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익.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페르젠과 라우라가 함께 들어서자, 줄곧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던 베로니카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아무리 그가 브뤼테인의 혈통이고, 아폴리온 등급의 흑마법사라 한들.
이 자리를 어물쩡 넘기려 한다면 베로니카는 최선을 다해 라우라를 그의 곁에서 떨어트려 놓을 생각이었다.
물론, 작금의 관계를 지지했고.
훨씬 발전된 관계를 추구하도록 그림을 그렸던 베로니카였지만.
전쟁이 얽혀 있는 현재의 상황은 말이 조금 달랐다.
적어도 그가 가벼운 각오로 라우라를 말리지 않고, 또 그리 대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면……
자신의 딸은 물론이거니와, 어머니인 자신 조차도 사내를 보는 눈이 없었던 것이리라.
“오래 기다리게 했군.”
“아닙니다. 백작.”
자리에 착석하는 라우라와 페르젠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베로니카는 차를 한모금 마셨다.
한참을 안절부절했던 딸이 어느새 상당히 안정을 되찾은 걸 보아하니, 적어도 둘이서 상의하여 도출한 답이 만족스럽지 않을 가능성은 꽤나 낮아 보인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그대의 딸인 라우라 드 샤를 로젠베르크를 첩으로 맞이하고 싶다.”
“……”
“다만, 그것은 지금 내 심정일 뿐이다.”
조금 모순이 있는 페르젠의 말이나, 베로니카는 어렵지 않게 그 모순을 해결해줄 단서를 찾았다.
“백작이 전장에서 죽게 되면 제 딸은 과부가 되지요. 그래요. 적어도 두 사람이 자신들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으려 하지 않은 건 시기가 좋이 않아서라고 하나……”
어찌하여, 자신의 딸인 라우라를 사랑한다면.
그녀를 전장에 데려가려 하는 것인지.
베로니카는 그것을 묻고 싶었다.
라우라가 고집을 부린다고 해도, 충분히 페르젠 선에서 정리를 할 수 있었을 터.
“승리한 미래에 내가 살아 있을 수는 있겠으나, 패배한 미래에 내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겠지.”
“……얼토당토 않는 욕심이란 걸 알고 있나요. 전장은 사랑을 나누는 곳이 아니에요. 백작.”
“너무나도 뼈아픈 정론으로 나오는군.”
“애당초 이별을 상정한 연애를 하는 것. 그리고 죽음을 상정한 사랑을 하는 것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백작.”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부인.”
“세상에 영원하다는 것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필시 영원하다는 것이 있으리라 믿는 게 사랑이니까요.”
추상적이고, 감정에 호소하는 듯 하면서도.
베로니카의 한마디 한마디는 상당한 설득력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페르젠은 무리없이 다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부인.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
“하지만 웃기게도, 그 언젠가 맞이할 죽음을 걱정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지. 마찬가지로 연인들 또한 이별을 통한 헤어짐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부들 또한 죽음을 통한 헤어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째서일까. 의문을 품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 뿐이었다. 대다수의 인간들이 그러하니, 그것이 일반적이라는 것이지.”
“……”
“인간이란 생물은 참으로 편한 존재다. 직접 직면하기 전까지는, 해당 경험이 자신에게 가져다주는 무게감을 모르니.”
“……”
“부인도 그 일반적인 선입견을 내게 대입시켜 말한 것이겠으나, 나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페르젠은 반론을 제기했다.
주변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보고서도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주변 연인들이 이별하는 모습을 보고서도 어찌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주변 부부들이 사별하는 모습을 보고서도 어찌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필멸의 존재가 필멸을 두려워하지 않고서야, 영원이라는 불멸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백작은……”
“부인. 24년의 시간 동안 나는 전쟁이라는 것을 겪어본적이 없다.”
“……”
“최전선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해야 할 것이며, 적군에게 반드시 죽여야만 할 목표물이 될 것이다. 브뤼테인의 혈통이라는 자긍심이, 아폴리온 등급의 흑마법사라는 자부심이 그 모든 부담감을 덜어내고 반드시 생존하여 승리를 쟁취할 수 있게 해줄 것 같은가.”
“백작. 당신은 그러한 곳에 사랑하는 제 딸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도돌이표를 찍듯.
페르젠이 호소를 하면 할 수록, 그것은 베로니카의 저 논리에 의하여 간단히 파훼당해버렸다.
“알고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고 페르젠은 받아들였다.
“겁이 많은 아이라도…… 무언가를 할 때, 곁에 자신의 어머니가 있다면 두려워하지 않지.”
