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76화 (176/260)

“좋구나.”

그레모리 엘딘 이슈타르 엘마르크.

그녀는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하며, 자신의 애검을 빼내어 들었다.

너머의 회랑을 건너 자신이 있는 대전으로 모여드는 귀족들을 보고 있으니, 벌써부터 오랜시간 잠잠했던 심장이 거칠게 뛰는 것이 느껴지는 듯 했다.

벌컥!

그렇게 잠시 뒤, 대전의 문이 열리며 하나둘 빈자리에 착석하는 귀족들을 보고서 그레모리는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다.

“프리기아 후작.”

“예. 말씀하십시오. 전하.”

“에르네스 제국에서 선전포고를 해왔느냐.”

“아직입니다. 아마도 급격한 시장 변동을 고려해 최대한 정보를 억제하고 있겠지요.”

“이렇게 까지 귀찮은 계단을 밟아, 시발점을 오베른 왕국으로 해놓았으니 본녀가 전쟁에 미친년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겠구나.”

“어차피 승리한 자는 진실을 추궁당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들이 말하는 생각이란 오직 다른 사람이 한말을 반복해서 내뱉는 것에 불과할 뿐이지요. 진실에 귀닫는 에르네스 제국으로 인해 자신들은 강제로 전쟁에 떠밀렸다고 증오를 품은 채 기꺼이 창과 칼을 겨눌것입니다.”

“그 놈의 세치혀는 질리지도 않고 그럴싸한 말을 내뱉는구나.”

“하하.”

모든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을 폄하하는 듯한 말을 들어도, 프리기아 후작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보였다.

“승리한다면 저는 아마 엘마르크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남을 것이고, 패배한다면 가장 악랄한 범죄자가 되겠지요.”

“보통 악랄한 범죄자로 남지는 않을 텐데.”

“알고 있습니다.”

저질렀던 추악한 짓과 뒤틀린 성벽이 만천하에 드러난다면, 다른 의미로 엄청난 악명을 품게 되겠지.

하지만 그리도 어둠이 짙은 만큼, 조금만 빛을 둘러도 찬란해지는 법이다.

만약 별이 아침 하늘에 떠올랐다면, 그 누가 아름답다는 감상을 품었으리.

이윽고 턱을 괸 채 오만하게 좌중을 훑어 보던 그레모리가 몸을 일으켜 중앙으로 나아간다.

“그대들은 전쟁이 두려운가.”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

당장 출진을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그들의 목소라에 그레모리는 피식 웃었다.

입과는 다르게,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려 할 때면 어찌 그리도 황급히 고개를 돌려버리는 건지.

“예로부터 사람의 눈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라고도 하더구나.”

“……”

“두려워 하는 걸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고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항상 두려움을 머금어 왔으니, 그대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일 터.”

콰악!

단순한 완력으로 검을 단단한 바닥에 내리 꽂으며, 그레모리는 자신의 푸른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긴 채 입가를 혀로 핥았다.

“그러니 본녀가 알려주도록 하마. 적을 정복하고, 눈앞에서 달아나는 그들을 뒤쫓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그들이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품안에 끌어 안아 눈물로 얼룩진 바다를 이루게 만드는 것이 가장 커다란 행복이라는 걸.”

꿀꺽……!

잔잔한 목소리로 응축된 광기를 전달하는 그레모리의 한 마디는, 사람의 뇌리를 뒤흔드는 묘한 마성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에르네스 제국의 황녀와, 각 가문의 영애들이 그리도 아름답다고 하던데. 전리품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지 않느냐?”

“그렇…… 지요. 하, 하하하……!”

슬며시 눈치를 보던 귀족들이 음흉하게 웃는다.

아무렴 오러 나이트의 극의에 도달한, 이 시대 최강의 괴물이 자신들의 군주로 군림하고 있는데.

어찌 패배라는 그림이 그려질 수가 있으랴.

그렇게 조금씩 고양되기 시작하는 대전의 분위기를 피부로 느끼며, 그레모리는 바닥에 꽂힌 자신의 검을 다시금 쥐어 들었다.

‘이제는……’

오랜 세월, 허수아비처럼 세워 놓은 자신의 아비를 황좌에서 끌어내릴 시간이었다.

애당초 그녀가 지금까지 황위를 계승 받지 않은 건, 정복하고 올라설 목표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러 나이트의 극의에도 도달했고.

황위 쟁탈전도 싱거리우리 만큼 끝이 나버렸는데.

그 상황에서 황위를 계승 받아 공식적으로 여제가 되면, 몰려오는 무료함을 어찌 견딜수가 있으랴.

그래, 지금까지는 하나 남은 사탕을 아껴먹는 아이처럼 일부러 황위를 넘겨 받지 않았으나……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그녀는 진정으로 우러러 나오는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자. 그러면 성대한 대관식을 치뤄보도록 하자꾸나.”

“예! 전하……!”

아니.

“폐하!”

그렇게 정확히 3일 뒤, 여제(女帝)──그레모리 엘딘 이슈타르 엘마르크는 황제가 되었다.

