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하게 동이 터오르는 이른 새벽.
유페미아는 조심스레 침대에 걸터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금방 돌아오겠다고 했던 페르젠이 자리를 비운지 4일 차.
아무것도 모르는, 아니 알고 싶어도 일부러 알려 하지 않았던 유페미아 조차도.
떠들썩한 수도에 조금씩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만약……’
아니, 이제는 만약이라는 가정 조차도 의미가 없으리라.
전쟁이 터진다면 페르젠은 틀림없이 자신의 곁에 있어 주지 않겠지.
브뤼테인의 혈통이며, 아폴리온 등급의 흑마법사이니 징출 되지 않는 게 이상한 것이다.
그는 분명 재능이 있고, 능력이 뛰어난 사내이기에 죽을 가능성은 낮다고 열심히 뇌리에 되새겨 보지만……
전쟁에서 맞이하는 죽음에 공식 같은 게 있을리가 없었다.
이미 모든 삶의 의미가 그의 아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그것이 무너져 내린다면, 자신에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
가리킬 시간이 없는 시계 바늘에는 틀림없이 어떠한 존재 의미도 남지 않겠지.
“……”
물론, 자신에게는 태내에 자라나고 있는 아이의 엄마라는 새로운 삶의 의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페르젠이 죽었을 때 느낄 공허함을 온전히 덮을 수 있는 것인지, 단순히 ‘상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유페미아는 저울의 천칭이 요동치는 걸 알아차렸다.
그에 유페미아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부풀어 오른 배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나는……”
정말, 못난 어머니구나.
하지만 그런 못난 어머니라도 따뜻하게 보듬어 주겠다는 듯, 태양은 완연한 아침을 피어 올리며 찬란한 햇살을 유페미아에게 흩뿌린다.
딸칵.
동시에 적적한 침실의 문이 열리며……
또각.
피로한 기색이 가득한 페르젠이 안으로 들어섰다.
“아……”
“다녀왔다…… 유페미아.”
고개를 돌리는 유페미아가 황급히 자신의 아랫배를 감싸 안으며 몸을 일으킨다.
흠칫……!
하지만 페르젠에게 가까이 다가서기 무섭게 풍겨오는 짙은 연초 냄새에, 유페미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이것은 연초 냄새가 싫다는 것 이전에, 태내에 아이를 품고 있는 어머니로서의 모성이 내세우는 방어기제.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페르젠은 자신의 미숙함에 쓰게 웃었다.
목욕이라도 하고 왔어야 했을 텐데, 그것조차 고려하지 못한 것을 보면 새삼스레 무척이나 경황이 없었구나 싶다.
“미안하구나.”
“……”
“너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어울리지 않게,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페르젠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자 유페미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 거리를 순식간에 좁혀 품안으로 안겨 들었다.
그의 체취에 뒤섞인 연초 냄새를 몸이 극도록 거부하지만……
어째서일까.
유페미아는 그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괜찮아요.”
“……”
“오히려 당신에게 잔소리 할 수 있어서 기쁜 걸.”
고작 약속 한 번으로 지금까지 완벽히 연초를 끊었던 페르젠이 대단한 것이리라.
솔직히 자신이 없는 곳에서, 또는 일을 하며 몰래 피우다 걸리는 모습을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런 인간미 따위는 조금도 보여주지 않는 완벽함을 유지해왔다.
그래서일까.
유페미아는 이런 식으로 한번쯤 약속을 어기는 그의 모습에 오히려 애정이라는 감정이 더욱 깊어지는 걸 느낀다.
“욕실로…… 갈까요?”
“괜찮겠느냐.”
“응.”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솔직히 그의 면전에다 대고 전쟁에 나서지 말고, 자신의 곁에 있어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유페미아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이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테니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으로서는.
이 정도가 전장에 나가는 남편을 배려할 수 있는 최선인 것이다.
그렇게 따스한 물이 데워진 욕조에 함께 들어간 유페미아는 페르젠의 품에 안긴 채 그의 두 손을 자신의 배로 가져다댔다.
그리고는 현재 제국의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상적인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그래, 마치 전쟁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거짓말인것처럼.
유페미아는 페르젠에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잔잔한 일상을 그려주었다.
“……”
페르젠 또한 그것을 진작 눈치를 챘으나, 알고 있으면서도.
이 잔잔한 일상이 가져다주는 안락함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런 것에 취할 여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자신의 정신으로 스며드는 평온함은 모든 고뇌를 가라앉힌 채 포근한 수면에 잠기게 해주었다.
그렇게 고른 숨을 내쉬는 페르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페미아는, 그의 가슴팍에 조용히 얼굴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내 곁으로…… 꼭, 돌아와줘야해요……’
아직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이유조차 듣지 못했지 않은가.
