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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77화 (177/260)

덜컥!

어두컴컴한 황궁의 지하 감옥을 비추는 밝은 빛들이 퍼져 나가고, 안으로 들어선 근위병들이 각기 안에서 반역자들을 끄집어낸다.

질병으로 죄인들이 처형일 이전에 죽는것만큼 우스운 일이 없었기에, 기본적인 위생을 신경 써주기는 했어도……

역시, 꾀죄죄하고 푸석푸석해진 몰골로 끌려 나오는 리지와 세자르의 모습은 길바닥에 나앉은 거지들 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추레했다.

“오, 빠……”

그리고 리지는 오랜만에 보는 세자르의 모습에 차마 울컥 치미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심하게 목이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시간 감각이 완전히 마비 되어버릴 만큼 오랜 시간 갇혀 있던 감옥 생활 동안 터득한 것이라고는,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체념 뿐이었는데.

정작 처형장으로 자신들을 끌고 가려는 이들을 보고 있으니, 겉으로 체념 당했던 감정들이 순식간에 터져 나오려는 걸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짜악!

“아악……!”

그러나 감정에 파묻혀 한참을 머뭇거리는 리지의 모습에, 그녀를 데려가려던 근위병은 차갑게 식은 얼굴로 홀쭉해진 뺨을 거세게 후려쳤다.

클로디아 가문에서 가져온 자료에 대한 검수 내용이 근위병들에게까지 알려진 것은 아니었기에, 그들 입장에서는 전쟁을 일으켜 자신들을 사지로 내몰게 만든 리지의 저 모습이 너무나도 가증스럽고 역겨울 뿐이었다.

오러 나이트와 마도사들이 판치는 전장 가운데, 창과 칼을 쥐어든 자신들이 활약을 한다면 얼마나 활약을 할 것이고.

또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면 얼마나 높다고 할 수 있으리.

“리지…… 컥!”

그리고 한 근위병으로 인한 그 분노가 전염되듯 퍼져 나가자, 다른 근위병들 또한 세자르의 명치에 주먹을 꽃아 넣으며 이를 갈았다.

이들을 중재해야 할 가장 고참의 근위병 조차도, 슬며시 감옥의 문을 닫으며 연초 한대를 쥐어 들 뿐이다.

어차피 오늘 처형 당할 죄인들이니, 죽지만 않는 선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건 눈감아 줄만 하지 않겠는가.

오히려 전장에서 비참히 죽어나갈 자신들에 비하면, 단순히 목이 잘려 죽는 저들의 처지가 다른 의미로 더 낫다고도 볼 수 있겠지.

“케흑……! 아……! 아악!”

분노에 잠식 당한 성인 남성들의 폭력이다.

감옥 생활로 인해 더욱 약해진 여인의 몸뚱으로 어찌 그것을 감내할 수 있겠는가.

그만 해달라고 애원하고 싶어도, 그들의 두 눈에 서린 증오를 직시할 때면 리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처형장으로 가기도 전에 이곳에서 죽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비가 없는 그들의 손길과 발길질에 기어코 소변까지 지려버린 리지가 숨을 헐떡이며 구석으로 비참히 기어가보지만, 푸석푸석해진 붉은 머리카락을 붙잡아 다시금 질질 끌고 오는 그들의 무자비함에는 자비가 일절 담겨 있지 않았다.

툭.

그렇게 리지와 세자르를 유리하던 손길과 발길질이 거두어 지는 것은, 가장 고참인 근위병이 피우던 연초를 바닥에 버렸을 때였다.

“끄, 끄흐윽……!”

먼지가 가득 묻어 창백해진 피부에 시퍼런 멍이 들고, 부어오른 한쪽 눈가는 제대로 떠지지가 않는다.

콜록이는 기침에 섞여 나오는 건 선홍색 핏물이었으며, 추운 공기를 물어내는 건 타박상으로 피어오르는 전신의 뜨거운 통증이었다.

