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4일의 시간이 흐르고, 적막한 고요가 내려앉은 방안.
유페미아는 원치 않았던 아침의 태동이 시작 되자, 조심스레 침상에서 일어나 커튼을 잡아 당겨 창문을 덮어 버렸다.
어둠 너머를 희미하게 밝히는 저 여명이 세상을 내리 비추게 될 때는, 페르젠이 브뤼테인을 떠나가게 되겠지.
미련한 짓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유페미아는 그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어했다.
이내 커튼을 꼬옥 붙들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혹여나 잠들어 있을 그가 깨지 않게끔 사근사근 걸음을 내딛어 침대 위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삐걱이는 소리조차 나지 않게끔 살금살금 이불을 덮은 뒤, 그의 곁에 달라 붙어 따스한 온기를 전해 받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럴 줄 알았더라면, 어젯밤 무리해서라도 관계를 가졌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지친 그의 몸이 평소대로의 루틴대로 일어나지 않고, 더욱 오랜 시간의 잠을 요구했으리라.
‘잔인하네요……’
날개를 꺾어 나는 법을 잊게 만들고, 그대로 자신만의 새장에 가두니.
우물안의 개구리가 바라보는 하늘처럼, 페르젠이라는 사내의 품만이 간신히 퍼덕 거릴 수 있는 하늘이라고 인지하게 되었는데.
어찌 그런 자신을 홀로 내버려두고, 그리도 머나먼 길을 떠난다고 하는 건지.
‘당신 눈에는…… 내가 생각보다 강해 보이는 걸까.’
자생하는 방법은 잊어버린지 오래였고.
오직 그를 위해 지저귀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여인이 되어 버렸는데.
스륵.
깨어있던 페르젠 앞에서는 티내지 못했던 애타는 마음을 조심스레 쏟아내며, 유페미아는 그의 몸을 꼬옥 끌어 안은 채 아기새처럼 얼굴을 비볐다.
움찔!
그 때, 그 어리광에 호응이라도 해주듯.
페르젠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등허리를 받치며 품안으로 끌어안자, 유페미아는 온 몸을 옅게 떨었다.
단순히 잠결에 흘러 나온 잠버릇일까 싶었으나, 고개를 치켜들어 바라본 그의 얼굴은 잠버릇 따위가 아니라는 걸 선명히 알려주고 있었다.
“……어쩐 일로, 네가 나보다 일찍 일어 났구나.”
수마의 기운이 남아 있어 반쯤 떠진 그의 눈동자와 조곤조고한 목소리.
그러나 유페미아 입장에서 제일 싫고 두려운 건, 그가 현재의 시각을 어렴풋하게나마 아침이라는 걸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에요…… 잠깐, 화장실에 다녀왔을 뿐이야……”
“……”
“깨워서 미안해요…… 얼른, 자요……”
파르르 떨리는 유페미아의 손이 페르젠의 얼굴을 부드럽게 더듬다, 탄탄한 가슴팍을 상냥하게 쓸어내린다.
자장가라도 불러주는 듯한 포근한 감각이었지만, 페르젠은 그 손끝에서 느낄 수 있는 애절함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그러느냐……”
그렇기에.
어느 새 커튼으로도 가릴 수 없는 여명이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지만, 페르젠은 그것을 외면한 채 유페미아의 몸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눈을 감았다.
기나긴 밤이, 벌써부터 아침을 맞이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으리라.
그러니 분명 저 화사한 햇살은 자신의 착각이겠지.
……그리하여, 늦잠을 잔 페르젠이 일어난 시각은 오후 1시 40분.
일분 일초가 아까운 상황이었지만, 페르젠은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 * * * *
“이거……”
브뤼테인의 저택, 그 문앞에 대기 중인 마차로 페르젠이 올라타기 전.
유페미아는 품안에서 아름다운 자수가 새겨진 손수건을 그에게 건넸다.
새겨진 자수는 녹색빛 바탕에 승리를 상징하는 월계수.
그래, 유페미아 나름대로.
전장에 나서는 페르젠의 승전과 생환을 기원하는 선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든 페르젠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유페미아의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숙였다.
쪽.
소리조차 나지 않는, 무척이나 짧은 키스였지만.
이 이별의 순간에 그것만큼 어울리는 것도 존재하지 않으리라.
“다녀오마.”
“응……”
몸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여보.”
조금은 낮간지러운 그 단어를 입에 올리며, 유페미아는 최대한 밝게 웃어 보였다.
다그닥!
그렇게 브뤼테인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저택을 떠나가자, 유페미아는 조용히 제자리에 서서 그 광경을 끝까지 눈에 새겨 담았다.
직후, 더이상 자신의 눈에 그 마차가 들어오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유페미아는 흔들던 손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벌써부터 그가 없는 빈자리가 전해주는 고독함과 불안함이 피부 위로 느껴지는 듯 하다.
