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시각은 새벽 2시 40분.
“……”
페르젠은 몰려오는 피로함에 미간을 슬며시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찻잔을 쥐어들고 따뜻한 홍차를 마셔보나, 오히려 배 안이 따뜻해지는 느낌에 더욱 짙은 수마가 찾아오는 걸 느꼈다.
그에 몸을 일으킨 페르젠은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맞이하며 눈을 감았다.
상당히 오랜 시간 집중을 하여 주어진 증거들을 뒤져보았지만, 아쉽게도 허점이라고 할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 모든 증거들이 로에르와 세자르의 자작극이라는 걸 알고 있는 자신 기준에서는 미묘한 허점들이 보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심증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 줄 뿐이지, 물증이 되지는 못했다.
특히나 모든 증거에서 자신을 향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아마도 자신을 언급 했다면, 증거들에 대한 검수가 지진부진하게 진행 될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리라.
딸칵.
그 때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페르젠은 고개를 돌렸다.
시녀들에게 간단한 다과를 준비해달라고 부탁을 하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기본적인 예의를 망각할 정도로 피곤한 일이었을까.
사실 이 정도 무례는, 얼마든지 눈감아 줄 수 있는 것인데.
묘하게 짜증이 나는 것을 보아하면, 지금 자신이 얼마나 신경이 곤두서있는지를 자각하게 해준다.
“어찌, 들어오자마자 치맛단을 걷어 올리고 종아리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할 것만 같은 눈빛이구나.”
“황녀, 전하……”
그러나 자신의 시야에 들어오는 건 시녀들이 아닌, 엘리자베스 황녀였다.
도대체 이 시각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무얼 하는 것인지.
옷차림도 겉옷을 걸치고 있다고는 하나, 외간 남자를 맞이할 복장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이곳에 왜 불이 켜져 있나 싶어서 들렸니라. 언질도 없이 찾아 온 것은 그대인데, 본녀가 어찌 알고 제대로 된 복장을 갖추고 있겠느냐.”
맨 다리를 조금 드러내고 있다고는 하나, 이 정도로 정조가 닳는 것도 아닐터.
“애당초 그대는 이것보다 더 한것을 보았을 텐데, 보여주는 반응이 참으로 모순적이구나.”
자연스레 페르젠의 곁에 앉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비워진 찻잔에 홍차를 따라 마신다.
역시 헐벗은 나신보다, 은근스레 가리고 있는 것이 사내들의 눈길을 끄는 것인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리는 페르젠을 보며 엘리자베스 황녀는 은은한 웃음을 머금은 채 주변을 둘러 보았다.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증거들과, 테이블을 어지럽히는 서류 뭉치들.
페르젠이 얼마나 이곳에서 악착같이 그것들을 재검수했는지에 대한 흔적들이 적나라하게 비추어진다.
“이쯤 확인을 했다면 그대도 알지 않느냐.”
“……”
“세자르의 시신을 통한 피드백 외에는, 결과를 바꿀 변수가 없다는 것을.”
“……”
도출해낸 결론을 한번더 직시 시켜주는 엘리자베스 황녀의 말에 페르젠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꼴이 말이 아니기는 하군요.”
“……”
“우습지 않습니까. 아폴리온 등급의 흑마법사가, 고작 제대로 걷지 조차도 못하는 소녀를 철저하게 죽이기 위해서 이러고 있다는 것이.”
피곤함으로 점칠된 페르젠의 얼굴을 마주보며, 엘리자베스 황녀는 뚱한 표정을 지은 채 턱을 괴었다.
“또 본녀에게 푸념을 하는 것이냐.”
“……”
조금 얄궂은 자신의 대답에 페르젠이 몸을 움찔한다.
그에 의외로 귀여운 구석도 있구나 싶어 엘리자베스 황녀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누가보면 본녀가 그대의 아내인지 알겠구나. 아니면 타인에게도 이렇게 약한 모습을 서슴없이 보여주는 건지.”
“전하.”
“아하하. 그대를 조금 놀려 본것이기는 하다만, 그것이 별로 싫지는 않니라.”
황실 또한 브뤼테인에게 오랜 세월 기대어왔는데, 이리 간간히 푸념을 하는 것 정도야 어찌 들어주지 못할까.
“술한잔을 기울이고 싶으나 상대가 없고, 마음을 터놓고 하소연을 하고 싶으나 그럴 대상이 없다면 기꺼이 황실을 벗으로 삼거라.”
벗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거슬렸지만.
브뤼테인과 황실 사이에 그을 수 있는 선의 최대치가 이것이니 어찌할까.
“백작.”
“예…… 황녀 전하.”
