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 리엘 레이나 로젠베르크.
라우라의 어머니인 그녀를 마주보며 페르젠은 정돈을 끝마친 소매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목적쯤이야 어렵지 않게 예상이 간다.
만월의 괴벽을 앓고 있는 라우라로서는 그 저주를 자신에게 케어받기 위해 좋든 싫든 전쟁에 참가를 해야 상황.
그러기 싫다면 자신의 비밀을 털어 놓을수밖에 없겠으나, 그럤다가는 클로디아 가문을 뒤이어 로젠베르크 가문도 전부 숙청을 당하리라.
그러니 라우라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자신의 부모님을 설득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변명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니 굳이 직접 찾아와 대답을 요구하는 것을 보아하면 그조차도 짐작이 간다.
‘……글렀나 보군.’
자신이 라우라 본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그러한 착각을 그녀의 모친과 부친이 품고 있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눈썰미가 좋은 페르젠이기에 오히려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게 이상했다.
그렇기에 페르젠은 그 오해를 풀수 있게끔 해두라고 과거에 명확한 언질을 주었는데.
작금의 상황을 보고 있자하니 그러지 못한 것 같았고, 내던진 변명은 오히려 그 풀리지 않은 오해의 연장선으로 보인다.
라우라의 모친인 베로니카의 눈에는, 서로가 전쟁 조차 갈라 놓을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비추어지고 있을까.
움찔!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인 베로니카 뒤에 서있던 라우라는, 페르젠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자그마한 체구를 가늘게 떨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지금 이 상황을 어떤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아마 한치의 오해도 없이 속사정을 말끔히 꿰뚫고 있으리라.
물론, 라우라 입장에서는 다른 변명들을 길게 제시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굳이 빠질 수 있는 전장에 참가하겠다는 것부터, 베로니카 입장에서는 사랑에 눈이 멀어 위험을 감수하려는 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지금 여기에 있는 세 사람 중, 속이 가장 많이 타들어가는 것은 라우라였다.
그와 몸을 섞기는 했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간의 형태에 가까웠고.
서로 정을 나누는 섹스라기 보다는, 짐승의 교미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할진데 페르젠이 과연 이 상황 자체를 부드럽게 수습 해줄까?
첫번째로는 자신을 첩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선언을 해야 할 테고.
두번째로는 사랑을 한다면 어째서 그 여인이 전장에 참가하겠다는데 말리지 않았는지를 해명해야 할 것이다.
솔직히 그러한 과정을 거치기 보다는, 제노바 백작가와 관련된 사실을 입밖으로 끄집어내어 찍어 누르는 것이 훨씬 편하리라.
그간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단순한 주인과 노예에 가까운 상하관계 보다는 더 나은 연(緣)이 있다고는 생각하나……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 상황을 감싸줄 만큼 깊은 관계라고 생각 되지는 않는다.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부인.”
“좋습니다. 백작.”
기나긴 침묵을 깨트리는 페르젠의 한 마디에, 라우라의 어머니는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먼저 정원을 벗어나 응접실로 향했다.
자신의 딸인 라우라를 매정히 내버려두고 홀로 걸음을 옮기는 것은 얼핏보면 작금의 상황에 많이 화가 난 것으로 보이나, 실상은 자신을 설득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된 답을 서로가 상의하여 가져오라고 언질을 주는 것이다.
페르젠도.
라우라도.
그것을 알았기에, 베로니카를 뒤따라 자리를 비워주는 림벨을 보고서 다시 한 번 침묵을 삼킨다.
“……”
페르젠 입장에서는, 솔직히 그저 머리만이 아팠다.
이런 상황을 만들기 싫었기에 그녀에게 오해를 풀어 두라고 명백한 언질을 주었는데.
“……”
라우라 또한, 페르젠에게 얼마나 짐이 되는 상황인지 알고 있기에 그를 쳐다보기는커녕 자신의 발등만을 응시할 뿐이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입을 꾹 닫고 있는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겠지.
“괘, 괜찮아요……”
“무엇이.”
“펴, 편하신…… 바, 방향으로……”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알고 있느냐.”
“……”
“반역의 핏줄인 제노바 백작가의 여인을 잡아 들여 너를 낳은 아비와, 너를 자신의 딸이라 믿고 길러온 어머니는 그 순간부터 평행선을 걷게 될 것이다. 듣기로는 금슬이 무척이나 좋다고 들었는데, 내가 이 사실을 들먹여 지금 상황을 해결하려 한다면 그 모든 것이 처참히 무너지겠지.”
페르젠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점이 분명 있었으나, 라우라는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아무렴 자신이 환생을 통해 영혼에 새겨진 저주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가 믿어 줄까.
그러나 전생 보다는 짧지만, 이번 생의 삶 동안 자신에게 수많은 애정을 선물해주었던 부모님과의 추억이 뇌리를 스치고지나가자……
그들이라면 틀림없이, 아무리 허항된 말일지라도 자신의 진심을 믿어줄 것 같았다.
