 것이다.
스륵.
이불을 들치니 흘러내린 식은땀으로 가득 젖어든 시트가 드러난다.
애초에 그 당시 입었던 상처들과, 골절 되거나 금이간 뼈들이 제대로 낫지도 않은 것 같은데.
지금까지 이 몸상태로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 용할지경이었다.
‘생지옥이 따로 없는 현실일텐데도…… 살고는 싶다는 것이냐.’
특유의 붉은 눈으로 잠시 동안 리지를 내려다보던 페르젠은, 조용히 그녀의 몸을 품안으로 안아 들었다.
* * * * *
‘아파……’
낯설다기 보다는, 오히려 익숙하다고 할 수 있는 병실의 냄새에 리지는 두 눈을 떴다.
침을 삼킬 때 마다 따가운 목.
호흡을 할 때 마다 느껴지는 부어오른 편도의 통증.
무엇하나 그녀를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리지의 몸이 한층 좋아졌다는 반증이었다.
고통조차 자각할 수 없을정도로 한계에 내몰렸던 몸뚱이가, 그것을 인지할 수 있는 수준만큼 회복되었다는 뜻이니.
‘여기는……’
좀처럼 초점이 맞지 않는 눈동자로 바라보는 주변의 풍경은 온통 흐릿하여, 작금의 상황을 온전히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적어도 오늘이 통지서에 기입되어져 있던 소집 날짜라는 건, 그녀의 뇌리에 또렷이 떠올랐다.
그에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얼른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어 모든 것을 망각하고 싶어진다.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은 황명 불복종으로 인한 사형이겠지만……
애당초, 자신은 무얼 위해 이 전쟁에 참가해야만 한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에르네스 제국을 위하여 전장에 서야 한단 말인가.
징집된 평민들 또한 가지고 있는 명확한 목적성을, 그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 가족을 잃은 비극과 동시에.
지독할 정도의 무기력함이 그녀의 몸을 좀 먹고 있는 것이다.
죽지 못해 살아 있다는 말이, 현재 그녀를 가르키는 정확한 비유이겠지.
그러나 가족의 생명을 제물로 연명한 이 목숨을, 그렇게 끊어 버려도 되는 것인지.
그러한 갈등이 그녀의 내면에 끊임없는 마찰을 일으켰다.
기어코 숨통이 죄여오는 듯한 그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앓는 신음과 함께 자신의 가슴을 부여 잡은 리지는 묵힌 숨을 토해냈다.
무언가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은, 그러한 기분이 든다.
잠을 자면 찾아오는 악몽과, 눈을 떠도 벗어날 수 없는 그 악몽의 연쇄로부터……
잠시나마 해방되고 싶은, 그 간절함을 담고 있는 몸부림.
그래, 그 끝에 간신히 상체를 일으킨 리지는 햇살이 스며드는 창가 쪽으로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아……”
하지만 창가 쪽으로 시선을 옮긴 리지는 곧장 온 몸을 파르르 떨며 두 다리를 오므렸다.
창가에 기대 단정히 서있는 사내.
그리고 그에게서 풍겨오는 잊을 수 없는 고급스런 향수의 냄새는, 어느때 보다도 잔혹한 악몽의 연속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일어났느냐.”
결코 듣고 싶지 않은 괴물의 목소리.
그 울림이, 어린양의 몸을 처절하게 옭아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