그것을 잊기 위해 애써 자기 자신의 두 팔을 끌어 안아보지만, 의미가 없는 행동이라는 건 유페미아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
올려다보는 하늘이 무척이나 맑다.
머잖아 이 세계에는 겨울이 찾아오게 되겠지.
그리고 루에르그의 여인에게 있어서, 겨울이란 무척이나 익숙한 계절인데도.
유페미아는 페르젠이 곁에 없는 겨울을, 홀로 보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겨내야 하리라.
그래야……
내가, 그의 다음 계절이 되어 줄 테니까.
* * * * *
“괜찮으십니까……”
페르젠의 눈치를 살피던 림벨이 조심스레 페르젠에게 걱정어린 어투로 물었다.
그에 유페미아가 정성스레 만들어 자신에게 전해준 손수건을 매만지고 있던 페르젠은 그것을 품안으로 넣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괜찮지 않다고 한다면, 네가 이 전쟁을 없던 것으로 해주기라도 할 것이냐.”
“그, 그건……”
“농담이다. 림벨.”
당황하는 자신의 부관을 쳐다보며, 페르젠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는 유리엘과 라우라가 타있는 마차가 뒤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뒤, 평소대로의 자신으로 돌아간다.
이번 전쟁에 있어서 자신의 목적은 오직 하나.
품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도 잃지 않는 것.
“하하……”
하지만 그것을 자각한 순간, 페르젠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해보자면 무언가를 얻기 위해, 강탈하기 위해 싸움을 한 적은 있어도.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싸움을 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던가.
‘지키기 위한 싸움을 하는 악당이라……’
참으로 모순되는 어감의 문장이었다.
정말, 근본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가 없는.
기구한 악당의 운명이다.
* * * * *
11월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날──11월 30일.
수도로 돌아온 페르젠은 전보다 더더욱 삭막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수도의 풍경을 바라보며 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성문의 외곽에는 상당한 규모의 막사가 마련되어 징집된 국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그들을 관리하는 관료들은 한시라도 앉아 있지 못한 채,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림벨.”
“예!”
“징집 될 병사들의 숫자가 몇인지 아느냐.”
각 영지의 모든 사람들이 수도로 전부 징집되는 건 아니었다.
정확히는 각 영지에서 징집을 시도한 뒤, 정해진 지역에서 모여 출진을 하는 것이다.
“아마…… 7만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느냐.”
누가보면 적다고도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시대적 배경상, 7만의 병사를 움직일 수 있는 나라라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여기에 노인과 여자들까지 억지로 끌어들인다면 그 수는 10만에 도달하겠지.
단순히 건장한 남성으로만 징집했을 때 7만의 숫자라는 건, 오히려 그 국가의 힘이 그만큼이나 강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그러면 다녀오겠습니다. 오후에 저택에 들러 보고를 할 테니, 수고하십시오. 백작님.”
“그래.”
부관인 림벨을 떠나보내며, 페르젠은 고개를 돌려 라우라와 유리엘을 바라보았다.
“가지.”
짧은 한 마디와 함께, 수도에 있는 저택으로 다 같이 걸음을 옮긴다.
또각.
그러다 문득, 페르젠은 지나치는 광장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자신이 수도를 떠나기 전 까지 효수되어 있던 세자르와 로에르의 수급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살점이 모두 파먹혀 거두어 들인 것이리라.
남게 된 그의 유골들은 뼛가루가 되어 바람을 타고 세상을 떠돌고 있겠지.
꼬옥.
“……”
그리고 그런 자신의 손을 곁에서 얌전히 서있던 유리엘이 따스하게 마주 잡아 온다.
아무것도 없는 광장의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혹여나 죄책감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라도 한 걸까.
그 모습을 바라보며, 페르젠은 유리엘에게 너무나도 약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구나 싶었다.
조금만 빈틈을 보여줘도 이리 자신을 위로하려는 그녀의 모습이 명확한 반증이라 할 수 있으리라.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페르젠은 유리엘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그녀가 마주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어 애정을 가득 담은 깍지를 낀다.
“……”
그러자 옆에서 두 사람의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라우라는, 페르젠의 남은 손을 슬그머니 쳐다보며 자신의 자그마한 손을 만지작 거렸다.
하지만 유리엘의 등쌀을 버틸 자신이 없었기에, 얌전히 토끼 인형의 길쭉한 귀만을 잡아 당길 뿐이다.
그녀의 지위도 지위이지만, 앞으로는 동일한 후방 보급 부대──그것도 자신의 직속 상관으로 배정 될 게 아니던가.
그러니 아직은, 미래에 걷게 될 지옥길을 자처해서 체험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