“……”
“부인. 제국의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황실 조차도 브뤼테인의 핏줄을 의지한다. 그들을 등지고서 우리는 언제나 앞으로 나아갔고, 그들은 그러한 우리를 보며 위안을 얻기도 하고 용기를 얻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하다면 우리는 누구에게 의지해야하는가. 누구에게 위안을 얻어야 하는가.”
사람들을 구하는 영웅이 있다면.
과연, 그 영웅은 누가 구해줘야 하는 것인지.
지극히 간단하지만, 함부로 반론하기에는 어려운 논리였다.
“베로니카 리엘 레이나 로젠베르크. 내 곁에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으며, 유일한 혈육인 형님 또한 전장에서 의지할 수가 없다.”
“……”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인에게, 그 안식을 바래서는 안되는 것인가……”
욕심이라는 걸 알고 있으나.
과연, 그 욕심이 결코 바라서는 안되는 욕심인 것인지.
끝으로 말을 마친 페르젠이 고개를 숙인다.
스륵.
그리고 그런 페르젠에게 손을 뻗어오는 것은, 지금까지 줄곧 조용히 있던 라우라였다.
그래, 그 가녀린 손길과 자그마한 체구로 라우라는 페르젠을 끌어 안았다.
“……”
동시에 그러한 자신의 딸을 지켜보고 있던 베로니카는, 마치 더 이상 내가 사랑하는 남자를 나약하고 비겁하고 구차한 겁쟁이로 만들지 말라고 화를 내는 것 같아……
무어라 말을 하려 했던 입술을 꾸욱 닫아 버렸다.
태생부터 병약했던 아이가, 한시라도 눈을 떼면 걱정되었던 아이가……
어느새 어엿한 숙녀가 되어 사랑하는 남자를 지킬 줄도 아는 것을 보아하니, 더 이상 자신의 품에 끌어 안고 있을 수는 없는 걸로 보인다.
“……나가보렴.”
그에 천천히 눈을 감으며, 베로니카는 자신의 딸인 라우라에게 그 한마디를 건넸다.
그러자 라우라는 의자에서 일어나 페르젠의 손을 붙잡은 채 응접실을 조용히 나가버렸다.
직후, 스며드는 침묵 속에서 베로니카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정말……’
돌이켜보면 자신의 남편도, 홀로 삶을 헤쳐나가기에는 미숙한 점이 많으니 곁에서 함께 해달라고 청혼했던가.
분명, 문화와 예술의 성지인 로젠베르크인데.
그 가문의 여인들은……
‘하나 같이 치마폭이 명물인가 보구나.’
이제는 자신의 남편을 어찌 설득해야 할 것인지.
베로니카는 두통이 아려오는 걸 느꼈다.
* * * * *
“괜찮은 보조를 했더구나.”
“……”
보조라.
나란히 복도를 걷다 페르젠의 한 마디에 라우라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 보았다.
응접실에서 보여주었던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전부 연기였을 터.
실제로 그 말 전부가 진심이라면 페르젠이 유리엘을 후방으로 보내버린 것이 말이 되지 않겠지.
하지만 유독 짊어지고 있는 부담감을 호소할 때 만큼은 그리 느껴지지가 않았기에, 라우라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페르젠을 끌어 안은 것이다.
“그러면 저녁에 잠시 들리도록 하겠다. 그 전까지 쉬고 있도록 하여라.”
“네……”
처리해야할 일이 더 있다는 듯,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자신의 곁을 떠나는 페르젠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라우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둔한 꼬마야……’
너는 연기 였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연기가 아니었단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이 야속한 감정이 상당히 답답하여, 라우라는 일순간 목이 메여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 * * *
‘분명, 별거 아닌 언질일 텐데.’
어둠이 자욱하게 내려앉은 밤.
배정받은 자신의 침소에서 라우라는 전신 거울 앞에 다소곤히 서있었다.
그 너머에는 곧 수면을 취할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아름답게 차려 입은 여인의 모습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옷을 갈아 입어야 하는 걸까.
특히 창백했던 피부에 적당한 혈색을 돋보이기 위하여 화장을 한 건, 그의 눈에 너무 티나지 않을까 싶어 라우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고작 한 사내에게 잘보이기 위해 이러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자존심에 적잖은 흠집을 자아낸다.
‘……암컷이 따로 없구나.’
이 모습은 누가 봐도, 잠깐 자신을 만나러오는 수컷을 깊은 밤 동안 붙잡아 두기 위한 모양새가 아닌지.
딸칵.
그 때, 노크도 없이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자 라우라는 자그마한 몸을 움찔하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방안으로 들어서는 건 페르젠이었다.
타악.
이내 그가 문을 닫고, 자신을 조용히 쳐다보자 라우라는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여인이라 그런지, 어찌 이리도 사내의 시선에 민감한걸까.