페르젠 입장에서는 이 사실이 얼토당토 없을 테니, 저 그림대로 일을 진행하도록 놓아두고.
차후, 자신의 부모님에게만 해당 사실을 고백하면 되는 것이리라.
“어, 어, 어차피…… 이, 일평생을…… 배, 백작님 겨, 곁에…… 묶여 이, 있을 수는 어, 없잖아요……”
물론, 이 영혼에 새겨진 저주를 극복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섰을 때는 그의 첩이 되어 영원히 관리 받으며 살아간다는 선택지도 염려해 두고 있었으나……
곧 전쟁이 시작되려는 판국이고.
유리엘은 아이를 가지지도 못했다.
그가 자신을 첩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돌아가는 상황이 녹록치가 않은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포기하고, 자생할 준비를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아니, 사실은 나빴다.
자신의 부모님이 정말 이 사실을 믿어주기는 할련지부터.
설령 믿어준다고 해도, 페르젠의 도움없이 안전히 자신의 괴벽을 케어할 수 있을지.
나아가 안전하게 케어한다고 해도, 이 비밀이 새어나가지는 않으련지.
……차라리, 이번생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나을까.
그런 생각이 들만큼 라우라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철면피를 깔고 그에게 애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감내해달라고.
……하지만 라우라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페르젠은, 이것을 목줄 삼아 로젠베르크를 장기말 삼는 대가로 지금까지 그 사실을 함구해왔다.
그러나 그가 로젠베르크를 통해 이득을 본 것이 과연 있기는 할까.
이미 황위 쟁탈전은 끝이나버렸고, 오히려 자신이 그의 곁에 오랜 시간 머무른 덕에 로젠베르크가 반사적 이익을 봤다면 봤을 터.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
적어도 그는 자신의 목에 목줄을 채운 시점에서부터 감내 해야하는 책임을 온전히 짊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상은 그가 짊어져야 하는 책임 외의 영역이니, 라우라는 구차하게 구걸 하려 들지 않았다.
자존심을 내세운다기 보다는, 라우라 나름대로 지금까지 자신을 보살펴준 페르젠을 향한 배려라고 할 수 있으리라.
“……”
그리고 라우라의 그 말을 들은 페르젠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을 정원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 때도 그랬지만, 라우라를 보고 있을 때면 이상하리만큼 불쾌한 동질감이 피어오른다.
이것은 거시적 의미에서는 동족 혐오일 것이고.
미시적 의미에서는 자기 혐오이겠지.
그녀가 앓고 있는 저주는, 자신에게 새겨진 지독한 강박 장애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일까.
그것을 극복하고자 발버둥 치는 것이나, 좌절을 머금고 비참한 타협안을 끌어 안고 있는 것이나……
그 모든 것이 이미 지나간 자신의 과거를 똑같이 답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생각해보자면 그녀가 앞으로 겪을 일 또한 일종의 미래시가 정해져 있지 않나.
죽음으로 그 굴레를 끊으려 하지 않는다면 현재 자신의 삶을 살게 될 것이고.
죽음으로 그 굴레를 끊어 버리자고 한다면 이사벨 론 피에르 제노바의 삶을 살게 되겠지.
이미 두 명의 사람이 한 번 뿐인 자신의 인생을 토대로 증명해낸 것이니, 어느 쪽이든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리라.
다만, 그렇다면 정말 자신 같은 사람들은 한 점의 불행으로도 얼룩지지 않은 행복을 추구할 수 없는 걸까.
“라우라.”
“……”
“라우라 드 샤를 로젠베르크.”
“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페르젠의 목소리에 라우라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그런 그녀로부터, 페르젠은 지독한 강박 장애에 시달리던 과거 자신의 모습이 겹쳐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네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고 있지 않다.”
“……”
“아마 앞으로도 너를 한 명의 여인으로 보기에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지.”
“……”
“또한, 만월의 괴벽은 혈통의 유전이니 너는 불임을 표방해야 할 것이다.”
시대적 문화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인이라는 건 상상이상의 비참한 꼬리표였다.
더불어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하여 화목한 가정을 가진다는 것 또한 포기를 해야하니, 그녀 입장에서는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선뜻 결론을 내리기 어려울 터.
하지만 라우라가 그 모든 것을 감내하겠다고 말을 한다면, 페르젠은 그녀가 현재 품고 있는 것들이 무너지지 않게끔 손을 뻗어 주기로 했다.
“어, 어째서……”
그러나 라우라는 그 거부할 수가 없는 달콤한 제안을 선뜻 받아 들이지 못하고 망설임을 머금었다.
왜냐하면 이럼으로써 페르젠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란 하나도 존재하지가 않았기에.
“……”
그리고 라우라의 그 물음은, 자연스레 페르젠이 자기 자신에게 건네는 자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페르젠은 라우라의 물음에 곧장 대답을 해주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자신이 그녀에게 손을 빌려주는 이유, 그것에 명확한 동기가 있다고 한다면 아마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으리라.
이사벨 론 피에르 제노바도.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도 걷지 못했던……
두 사람을 비추는 또 다른 거울인 그녀가 이상향에 가까운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겠지.