“죄없는 여인과 남성은 물론이고, 내일이 오늘이 될지도 모를 노인들과, 어미의 젖조차 떼지 못한 갓난 아기들이 죽었었다.”
“……”
저것은 로벨리움 왕국 내에서 건물들을 붕괴 시켰을 때를 일컫는 것이리라.
“그러니 이제와서 죄없는 소녀 한 명을 죽이는 것 정도야 무엇이 그리 어려울까.”
“……”
“더 이상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그 마지막 정도는 본녀가 대신 해줄 수도 있니라.”
홀짝, 차를 마시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본더.
그에 페르젠은 실소를 흘리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정도로 못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느냐.”
“예.”
탁, 찻잔을 내려두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고개를 돌려 방안에 놓인 시계를 힐끔 쳐다보고서는 몸을 일으킨다.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계는 새벽 4시에 가까워 지고 있었다.
이대로 아침이 밝아오는 걸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한잔 하겠느냐.”
“와인…… 입니까.”
“이대로 아침까지 어색하지 않게 그대와 대화를 지속할 자신이 없구나.”
침소로 돌아가는 것도 괜찮을 터인데.
그것을 배제하고 저리 말을 하니, 자신이 무어라 대답할 수 있으랴.
결국 시녀를 시켜 와인을 가져오게 만들고, 서로 한잔 두잔을 나누다보니 페르젠은 조금씩 취기에 젖어 들었다.
술기운이 뇌리를 감싸오니, 애써 피로함을 억누르고 있던 정신이 흐물흐물해지며 점차 수마가 몰려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음.”
기어코 말을 이어 나가던 엘리자베스 황녀를 두고, 페르젠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에 엘리자베스 황녀는 조용히 입을 닫고, 의자에 앉아 고른 숨소리를 내쉬는 페르젠을 페르젠을 쳐다보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슴푸레한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새벽.
조금 있으면 잠이든 것이 무색하리만큼, 눈을 떠서 활동을 해야 할 시간일텐데.
“그리자면 고개가 아플 것이니라.”
페르젠의 옆으로 다소곤히 자리를 옮긴 엘리자베스 황녀가 페르젠의 몸을 붙잡고 조심스레 자신의 무릎 위로 그의 머리를 뉘인다.
아니, 뉘이려 했으나 생각보다 페르젠의 키가 컸던지라 엘리자베스 황녀는 웃음을 터트리며 의자를 하나 더 가지고와 자신과 페르젠 사이에 놓았다.
팔걸이가 없는 의자이다 보니 이렇게 배치를 하면 상체 정도는 편하게 눕혀 쪽잠을 잘 수가 있겠지.
“고개는…… 바깥쪽으로 빼거나 위를 봤으면 좋겠는데.”
옷차림이 옷차림이다 보니, 고간쪽으로 슬며시 불어오는 그의 입김에 느껴져 엘리자베스 황녀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손을 뻗어 그의 고개 위치를 수십번 조절을 해보아도, 어찌 계속해서 자신의 아랫배 쪽으로 얼굴을 가져다대는 것인지.
“아내를 두명이나 두다보니, 자연스레 여인의 살결을 가까이 하게 된 버릇이라도 생긴게냐.”
포기하고 너스레 웃으며 엘리자베스 황녀는 페르젠의 머리카락을 쓸어 내렸다.
“그래……”
어차피 망가진 자신의 자궁을 그가 수복시켜준 것인데.
아랫배의 지분 정도야, 마음대로 가져 가라지.
그렇게 자신의 아랫배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잠을 자는 페르젠을 내려다보며, 엘리자베스 황녀는 조용히 따사로운 아침을 맞이했다.
* * * * *
잠결 도중, 몽롱하고 희미한 정신 너머.
페르젠은 자신의 코끝으로 풍겨오는 고혹적인 체취와 부드러운 살결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자신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내려주는 손길은 어찌 그리나 다정한지.
이것은 유리엘일까.
아니면 유페미아일까.
약간의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으나, 그러한 생각을 단숨에 덮어 버릴 만큼 자신을 어루 만지는 손길이 포근했기에.
페르젠은 얌전히 더더욱 깊은 수마에 빠져 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잠들었을지도 모를 수면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자신을 반기는 건, 창가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과 푹신푹신한 침대의 감촉.
슬며시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하니 어느덧 정오가 다되어간다.
술에 취해 잠이든 자신을 시녀들을 시켜 침상으로 옮긴 걸까.
본의 아니게 추태를 보였다는 생각이 들어 페르젠은 언짢은 표정을 지은 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바깥이 상당히 소란스럽다.
힐끔, 창문 너머를 바라보니 분주하다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만큼 바쁘게 뛰어 다니고 있는 관료들.