그의 눈동자가 강조된 쇄골과 드러난 새하얀 다리를 훑고 지나가자, 라우라는 자신도 모르게 아랫배가 은은하게 저려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부끄러움에 시선을 돌리지 않고 똑같이 그의 고간을 훑으며, 이제는 언제든지 떠올릴 수 있게된 그의 수컷 냄새를 상기하고 있으니……
일말의 거부감도 없이 자연스레 머금게 된 스스로의 음탕함에 속으로 실소가 흘러 나온다.
“그 옷은……”
“여, 연회용…… 이, 인데…… 다, 당분간은 이, 입지 못할 테니…… 미, 미리…… 이, 입어 봐, 봤어요……”
급조한 변명치고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라우라는 치맛단을 미약하게 움켜쥐었다.
“아름답구나.”
“아……”
별로.
그런 말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데.
아니, 문맥상 남성의 입장이라면 겉치레에 불과할지라도 그 감상을 내뱉어야 할 순간이었다.
그래서 생각을 하지는 않았어도, 분명 라우라는 본능적으로 그의 다음말을 고대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의 입에서 아름답다는 말을 듣게 되니, 괜스레 가슴이 설레이지 않는가.
“해야 할 말은 짧게 하도록 하마.”
“네……”
“네 어머니 앞에서는 내가 직접 나섰으니, 차후 전쟁이 종료 되었을 때…… 유페미아와 유리엘에게는 네가 직접 나서서 설득을 해야 할 것이다.”
“아……”
“정확히는 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것이겠지.”
페르젠의 그 말은 자신에게 상당히 힘들고 잔혹한 짓을 강요하는 것이었지만.
그가 자신을 위해 감수한 손해가 적지 않으니, 그 정도 여파는 홀로 감내하는 게 맞다고 라우라는 판단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해야 할 말은 이게 끝이구나.”
차려입은 옷의 감상을 제외하면 고작 세 마디.
정말 사전에 언급한대로 짧게, 자신에게 할 말만 건네주고서 등을 돌리는 그가 문고리를 붙잡는다.
“저……”
그에 자신도 모르게 라우라는 입을 열어 그의 발걸음을 멈춰세웠다.
“할 말이라도 있느냐.”
“아, 아니요……”
꺼낼 말은 하나도 존재가 하지가 않는데.
무얼하러 자신은 그를 불러 세운 건지.
“아. 잠시 잊고서 말하지 않았다만, 유페미아를 설득 할 때 만큼은 네 가문의 배경을 들먹이지 말도록 하거라.”
“그건…… 어, 어째서?”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니, 되묻거나 할 필요 없는 것이다.”
“……”
“라우라.”
“네……”
“좋은 꿈을 꾸도록.”
“배, 백작님도요.”
그리 말을 끝마친 그가 방을 나가버리자, 라우라는 조금 다리의 힘이 풀리는 느낌이 들어 침대에 주저 앉았다.
유페미아를 설득 할 때 자신의 가문인 로젠베르크를 들먹이지 말라고 했던 건……
아마 그녀가 가지고 있는, 루에르그라는 하찮은 가문의 자격지심 때문이리라.
실제로 유페미아가 그런 쪽으로 자존감이 많이 낮다는 건 자신 또한 눈치채고 있었으니, 그라고 모를리는 없을 터.
필시 이 명령은 그 점을 배려한 것이겠지.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정말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지 않은가.
“……”
그리고 순간, 더할나위 없이 느끼고만 질투라는 감정에 라우라는 당황하여 주먹을 꼬옥 말아 쥐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여기서 조금만 더 깊게, 방금 느껴버린 질투라는 감정을 파고든다면 스스로가 너무나도 추악해질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예컨대 전장에서 유리엘이 죽고.
유페미아가 유산하게 된다면……
움찔!
도대체 무슨 망상을 하는 건가 싶어 라우라는 고개를 도리질쳤다.
동시에 그녀의 눈처럼 새하얀 피부 위로 싸늘한 오한이 스며들었다.
당사자가 되어 보니, 그간의 생활 동안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차례차례 되짚어지며 속내가 보이는 듯 했다.
유리엘과 유페미아의 그 의미가 없을 만큼 추잡하면서도 피곤한 기싸움이 이해 되었고.
더욱 무서운 건, 그것은 빙산의 일각이며.
그녀들 또한 자신처럼, 이토록 추악한 감정을 꾹꾹 숨기고 있을 거라는 것이다.
‘정녕, 나는……’
그러한 여인들을 설득해야만 하는 것인가.
다른 의미로의 두려움이 그녀를 엄습한 채, 밑도 끝도 없이 자신감을 줄여 나가자……
라우라는 근처에 놓인 토끼 인형을 황급히 품안으로 꼬옥 끌어 안았다.
그러자 아주 조금은 안정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아주 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