거울 속에 비추어진 자신과의 가위 바위 보는 항상 똑같은 결과를 제시하나, 그 결과가 달라질 수만 있다면.
적어도 유페미아와 유리엘에게 자신이 감추고 있던 추악한 이면을 고백해야 할 때, 조금은 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머잖아 태어날 아이에게도 언제 강박증이 발작할지 몰라 전전 긍긍하기 보다는, 이겨내고 품안에 안아 사랑스러운 얼굴을 두 눈으로 똑바로 마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게 말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
“그 이유를 내 곁에서 찾는 것도, 네게 있어서는 나쁘지 않은 소소한 삶의 의미가 되겠지.”
이사벨과 페르젠이라는 사내의 인생은 라우라에게 있어서 좋은 반면교사가 되어주리라.
그러니 그 둘이 겪은 시행착오를 발판 삼아 그녀가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페르젠 입장에서는 뒤쫓기 더 할 나위 없는 발자취가 마련 되는 것이다.
물론, 그녀가 걷는 길을 페르젠이 따라 걷는다고 해서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이것은 일종의 자기만족이고, 대리만족이라 할 수도 있을 터.
그러나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흉측한 몰골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거울 속에 비추어진 자신을 바라 볼 수 없듯.
페르젠 자신과 이사벨 또한 그러했기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마주본다는──지금까지 떼지 못했던 그 첫걸음을 내딛을 수만 있어도 많은 것이 달라지리라.
“라우라 드 샤를 로젠베르크.”
“……”
“어쩌겠느냐.”
물음과 함께, 그의 오른손이 자신 앞으로 내밀어진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한다는 선택지조차 떠올리지 않는 자신의 속마음에, 라우라는 옅은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어찌하여 자신은 이리도 약해진 것인지.
본인 인생의 선택지조차 스스로가 제시하지 못하고, 남이 제시해준다는 것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서글펐으나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인간의 손에 길러지며 야생성이 거세된 짐승을 자연에 풀어줘봤자 적응 하지 못하고 죽어버리듯.
유례없는 재능의 원소 마법사이자, 가문의 비극을 자신의 손으로 끊어버린 결단력 있던 이사벨이라는 여인은……
벌써 한 사내에게 종속되어 길러지는 것이 더욱 편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 이것은 안도라 봐도 좋겠지.
어쩌면 전생의 자신이 그의 손에 들어간 것도 그래서일까.
스륵.
곧이어 결론을 내린 라우라가 내밀어진 페르젠의 손을 조심스레 마주 잡았다.
“……”
분명, 맨정신으로 그의 신체와 접촉한 적은 거의 존재하지가 않는데.
이 크고 따스한 손은 왜 이리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아마 만월의 괴벽에 잠식당하는 동안 수없이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었던 그의 촉감을 본능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에 무의식적으로 라우라는 키우는 애완동물이 주인의 몸에 얼굴을 비비며 애정을 표현하듯, 자신의 손을 움직여 비스듬하게 깍지를 꼈다.
“아……”
그리고 뒤늦게 그것을 깨닫고, 라우라는 황급히 손을 내빼려 했으나……
“가지.”
그대로 자신의 손을 꾸욱 붙잡는 페르젠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라우라.”
“네, 네……”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것.”
“네……?”
“그것을 백야(白夜)라는 현상의 정의라 부른다.”
움찔!
라우라가 자신의 몸을 옅게 떨었다.
그의 입에서 해당 단어를 듣게 될지도 몰랐거니와, 단순히 저자의 경험담만이 적힌 그 현상의 정의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것 또한 신기했기 때문이다.
“북쪽과 남쪽에 위치한 극점. 그곳에 도달하면 네 두 눈으로 백야라는 현상을 마주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가 임의로 설정하지 않은 것은, 본래의 상식을 기반으로 창조된 세계이니.
이서진의 기억에 새겨진 지식과 별다른 점이 없을 터.
“전쟁이 끝나면, 그곳을 찾아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겠지.”
“……”
“발악하는 것은 결코 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포기하기를 잘했다고,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더욱 추한 것이리라.
“언젠가 네 스스로에게, 포기 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니 여명이 떠오르지 않는 밤이 가로 막은 오늘을 헤치고, 당당히 내일을 맞이하는 것을 보여다오.
그렇게 자신의 속내는 숨긴 채, 말을 마친 페르젠이 침묵을 유지하자 라우라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잔인한 꼬마구나.’
서로의 피를 섞어 낳은 아이는 동일한 괴벽을 앓으니, 자신은 그의 씨를 품어 줄 수가 없다.
때문에 그가 자신을 여인으로 볼 수 없다는, 사랑할 수 없다는 그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면.
‘적어도 내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지는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분명, 그는 라우라 드 샤를 로젠베르크라는 소녀를 여인으로 대한 적이 한 번도 존재하지가 않는데.
……지금 그의 곁에 서있는 소녀는, 어느때 보다도 미숙한 껍질을 벗고 어엿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