그러니 그 이유를, 영원한 비밀로 남긴 채 사라지지 말아 달라고.
유페미아는 페르젠의 손을 마주 잡으며 애원했다.
* * * * *
“……”
무겁게 내려가있던 페르젠의 두 눈이 떠진다.
그러자 그를 반기는 건 정오의 화사한 햇살이 아니라, 다 저물어가는 오후의 붉은 노을.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잠들어 있었던 건지, 육체가 찌뿌둥함을 호소한다.
하지만 정신만큼은 복잡했던 상념이 말끔하게 가라앉은 것 같아 비교적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스륵.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자신의 왼팔을 꼬옥 붙잡은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유페미아가 보인다.
분명, 황궁에서도 유리엘과 비슷한 경험을 했던 걸로 아는데.
‘그래……’
피식 웃다가도, 유리엘에게는 따로 해야할 말이 있었기에.
페르젠은 조심스레 자신의 왼팔을 빼내고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는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 유페미아가 깨어나지 않게끔 문을 닫고 복도로 나선다.
직후, 홀로 나아가자 페르젠은 시녀들을 지휘하고 있는 유리엘을 볼 수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이 저택은 무척이나 오랜 시간 비워지게 될 테니, 그 전에 정리를 하고 있는 것이리라.
“유리엘.”
“아……”
그런 그녀를 낮은 목소리로 부르자, 용케도 들은 그녀가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돌린다.
“일어…… 났어?”
“잠시 자리를 옮기지 않겠나. 네게 할 말이 있다.”
조금 머뭇 거리던 유리엘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 나아가는 자신을 얌전히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저택의 뒤뜰로 나온 페르젠은 유페미아가 자신 나름대로 열심히 가꾸어 놓은 정원을 조용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곧, 전쟁이 시작 될 것이다.”
“……할아버지의 시종에게 전해 들었어.”
“그런가.”
“응.”
전해 들은 것은 그것 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이 있었지만, 유리엘은 일부러 그것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더는 뒤바꿀 수 없이 정해진 결과에 구구절절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 봤자 하등 의미가 없을 테니.
“당신 답지 않게…… 너무 뜸들이네.”
“……”
“나라고 전쟁이 무섭지 않은 건 아니야. 그래도 그 때…… 당신이 당신 입으로 말했었잖아.”
“……”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건, 다름 아닌 자신의 곁이라고.”
유리엘 웨인 데이나 알프레드.
어린 나이에 유클리드 등급의 원소 마법사가 된 여인.
그 재능에 감히 의심을 품을 자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국운이 걸린 전쟁에 그녀를 징출 하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일 터.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괜찮아.”
말과 다르게, 시신은 지치지 않는다.
때문에 흑마법사는 그 특징상 물자를 보급하는 후방 부대에 상당히 적합한 인재이기도 했지만.
무수한 시신이 쌓여나갈 최전방이야 말로, 흑마법사의 진정한 위용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정말 등급이 낮고, 동시에 인맥이 뛰어난 자들에 한해서만 흑마법사는 후방으로 배치 된다.
그러니 아폴리온 등급의 페르젠의 경우, 특히나 그가 브뤼테인의 혈통인 걸 고려한다면 후방으로 물러날 가능성은 현저히 적겠지.
‘……차라리, 다행이야.’
막대한 화력을 쏟아내는 원소 마법사 또한 대부분 황실 마도 병단에 소속 되어 전방으로 차출되니……
위험하더라도, 페르젠과 항상 같은 공간에 있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유리엘.”
그러나 페르젠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한 마디를 건넸다.
“너는, 후방 보급 부대로 차출되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 결정에 이견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유리엘 본인이라 하더라도.
“……”
“무슨, 소리야…… 왜…… 내가?”
당황하는 유리엘이 목소리를 떨며 의문을 제기해보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분명 그가 손을 써서, 자신을 후방으로 배치 시켰다는 걸.
“웃기지 마…… 웃기지 마……!”
그에 목소리를 높이는 유리엘이 치맛단을 거세게 말아 쥐었다.
화르륵!
동시에 유클리드 등급의 원소 마법사가 어떠한지 확실히 보여주겠다는 듯, 대규모의 불꽃 장막을 하늘 위로 펼쳐 낸다.
보유하고 있는 마력을 무식하게 때려 박은 마법의 구현이기에, 그 장막의 크기는 저택의 하늘을 덮고도 남을 만큼 거대했다.
“나를…… 나를 과소평가하지마!”
“……”
“당신의 품에 안겨 교태를 부리고 아양을 떤다고 해서……! 그딴 배려를 받을 만큼 나약하지 않아……!”
그러니 당신의 아내로서의 유리엘이 아니라.
원소 마법사로서의 유리엘을 직시 하라고!