그러한 리지의 모습에 순간 동정심이 피어오를 뻔 하기도 했으나, 성년이 된 자신의 아들이 곧 전쟁터로 끌려 가야 한다는 사실이 되새겨지니 금방 사그라든다.

죽은 아들의 시신을 붙잡고 전쟁터에서 울부 짖는 아버지가 될지.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아들이 죽은 아버지의 시신을 붙잡고 울부 짖는 자식이 될지.

“가지. 시간이 되었어.”

몸을 구속하는 쇠사슬들이 차르륵 거리며, 리지와 세자르를 처형장으로 인도한다.

* * * * *

황궁의 지하 감옥, 그 위에 마련된 처형장에는 오늘 많은 이들이 참관해 있었다.

황제와 황비.

황자와 황녀.

알프레드와 브뤼테인을 비롯한 대귀족가의 가주들.

당연하게도 페르젠 또한 서슬퍼런 칼날이 달려 있는 단두대 옆에 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본래는 단두대의 밧줄을 여러 갈래로 나눈 다음 근위병들을 배치시킨 뒤, 신호에 맞추어 칼로 그것을 잘라 단두대를 내려 찍어 누가 자신의 손으로 죽이게 만들었는지 모르게 처형을 집행하는 쪽이었으나……

정작 마지막 순간에 타인의 손을 빌리는 것만큼 우스운 일이 없었기에, 이번 처형의 집도는 온전히 페르젠의 몫이었다.

벌컥!

이윽고 문이 열리며 리지와 세자르가 처형장 안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수많은 눈동자들이 그곳으로 옮겨간다.

“크흠……”

가장 먼저 황제와 황비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몇몇 고위 관료들이 리지와 세자르의 모습을 보고는 마른 기침을 토해냈다.

현재 리지와 세자르의 몰골은 바보가 아니고서야 근위병들이 손을 썼다는 걸 알 터.

하지만 전쟁을 코앞에 둔 근위병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기에, 황제 또한 한숨을 내쉬며 그들의 그릇된 행동을 눈감아주었다.

“반역자, 세자르 폴 드미안 클로디아를 처형대에 올리도록 하여라.”

“예! 폐하!”

리지를 정중앙에 무릎 꿇게 만들고, 세자르를 이끌어 단상으로 올려 보낸 근위병들이 단두대 아래에 그의 목을 얹힌다.

그러자 2m 위에서 느껴지는 서슬퍼런 칼날의 기운에 세자르는 순간적으로 뒷목이 아려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이 죽음을 예전부터 어렴풋하게 인지해두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도 인간이니 어찌 두렵지 않을 수가 있으랴.

하지만 오른팔을 비롯해 얼굴 신경 전체를 뒤덮은 마비 장애는, 추하게 겁에 질린 표정을 페르젠에게 비추지 않도록 도와준다.

“여기 있습니다.”

이내 뒤로 물러나는 근위병에게 검을 넘겨 받은 페르젠은 잘 관리된 예리한 칼날을 확인하고서 입을 열었다.

“세자르 폴 드미안 클로디아.”

“……”

“오베른 왕국과 결탁하여 로벨리움 왕국 내에서 황족을 시해하려 한 반역죄를 물어, 11월 13일──그대를 사형에 처한다.”

“……”

“앞으로 클로디아라는 이름은 그 누구도 성으로 하사 받을 수 없을 것이며, 그대들의 시신은 이승에 묻힐 길 없이 새들의 먹이가 되리라.”

형식적인 관례를 따라 대사를 마치고, 페르젠은 단두대의 칼날에 연결된 밧줄 쪽으로 검을 가까이 가져다댔다.

“남길 말이라도 있는가.”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

“……”

“아무리 강대하고 찬란했던 국가라도, 쇠퇴의 길을 걸어 멸망이라는 역사를 반복했다.”