* * * * *

11월 13일.

이른 새벽까지 홀로 자신의 집무실에 앉아 있던 페르젠은, 몸을 일으켜 목욕을 한 뒤 단정히 옷을 갈아 입었다.

그리고는 새벽 3시에 불과한 시간에, 조용히 저택을 나선다.

그 직후, 거주하고 있던 저택에 하나 둘 불이 켜졌지만 페르젠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오늘은 세자르와 리지의 처형일이니, 어찌 유페미아와 유리엘도 편안히 잠에 들수가 있었으랴.

물론, 완전히 무관한 라우라 만큼은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수면을 취할 수가 있었지만……

전쟁이 확실시 된 상황에서 그녀의 마음도 마냥 편치는 않았다.

선천적으로 허약하고, 여인의 몸이니.

로젠베르크의 배경을 이용하면 징출 되지 않을 수는 있었으나, 그렇게 되면 만월의 괴벽은 어찌 넘겨야 한단 말인가?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그녀도 반쯤 억지에 가까운 의견을 밀어 붙여 자신의 부모와 다툴 준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마도 병단은 무리더라도, 물자를 보급하는 후방 부대에 지원하는 정도라면 괜찮을 터.

‘하아……’

다만, 가을에 전초전을 시작하고.

겨울에 휴전에 접어 들게 되면,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 전쟁이 지속 될지.

‘어찌……’

전생보다 현생이 더욱 다사다난한 느낌이 들어 라우라는 죄없는 토끼 인형의 길쭉한 귀를 사정없이 잡아 당겼다.

* * * * *

또각.

새벽, 모두가 잠이 들었을 시간이지만.

유흥가 근처 쪽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편이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그렇지도 않았다.

특히나 식료품을 팔던 가게들은 문을 닫은지 오래였고, 없는 형편에 의원을 찾는 백성들이 늘어났다.

혹여나 자신의 자식이 징출 되지 않을 수 있는 합리적인 질병을 앓고 있거나 하는 건 아닐까 싶었기에.

결국 최대한 정보를 억제하고 있다고 한들, 모두가 코앞으로 전쟁이 닥쳐왔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들썩!

야옹!

오직 쓰레기통 근처를 뒤적거리는 길고양이만이, 적적한 고요함을 깨트리며 자신을 반겨준다.

그렇게 거리를 거닐어 황궁으로 들어선 페르젠은 조용히 지하 감옥 위에 위치한 처형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벽 시간대라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데, 장소가 장소인지라 더더욱 시리게 느껴진다.

삐걱.

그에 단두대 옆에 위치한 낡아빠진 의자에 앉은 페르젠은 자신의 아공간에서 관을 꺼내어 이사벨을 사역한 뒤, 정말로 오랜만에 연초를 꺼내들었다.

파직……!

이윽고 이사벨의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푸른 전류가 연초에 불을 지피자, 페르젠은 그것을 한모금 빨아들인 뒤 부드럽게 숨을 내쉬었다.

유페미아와 약속한 뒤로 연초를 한번도 입에 머금지 않아서 그런지, 뇌리가 몽롱해지는 감각이 무척이나 낯설다.

“아무런 감흥조차 없느냐.”

제국 최악의 마녀라 불리었던 이사벨 론 피에르 제노바.

그녀의 손에 의하여 제노바 백작가는 반역죄로 대다수가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반역을 저지른 것은 로에르였어도, 사실상 그 주체가 자신이라 하지 못할 건 없었기에.

어찌보면 그 시신에 어울리는 그 주인이라 할 수 있지 않으련지.

꿈틀.

“하하……”

깨알 같이 비슷한 경험으로 인한 피드백이 받아들여져 시신의 구현율이 상승하자 페르젠은 자신도 모르게 너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아쉬움이 남는 군……’

만약 오베른 왕국에서 발견되었던 공장에서 일시적으로 가사상태에 빠트릴 수 있는 약물의 제조법이나, 하다 못해 완성된 약물을 하나라도 건질 수가 있었다면.

그것을 리지에게 사용하여 로에르와 세자르의 마지막 발악조차 말끔히 제거할 수 있었을 텐데.

세자르 본인에게는 모종의 수단을 펼쳐 놓았다고 한들, 리지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해당 약물을 이용하여 가사 상태에 빠진 리지를 피드백 받을 수만 있었다면, 로에르와 세자르가 준비한 조각배는 산산히 부서졌겠지.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으로 악독하지 않은가 싶어 페르젠은 연초를 깊게 빨아 들인 뒤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악마의 사전적 의미에 가장 가까운 건…… 분명 인간이라고 하였지.’

그 말에 절실히 공감하며, 페르젠은 다 타들어간 연초를 바닥에 던져버린 뒤 발로 짓이겼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새벽 하늘에 조금씩 여명이 드리우기 시작하고……

11월 13일의 아침.

세자르와 리지의 처형이 시작 되었다.

8년의 굴레.

얽히고 설킨 그 매듭을, 완전히 잘라내고 태워버릴 시간이 찾아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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