그렇게 말을 이으며, 그녀는 흥분이 가득 들어찬 숨을 몰아 내쉬었다.
“봤잖아……!”
아니, 잠깐이나마 숨을 돌리고 싶어도.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봤잖아! 전장에서 당신이 죽으면…… 당신의 아이를 가지지 못한 내가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을 것 같아……? 그러니 이러지 마. 자신의 곁이 제일 안전하다고,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주겠다고 단언하던 그 남자는 어디로 간거야? 전장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처럼, 사랑하는 아내조차 지켜줄 수 없다는 것처럼! 나 뿐만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까지 과소평가 하며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마……”
기나긴 말을 이어 나가던 유리엘은, 끝으로 울음 섞인 목소리를 토해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르젠은, 줄곧 닫고 있던 입을 열어 말했다.
“……너를, 그리고 나를 과소 평가하는 것이 아니다. 유리엘.”
“그러면 왜!”
흔히들 전쟁을 체스에 비유하고는 하지만, 정말 전쟁을 체스에 비유한다면 그 규칙부터 모조리 바뀌게 되리라.
일반 병사에 불과한 폰(Pawn)이 잡을 수 있는 건, 오직 동일한 폰 뿐일테고.
나이트, 비숍 등은…… 주어지는 상황에 따라 한 번에 수많은 장기말들을 먹어치울 수 있겠지.
그러니 서로가 가지고 있는 가장 최고의 수는, 언제나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수를 잡기 위해 올 것이다.
그래, 그것에 비추어 대입한다면.
그레모리 엘딘 이슈타르 엘마르크와 마주할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되겠지.
자신의 곁이야 말로, 전장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페르젠은, 유리엘을 신경쓰지 않고 싸움을 이어 나갈 자신이 없었다.
물론, 그녀는 실제로 나약하지 않기에.
혹여나 눈먼 화살에 맞아 죽는 건 아닐지.
상대방의 마법에 휩쓸려 버리는 건 아닐지.
그레모리 엘딘 이슈타르 엘마르크가, 자신 보다 그녀를 먼저 목표로 삼는 건 아닐지.
이런 걱정은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듣기 좋은 거짓말로 포장하여 얼마든지 겉치레를 이어 나갈 수도 있으나……
자신은 분명, 그 모든 변수들을 신경 쓰고 말겠지.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유리엘이라는 여인의 생존에만 집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네가 있음으로서…… 오히려 나는 한없이 나약해질 것이다. 유리엘.”
너를 잃는 것이 두렵기에.
“너라는 존재는 전장에서 내게 도움이 된다기 보다는, 무거운 짐이 되겠지.”
어쩌면 이기적이고, 잔혹한 고백일지도 몰랐으나.
페르젠은 자기 자신도 신기하리만큼, 덤덤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분명…… 아내로서의 너를 보지 말고, 원소 마법사로서의 너를 보라고 했었느냐.”
그 말 그대로.
유리엘.
유리엘 웨인 데이나 루에르그.
“브뤼테인의 적자이자, 아폴리온 등급의 흑마법사인 페르젠이 아니라…… 네 남편으로서의 나를 봐다오.”
“……”
“네 남편으로서의 나는…… 네 생각보다 강하지 않다.”
“……”
“너를 잃을까봐 그 두려움에 벌벌 떠는, 한없이 나약한 겁쟁이일 뿐이다.”
그러니 그 겁쟁이의 비겁함 정도는, 부디 눈감아 주지 않겠냐고.
그래, 페르젠은 처음으로 유리엘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그와 맺어진 이후로, 가장 진솔한 그의 속내를 듣게 된 유리엘은……
저벅.
한걸음, 한걸음 그의 앞으로 다가가 여린 팔로 가슴을 내리쳤다.
“비겁해……! 비겁해……! 비겁해……!”
“……”
이런 말을 듣게 되었는데.
어찌 더 고집을 부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지 조차 못하게 퇴로를 막은 페르젠이, 유리엘은 그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치사하다고……! 페르젠! 페르젠 폰 슈바이크 루에르그……!”
눈물을 쏟아내는 유리엘이 페르젠의 옷깃을 움켜쥐고 어깨를 떤다.
그에 페르젠은 아무런 말없이 그런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 안아주었다.
처음에는 그것에 저항하듯 거칠게 몸부림을 치는 유리엘이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그저 애처로운 울음 소리만을 내뱉는 여인만이 남게 된다.
그리고 그 흐느낌을 달래주려는 듯, 페르젠은 손을 뻗어 유리엘의 기나긴 흑발을 쓸어내렸다.
언제부터인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제약을 걸게 된 그녀들을 볼 때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들이 밀려드나……
적어도, 하나 확실한 건.
페르젠은 이리도 겁쟁이가 된 자신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