그러니 언젠가 그 순리를 따라 에르네스 제국이 멸망하는 날이 찾아 온다면.

“그 이유는 틀림없이 브뤼테인 때문일 것이다.”

곪아 터지기 직전의 고름이 있다면 빠르게 제거해야하는 것이 옳을 터인데.

그것이 제 살을 좀먹는지도 모르고 영광인 것처럼 보듬고 있으니 어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나라는 근본 부터가 잘못 되었다.”

황실은 국가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야 하는 것이거늘.

정작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 땅은 브뤼테인이지 않은가.

“지겨운 말이군.”

“……”

“정작 황실이 겪는 불합리함에 한번이라도 손을 뻗어 본 적은 있느냐.’

세상이 돌아가는 순리는 결국 부조리함과 불합리함으로 점칠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자신이 직접 겪고 나서야, 비로소 본인의 이기적인 욕망을 담은 평등을 주장한다.

“구차한 양비론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나.”

피장파장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어도, 애당초 악당만큼 양비론을 주장하는 것에 어울리는 인물이 있을까.

때문에 페르젠은 무심하게 그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할 말은 그것으로 마쳤나. 아니면 진부하게 신이라도 원망 할 텐가.”

“애당초 믿지도 않은 것을 원망할까.”

명백히 신이 존재하는 세계여도, 세자르는 그들을 정말 신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전지전능하다고 일컫어지는 그들의 손에 창조된 세계라면, 어떻게 악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었으리.

아니면 악을 없앨 의지는 있는데, 그럴 능력이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신은 전능 한 것이 아니다.

아니면 악을 없앨 능력은 있는데, 의지가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신은 악한 것이다.

그것 조차 아니고, 악을 없앨 능력도 의지도 없다면.

어째서 그들을 전지전능한 신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때문에 세자르는 신을 믿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다.

“페르젠.”

“……”

“언젠가 네놈이 죽음을 맞이 하는 날…… 그 모든 업보가 최후를 되비추는 거울이 되기를 바라겠다.”

자식과 아내.

가족과 가신들에게 외면 받아 비참하고 쓸쓸하게 죽어가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울리는 마지막일 터.

“일궈놓은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부정 당하기를 염원 하겠다.”

사실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가문을 짓밟고 유린하며 처절하게 망가져 가는 과정을 보고서 음흉하게 이면에 숨기고 있던 욕망을 충족시켜 왔을 그라면.

자신들이 없어진 이후, 틀림없이 제 2의 클로디아 가문을 찾아 나서리라.

진실은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지는 날이 있나니.

“윤회의 끝에서도…… 나는 네 놈을 잊지 않을 것이다.”

“……”

세자르의 마지막 그 말을 묵묵히 들어주고서, 페르젠은 고개를 올려 단두대의 칼날에 연결된 밧줄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내 인생이 끝나는 날, 내가 살아왔던 날들이 나쁘지는 않았다고 말해 줄 사람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이 되는 게 아닌가.

유리엘.

유페미아.

제레미아.

엘리자베스 황녀.

자신의 임종을 지켜 줄 사람은 얼마든지 곁에 있으니, 세자르의 한맺힌 그 저주로부터 페르젠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고 쥐어든 검에 살포시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중앙에 무릎을 꿇은 채,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리지를 내려다 보고서는 망설임없이 검을 내지른다.

우지끈!

그러자 억센 밧줄이 단숨에 잘려나가더니, 2m 위에 매달려 있던 서슬퍼런 칼날이 바닥으로 순식간에 치닫고……

쿠웅!

촤악!

묵직한 소음과 함께, 세자르 폴 드미안 클로디아의 목을 깔끔하게 양단한다.

“……”

그 과정에서 자신의 얼굴과 옷자락에 튀는 대량의 피를 맞이하며, 페르젠은 검을 휘둘렀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어느새, 이러한 악행에 조금씩 무뎌져 가는 자신을 아주 똑똑히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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