자고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 확실하다 싶어, 페르젠은 주름진 자신의 옷을 단정하게 정돈하며 겉옷을 챙겨 입었다.
똑똑.
그러나 문고리를 잡고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페르젠은 두어걸음 뒤로 물러났다.
“들어오게.”
벌컥!
허락을 했다고는 하지만, 어찌 실례한다는 말 조차 없이 서슴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건지.
“다행히도 잠은 푹 잔 것 같구나.”
움찔!
하지만 이번에도 자신을 찾아온 사람이 엘리자베스 황녀라는걸 깨닫고, 페르젠은 괜히 죄없는 넥타이를 바로 고치는 척 자연스레 시선을 피했다.
무려 제국에 속한 황실의 황녀를 독대하는 것인데, 경의를 느끼기는 커녕 도리어 친밀감이 먼저 피어오른다.
그에 페르젠은 속으로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벨리움 왕국에서부터 시작해 부쩍 가까워진듯한 그녀와의 거리감은 편안함 이전에 불편함을 함께 동반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황실과 피를 섞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규칙 때문에 자신이 느끼는 본능적인 거부감이겠지.
그녀는 여인의 몸이기에 자신의 씨를 얼마든지 받아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엘리자베스 황녀는 페르젠이 보여주는 그 어색한 반응에 쓰게 웃었다.
‘누가보면 술김에 몸이라도 섞은 줄 알겠구나.’
은근히 서운하기도 하여 조금 짓궂은 마음이 피어 올랐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기에 엘리자베스 황녀는 문을 닫은 뒤 입을 열었다.
“그대가 자는 사이에 처형일이 결정되었니라.”
“그렇습니까……”
관료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건, 반역자들의 처형을 준비하기 위한 과정의 일환일까.
아니,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모종의 위화감이 느껴졌기에 페르젠은 잠자코 엘리자베스 황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또한, 오베른의 국왕이 자결하였다는 소식이 급보로 전해졌니라.”
“……”
엘리자베스 황녀의 말에 페르젠은 순간적으로 몸을 흠칫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비밀리에 사절단을 조직하여 오베른 왕국으로 보냈을 터인데, 그러한 오베른 왕국의 왕이 자결하였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로에르와 관련된 일에 관해서 그다지 억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더군다나 과거 아카데미의 습격 소행도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자백을 해왔지. 가사상태에 빠트리는 약물을 제조하던 공장이 발견되었으니, 이 점에 대해서는 애초에 빼도 박도 할 수없었던 것이겠지만.”
“그는 스스로의 목숨값으로 대가를 치루려 했던 것입니까.”
“아하하……! 그럴리가 있겠느냐.”
오히려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베른의 국왕은 배후가 엘마르크 제국임을 언급하며, 그 자리에서 폭사하였다.”
“……”
한 나라의 왕이다.
그러한 왕의 몸이, 수많은 살점들과 피를 흩뿌리며 터져 나가는 광경은 다른 말로는 충격적이라 할 수 있을 터.
최대한 정보를 통제한다고 하여도, 삽시간에 퍼져나가는 건 시간 문제이겠지.
그리고 오베른의 국왕이 그런 식으로 자결하였다는 점에서, 페르젠은 오베른 왕국이 엘마르크 제국의 명령 따위를 받았다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놀아났군요.”
정말로 엘마르크 제국의 명령을 받아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기 위한 광대로 춤을 췄던거라면, 스스로의 목숨을 끊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독자적으로 움직인 것이기에, 오베른의 국왕은 자신의 시신을 남기지 않는 자결을 선택한 것이겠지.
이리 되면 이번 일의 옳고 그름을 단순히 엘마르크 제국에게 물을 수 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엘마르크 제국은 틀림없이 그것을 부정하리라.
하지만 황족 시해까지 발생한 시점에서 에르네스 제국이 말뿐인 그 주장을 얌전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오베른 왕국은 애당초 엘마르크 제국의 속국이었으며, 발견된 공장에서도 그들의 흔적이 있다고 하니.
증거와 증언이 마련된 이 시점에서 에르네스 제국은 먼저 전쟁을 선포할 수 밖에 없었다.
‘오베른 왕국은……’
애초부터 이것을 원했던 것이었나.
그들이 어째서 두 제국 사이의 전쟁을 바라고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동기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추측 하는 건 미련한 짓이겠지.
“곧 곡물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아 오르고…… 브뤼테인에서는 철의 노래가 울려 퍼지겠구나.”
걸음을 옮겨 창가로 다가간 엘리자베스 황녀가 바깥을 바라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 거린다.
그래, 가을.
전쟁의 전초전을 펼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계절이었다.